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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차 포에니 전쟁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9. 5. 6. 16:48

     

    기원전 149~146

     

    히스파니아와의 전쟁은 기원전 133년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그 뒤에도 아우구스투스 때까지 히스파니아는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다.

    원로원은 기원전 197년에 독립된 속주들로 분할하고, 각 속주를 평시에는 프라이토르가 다스리되, 전시나 비상시에는 콘술의 권한을 가진 정무관이 다스리도록 했다. 

    속주 행정과 국방 비용은 조공과 정규 세금으로 충당했다.

     

    기원전 195년에 신임 콘술 카토(Cato the Elder)가 5만의 병력을 이끌고 히스파니아 북동부에 도착했다. 그의 군사적 업적보다 더 항구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은 그의 경제 및 행정 개혁이었다. 

    유명한 개혁 호민관들인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아버지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는 개혁 조치들과 공정성과 호감으로 명성을 얻은 또 다른 총독이었다 

    그는 사회 불안요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소도시들과 촌락을 새로 건설하고,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정착하기에 좋은 땅을 제공했다.

    그가 심어놓은 믿음과 신뢰로 근 히스파니아는 25년간 만족스럽고 평화롭게 유지되었다.

     

     

    Tiberius Sempronius Gracchus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부부와 두 아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히스파니아에 뿌리내린 평화와 질서는 후임 총독들의 잔인한 행위로 인해 파괴되었다. 

    원로인들의 불만을 방치했고, 이로인해 히스파니아의 증오심은 기원전 1세기 말까지 차곡차곡 쌓여갔다.

     

     

    제3차 포에니 전쟁

    로마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본토인들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동안 북 아프리카의 정세는 로마와 카르타고의 투쟁사에서 최종적이고 가장 아쉬운 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카르타고는 자마 전투 이후 군사적 정치적 세력을 상실했는데도 불구하고 번영을 구가했다. 여전히 선적과 공업의 중심지였고 아프리카와 헬레니즘 세계간의 모든 교역을 장악했다.

    로마와의 상업적, 외교적 관계도 꾸준히 개선되었다. 로마인들을 만족시키고 그들과 협력하기 위해 카르타고인들은 조약 의무들을 성실히 준수했다. 한니발을 거부하고 여러 번에 걸쳐 로마군에게 식량을 제공했고, 로마인들이 필리포스 5세 등과 외국과 전쟁을 치를 때는 육군과 해군을 지원했다. 

     

     

     

    필리포스 5세

     

     

     

    로마와 카르타고의 우호관계는 카르타고를 희생시키는 대가로 누미디아왕국을 확장시킨 마시니사Massinissa의 야심과 호전성때문에 결렬되었다.

    마시니사는 로마인들이 패전국들을 간접 통제를 하기 위해 과거에 헬레니즘 소국들을 활용했던 것 처럼 카르타고를 제재하는 데 그보다 세력이 약한 마시니사를 이용했고, 결과는 똑같았다. 마시니사는 로마를 교묘하게 조종하려했고, 그로인해 큰 전쟁이 일어나도록 촉진했다.

    카르타고는 자마전투 패전 이후 영토가 제한되었고 마시니사는 조상들이 과거에 차지한 적이 있는 땅은 어디든 차지하도록 허용되었다.

    또한 로마의 동의 없이는 전쟁을 치르지 못한다는 조항을 마시니사는 십분 이용했다.

    마시니사는 모로코로부터 키레나이카 서쪽 변경에 이르는 카르타고의 해안 식민시들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조약에 의해 이 공격을 막을 권리가 없던 카르타고는 로마에 호소했으나 파견된 위원단은 마시니사에게 유리하게 판결하거나 분쟁을 방치했다.

    기원전 154년 경 마시니사는 기존 카르타고 영토의 1/6을 잘라갔다. 카르타고의 다급한 호소에 로마는 카토를 단장으로 국경분쟁조정위원회를 파견했다. 

     

     

    그 거만한 도시 - 부와 사치로 넘치고, 전사들로 차고 넘치고, 무기와 군장비가 그득하고 조선소마다 일감이 넘치는 - 가 카토의 마음에 원인 모를 증오를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Turner's   The Rise of the Carthaginian Empire

     

     

    카도(the Elder)는 구호를 반복해서 외침으로써 그 주제에 관한 연설을 마쳤다.

    "카르타고는 반드시 멸망해야 한다"

     

     

    카토처럼 일부 로마인들의 마음을 격동시킨 두려움과 증오가 카르타고와의 두 번에 걸친 전쟁의 적이었던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해야한다는 주장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카르타고인들은 서방에서 로마의 주요 해외경쟁자였고, 아울러 주요 농산품 수출국이었는데 로마까지 배로 사흘밖에 걸리지 않아 로마 원로원 의원들의 사유지에서 출하된 로마의 농산품 시장에서 우월한 경쟁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기원전 152년 제2차 포에니전쟁 뒤에 부과한 거액의 배상금을 완전히 갚았다는 점이었다 - 살찐 거위가 더이상 황금알을 낳아주지 못한다면 거위 자체를 식탁에 올려 놓고 싶었을 가능성이 크다.

     

    로마 원로원 다수가 전쟁 쪽으로 기울었다는 폴리비오스의 진술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이제 필요한 것은 노골적인 침략을 위한 구실이었다

     

     

     

    The Third Punic War was basically just about destroying and defeating Carthage

     

     

    그 구실은 마시니사가 카르타고의 영토를 몰염치하게 가로챌 때 그것을 암묵적으로 권장함으로써 쉽게 생겼다.

    기원전 150년에 카르타고와 마시니사 사이에 전쟁이 터졌고, 그 결과 훈련과 지휘력이 다 같이 미흡한 카르타고가 참패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카르타고인들은 마시니사와의 전쟁으로 자마 조약을 어기게 되어 로마가 선전포고 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했다.

     

    기원전 149년 켄투리아회가 전쟁을 최종적으로 선포했다. 카르타고는 평화협상을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고, 3백명의 인질과 콘술들이 앞으로 지시할 모든 내용을 이행한다면 영토와 독립을 보장받을 것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콘술들은 모든 무기를 버리고 군대를 해산하라고 요구했고, 답변을 들은 뒤 원로원의 마지막 조건을 고지했다.

    카르타고인들에게 도시를 버리고 파괴한 뒤 해안에서 최소한 16km 안쪽으로 도시를 재건하라는 잔인한 내용이었다.

    로마인들은 그런 모욕적인 요구로 자신들이 원하던 전쟁이 일어나리라고 계산한 것이다.

     

    카르타고인들은 분노에 휩싸여 도시를 방어할 준비를 했다. 포위는 3년간 계속되었다. 카르타고의 성벽은 튼튼했고,  마시니사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로마군대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고 지휘관들의 역량도 형편 없었다. 

    그러나 두각을 드러낸 젊은 장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공격은 대단한 것이었고, 이 젊은 콘술은 마침내 기원전 146년 봄에 기습 공격으로 카르타고를 점령했다. 

     

     

     

     

     

    그 아름답던 도시가 불바다가 될 때까지 엿새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마지막으로 함락된 곳은 성채로서 1만 5천 명의 시민들이 생포되었다. 모두 노예로 팔려갔고, 카르타고는 총독이 주둔하는 속주가 되었다.

     

     

     

     

     

    출처> 로마사 - 프리츠 M 하이켈하임/세드릭 A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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