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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 이탈리아의 최후 정복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1. 2. 1. 20:02



    제2차 삼니움 전쟁 (기원전 327-304/3)

    로마는 비록 삼니움인의 적대감을 촉발시킬 의도가 없었지만 로마의 식민시와 동맹체제가 삼니움인들이 서쪽으로 확장할 기회를
    차단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고, 오스키인들과 전쟁중이던 타렌툼(타란토)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삼니움의 동쪽을 잠식하게
    되었다.
    로마와 삼니움간의 적개심은 기원전 327년 나폴리에서 발생한 내분에 삼니움인들이 한쪽 진영을 지원하기 위해 수비대를 진주시켰을 때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 반대 진영을 지원하던 로마인들은 나폴리를 포위한 끝에 함락시켰고, 이로써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의 전사戰史는 불확실하다.
    연대기 저자들이 기록하는 전투들이 모두 실제로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파스티가 기원전 321년에 발생샜다고 하는 카우디움 분기점Caudine Forks 전투를 제외하고는 그다시 중요하지 않다.
    캄파니아를 출발하여 아풀리아로 진격하려던 로마인들은 거짓정보에 속아 카우디움 분기점에서 덫에 걸렸고
    그 곳에서 항복하고 인질을 내주고는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동의했다.




    그들은 옷을 벗기운 채 창 두 개를 땅에 박고 다른 창을 위에 걸쳐 만든 멍에문 밑을 기어서 지나가는 치욕을 당했는데,
    멍에문을 기어서 간다는 것은 완전한 패배와 무조건적인 항복의 표시였다.


    새로운 군사 전술

    카우디움의 치욕은 로마인들에게 산악 전투방법을 익혀야 할 필요를 절실하게했다.
    그들은 평화를 이용하여 군대를 재조직했는데 전열을 3열 횡대로 배열하고 각 횡대마다 따로 훈련시키고 다른 무기로 무장하고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부대를 배치했다. 
    이 새로운 진용은 산악지형에서 효과적으로 전투를 할 수 있었고, 몇몇 부대는 팔랑크스의 장창대신 삼니움인들의 투창으로 무장했다.
    이제 평지에서는 그리스인처럼, 산악에서는 삼니움인처럼 싸울 수 있게 된 로마인들은 기원전 316년에 평화조약을 파기하고
    전쟁을 재개할 구실을 찾았다.

    군대를 재조직했어도 억센 삼니움인들과의 전쟁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였다.
    다음 해 로마인들은 테라키나 근처의 라티움 남부의 해안 읍에서 다시 한 번의 심각한 패배를 당했다.
    이 패배로 인해 캄파니아 동맹국들이 거의 이탈할 지경에 이르렀으나, 강력한 압박으로 다시 동맹에 편입되었다.
    그에 비해 라틴인들은 확고한 태도를 견지했다. 삼니움인들이 본거지에 너무 가깝게 접근해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기원전 338년 이후 로마인들의 후대정책 때문이기도 했다. 
     
    빼앗겼던 땅을 되찾고 중요 거점들에 식민 전초 기지들을 세우는 방식으로 캄파니아 전세를 안정시킨 로마인들은 과거
    루케리아에 대규모 기지를 건설했던 아풀리아 전선으로 관심을 돌렸으며 동시에 삼니움 포위 정책을 계속했다.




     
    남쪽에서는 루카니아인들과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북쪽에서는 삼니움과 가까운 친족들인 미르시, 마루키니, 파일리그니, 프렌타니인들과
    군사 동맹을 체결했는데, 이 전략은 즉시 효력을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삼니움인들도 로마의 외교 전술을 모방하여 에트루리아 남부의 도시들을 설득하여 로마와 맺은 조약을 파기하게 하고 로마에 대한
    제 2의 전선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갈리아인들을 끌어들여 군사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면 상당히 위험했겠지만 갈리아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에 힘입어 로마는 계속해서 중부 이탈리아를 세로로 분할하는 넓은 완충지대를 형성할 수 있었고 삼니움의 심장부에 치명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이러한 힘의 과시로 에트루리아인들에게 다시 조약을 체결하게 하고
    준수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 빈틈없는 군사,외교 전략은 기원전 312/10년의 켄소르였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Appius Claudius Caecus 로 추정된다.
    명민한 정치가였던 그는 로마 최초의 거대한 수로를 건설하고 여러가지 개혁을 추진해서 시민들의 지지을 받았다.
    로마에서 카푸아를 잇는 대로를 건설하여 병력이 어떤 기후에도 신속히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든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그것이 유명한 아피우스 가도이다.


    Appius Claudius Caecus




    이렇게 전략이 탁월하고 위험과 패배에 굴하지 않고 인내와 용기를 잃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제2차 삼니움 전쟁을 쉽사리 승리로 이끌지는 못했다.
    양 진영이 여전히 영토와 인구에서 백중세였고 저마다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들을 갖고 있었다.
    이 전쟁은 오래 걸렸고 희생자도 많았으며, 승리도 결정적이지 못했다.
    기원전 304/3년의 평화 조약에 그 점이 여실히 드러나 있는데, 삼니움은 원래의 영토도 잃지 않았고, 독립도 상실하지 않았으며
    다시 싸울 능력도 잃지 않았다.


    제3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298-290)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의 균형은 로마 쪽으로 꾸준히 기울고 있었다.
    기원전 304/3년 이후에 로마가 23,927 평방 킬로미터의 영토와 927,000명의 인구를 장악하고 있었던 반면
    삼니움은 14,700 평방킬로미터 영토와 498,000명의 인구를 장악하고 있었다.
    세력 균형이 깨질 위험이 증대하고 있다는 것은 사비니인들과 에트루리아인, 움브리아인, 심지어 갈리아인들조차
    의식하고 있었다. 이들이 로마를 저지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기원전 295년에 삼니움과 군사 맹을 체결했다.
    이들은 움브리아의 센티눔에서 로마와 맞서 싸웠다.
    로마인들은 중부 이탈리아의 패권을 다툰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290년 삼니움인들은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는 항복하고 화평을 간청했다.
    땅은 합병되었고, 그들은 로마 동맹국의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에트루리아인들과 갈리아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우다가 기원전 283년 바디모 호수 대접전에서 패배했다.
    다음 해 다시 한 번의 패배를 겪은 갈리아인들은 화평을 청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수년간 계속 저항했으나 마침내 항복하면서
    온건한 조약을 맺었다. 영토를 잃은 에트루리아의 유일한 도시는 과거에 로마 동맹국이었던 카이레뿐이었다.
    이 도시는 아마 기원전 273년에 합병된듯 하며 시민들은 투표권이 없는 로마 시민권을 받았다.





    내용발췌> 로마사 - 프리드리히 M 하이켈하임, 세드릭 A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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