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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의 문화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9. 5. 8. 20:25

    기원전 300~100

     

     

    로마와 로마의 문화는 기원전 3세기와 2세기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로마가 이탈리아를 제패하고 해외제국을 건설하면서 유입된 부는 로마시의 물리적 확장과 건축의 발달을 가져왔다.

    남 이탈리아, 시칠리아, 그리고 헬레니즘 세계의 세련된 그리스인들과의 빈번한 접촉도 초기 로마의 수준을 넘어서 전반적으로 문화 생활이 향상되는데 기여했고, 이로써 지중해 전역을 무대로 하는 그리스 로마 문화의 생성과정이 시작된다

     

     

     

    A pair of terracotta winged-horses c. 350 BCE. (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 Tarquinia)

     

     

     

    주화의 발달

    마지막 에트루리아 왕을 몰아낸 뒤(bc500년 경), 로마인들은 농업 경제로 되돌아갔는데, 그것은 토목 사업이나 문화 활동을 뒷받침할만한 충분한 잉여 재산을 만들지 못했다. 독립 장인들, 상점 주인들, 소수의 무역업자들을 제외한 대다수 로마인들은 심지어 귀족조차도 로마 근교의 사유지에서 농사를 짓고, 거기서 나오는 산물로 생활했다.

    기원전 300년 이전 농업경제의 낮은 수준은 돈을 뜻하는 라틴어 pecunia 가 소나 양을 뜻하는 pecus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이 잘 예시해준다.

    기원전 5~4세기에는 크기가 일정치 않은 청동 덩어리가 거래 때마다 번번이 무게를 재는 과정을 거쳐 소나 양 대신에 교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후에는 크기를 일정하게 만든 청동덩어리를 사용했고, 국가가 독특한 표지를 직어 순수한 청동임을 보증했다(aes signatum).

     

     

     

    aes signatum fourth century BC 

     

     

    기원전 289년경에는 로마의 경제적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세 사람의 화폐주주 담당자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치하여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의 유노 모네타juno moneta신전에 세워진 국가 조폐국을 감독하게 했는데, 이 조폐국 명칭에서 money라는 단어가 유래했다.

    이 조폐국은 아이스 시그나툼을 제조했지만 이것은 무게나 가치가 아닌 순도만 표시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화가 아니었다.

    그들은 에세스 혹은 아이스 그라베(aes grave무거운 청동)이라는 최초의 진정한 주화도 생산했다.

    이 청동 주화들은 원형이었고, 로마의 한 파운드인 리브라(약 11온스)나 그것을 작게 나는 단위들로 발행되었다.

    크기가 점차 작아진 1아스짜리 청동화가 공화정 시대 내내 공통 주화로 통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남 이탈리아의 그리스인들과 깊은 관계를 맺음에 따라, 그리스인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던 은화에 비길 은화를 제조할 필요성을 발견했다.

    최초의 로마 은화는 2드라크마짜리 주화인 디드라크마didrachma로서, 캄파니아의 은화를 본따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Campania (Neapolis), didrachma, 320-300 BC

     

     

     

    기원전 170년경부터 가볍게 만든 은화인 데나리우스denarii와 그보다 소액 주화들인 퀴나리우스, 세스테르티우스가 로마 은화의 표준 은화가 되었다. 이 화폐단위가 얼마의 경제적 가치가 있었는가 하는 것은 한 데나리우스가 고용된 노동자의 하루 품삯 정도 되는 액수였다는 사실로 가늠해 볼 수 있다. 

     

     

     

    건축과 예술

    포에니 전쟁을 치르기 전의 로마시는 지방적인 소도시와 지역 시장에 불과했다. 

    기원전 390년 갈리아인들의 약탈 이후에 그리스 장인들의 도움을 받아 건축했을 방어벽들과 에트루리아 양식에 영향을 받아 건축한 주요 신전들 이외에는 변변한 건축물이 없었다.

    부자들은 중앙에 빛과 신선한 공기를 제공하도록 하늘을 향해 열린 중앙의 아트리움Atrium이 딸린 넓은 집에서 쾌적한 삶을 누렸지만 대다수 주민들은 얇은 욋가지에 석회를 바른 작은 집에 살았다.

    그러나 넓은 집이라도 후대에 부자들의 표지가 된 정원과 열주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로마 광장 주변의 상점들tabernae의 윗층에 발코니가 덧붙은 것은 기원전 338년의 일이었다.

     

    기원전 300년 경에 로마인들은 후일 명성을 얻게 된 대규모 토목사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기원전 312년 켄소르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마이쿠스가 저 유명한 도로포장공사를 시작했는데, 로마와 카푸아를 잇는 아피우스 가도Via Appia였다. 이 도로는 후대에 지중해 세계 전역으로 뻗어 로마의 거대한 도로망의 모델이 되었다. 같은 해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의 수로들 중 최초의 수로인 아쿠아 아피아Aqua Appia 를 착공했는데, 이 수로는 길이가 1.6km 정도 되었다. 기원전 272년에 이보다 훨씬 긴 아니오 베투스 수로가 완공되어 사비니 산지에서부터 80km가 넘게 설치되어 신선한 물을 공급했다.

     

    Aqua Appia 

     

     

     

     

    기원전 2세기 초반 로마의 급속한 팽창은 국가 관리들과 개인 후원자들에 의한 건축을 촉진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들은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여러 개의 도로와 수로와 신전과 공공 건물, 개선문, 소도시 가옥들을 건축했고, 이 건축물들이 로마를 헬레니즘 양식의 중요한 메트로폴리스로 탈바꿈해놓았다.

     

    탈취해온 그리스 조각상들이 공공건물뿐 아니라 개인 건물도 장식했고, 그리스의 원작품이 부족할 때는 그리스 장인들을 고용하여 그리스 예술품을 모사하게 하거나 로마의 신들과 영웅의 조각상들을 헬레니즘 양식으로 제작하게 했다. 

     

     

     

     

     

     

    기원전 2세기에 헬레니즘의 인간 실물 묘사에 대한 관심과 조상의 형상을 밀랍 마스크로 보존하던 로마 - 에트루리아 관습, 그리고 장례 초상화들이 한데 합쳐져 돌과 브론즈를 사용한 사실주의적 인물 조각이라는 로마의 독특한 양식을 낳았다.

     

    그리스의 프레스코 회화도 로마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기원전 3~2세기에 그리스 예술가들이 이런 회화 매체에 가장 완숙한 경지에 올랐다. 그들은 피로스와 카르타고 전쟁에서의 승리같은 로마사의 중대한 사건들을 공공건물에 묘사하도록 고용되었다.

    부자들에게는 그리스 작품을 재현한 프레스코 회화들과 벽화로 오늘날의 가정에 아름다운 그림과 벽지가 사용되는 것과 똑같이 아름답고 조용한 인물상, 풍경, 장식 무늬를 제공했다. 

     

     

     

     

     

     

     

    ancient roman fresco

     

     

     

     

    문학

    초기 로마에는 본격적인 의미의 문학이 존재하지 않았다. 집필은 주로 실질적이고 일상적인 목적을 위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부터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의 진보한 문학에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점차 많은 수의 로마인들이 그리스어를 배웠다. 무엇보다도 그리스어는 로마가 이탈리아와 카르타고를 정복한 뒤에 중요한 부분이 된 광범위한 세계의 국제 공용어였다.

    많은 로마인들이 도덕적, 군사적 우월감에도 불고하고 더 유서깊고 더 세련된 문화 업적들 앞에서 경외와 존경을 느꼈을 것이고 그것을 모방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 문학은 로마 상류층에 실질적이고 사회적인 가치가 있었다. 그리스어는 초기 라틴어보다 더 복잡한 개념과 사상을 형성하고 표현할 수 있게 해주었고, 라틴어에게 갈수록 복잡해져가는 세계에 표현력을 확장해 갈 수 있는 모델이 되었다.

    그리스 웅변가들은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수사학의 원칙들을 완성했는데 그것은 로마 귀족들이 논쟁을 하거나 광장에서 투표인단에게 연설할 때 대단히 유용했다. 그것이 상류층이 하층민들과 구별되어 보이도록 하고, 모든 엘리트들이 갈망하는 우월감을 주었다.

     

    이런 요인들이 그리스인 교사라는 수요를 창출했고, 이런 수요는 교육받은 그리스 노예들을 부유한 주인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부리는 형태가 되었다. 

     

     

     

     

    lucius livius andronicus

     

     

    이런 교사들 중 한 사람이 루키우스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였다. 

    그는 기원전 272년 노예로 로마에 끌려가 루키우스 리비우스의 집으로 들어갔다.

    후에 해방되면서 관례대로 후원자의 이름을 따서 루키우스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가 되었다.

    그는 교사 뿐 아니라 로마인들을 위한 그리스 문학 번역자 및 번안가가 되었다.

    초기 작품 중의 하나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그리스어의 사투르누스 운율로 번안한 작품이다.

    오디세이아는 당시에 막 이탈리아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지평을 확장하고 있던 로마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원전 240년에 매년 루디 로마니라고 하는 로마 경기를 계획한 아이딜리스들은 최근의 제1차 포에니 전쟁 종전을 기념하는 특별행사를 원했다. 그들은 리비우스에게 로마 무대에 올릴 그리스 비극과 희극을 한 편씩 번안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의 노력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향후 로마 연극의 경향을 설정했다.

     

    그 뒤 로마의 모든 저자들이 그리스 저서들을 차용한 사실로 인해 로마 문학이 통째로 파생물이고 존중할 가치가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독창성 개념은 현대의 것과 다르다. 고대 예술가에게 최고의 과제는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전승 안에서 개선하고 향상하는 것이었다. 

     

     

     

     

     Gnaeus Naevius

     

     

    작가로 최초의 성공을 거둔 사람은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보다 약간 어린 동시대 사람 그나이우스 나이비우스였다.

    그는 비극과 희극, 서사시와 풍자에 능숙했다. 라틴어 고유의 사투르누스 운율을 계속 사용했고, 로마 최초의 국가주의 시인이었다.

    그리스 신화보다 로마사의 사건들을 다룬 최초의 중요한 희곡들을 썼다. 아울러 최초의 애국적인 로마 서사시를 썼다. 

     

    플라우투스와 테렌티우스; 비극과 희극은 로마에서 가장 크게 발달한 최초의 문학 장르였다. 플라우투스보다 어린 동시대 사람인 테렌티우스는 카르타고에서 태어나 원로원 의원의 노예로 끌려온 아프리카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테렌티우스는 서양세계 최초의 흑인 작가였을 가능성이 있다. 주인이었던 원로원 의원은 젊은이의 재능을 알아보고 좋은 교육을 시킨 뒤 해방시켜 주었다고 한다. 그의 재능은 소 아프리키누스의 눈에 띄어 그의 도움으로 문인의 길에 들어섰다. 테렌티누스의 희곡들은 플라우투스의 희곡에 비해 지적이고 만담적인 성격은 적다.

    갈수록 헬레니즘의 물을 먹은 엘리트 지식인들은 대규모의 청중에게 인기를 끄는 작품에 등을 돌렸다. 그들은 다른 형태의 작품 쪽으로 눈을 돌린 반면 보통 로마인들은 여전히 플라우투스와 테렌티우스의 희극 재공연을 좋아했다.

     

    로마의 산문은 희극에 비해 전성기에 도달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최초의 본격적인 로마 산문 작가들은 제2차 포에니 전쟁 뒤에 그리스어로 쓴 역사가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로마 건국부터 자기 시대에 이르는 역사를 썼다. 그들은 특히 포에니 전쟁에 관심을 기울였고, 로마 지도자들의 정책과 행위를 가장 포지티브한 시각에서 묘사했다. 

     

    라틴어로 역사를 서술한 최초의 로마인은 대 카토Cato the Elder였다. 카토는 자신의 로마사 외에도 라틴 산문에 여러가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법학, 의학, 농학에 돤해 상당한 양의 책을 썼는데, 그중 농학 저서인 농업서는 현존하는 최초의 라틴 산문이자 기원전 2세기에 로마의 삶과 경제사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는 수사학에 관한 책도 썼는데 이는 수사학과 수사학 훈련이 점차 중요성을 띠어가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철학

    로마에서는 수사학, 웅변술과 나란히 철학에 대한 관심이 자라났다. 그리스 철학, 철학 체계는 로마인들에게 유용했다. 왜냐하면 그 체계는 연설에 개념적 논리적 틀을 제공하고, 논쟁 기술을 예리하게 갈고, 개인적 혹은 파당적 목적에 화려한 수식을 입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의 전통 가치관과 좀 더 양립할 수 있었던 것은 스토아 철학이었다. 세상은 신이 창조했으므로 형제애와 질서를 존중해야 하고, 의무를 중시하고, 현자들이 자연 이법에 따라 통치해야 한다는 스토아 학파의 학설은 팽창해가던 제국을 정당화해야하는 로마인들에게 안성마춤이었다. 

    로마인들 스스로는 철학에 이렇다 할 독창적 기여를 하지 못했다. 복잡하고 시시콜콜한 철학논쟁을 갑갑해 했다. 대부분 그리스 학파들의 확립된 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여 자기들의 목적에 부합한 체제를 택하고 그것을 삶에 적용했다. 

     

     

     

     

     

     

     

    출처>로마사 - 프리츠 하이켈하임/세드릭 요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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