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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의 이탈리아 정복 ll - 주변국들과의 전쟁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0. 8. 1. 23:01


    아이퀴인과 볼스키인

    아이퀴인과 볼스키인은 기원전 5세기 내내 로마의 가장 고질적인 원수였다.
    아이퀴인이 로마 남동쪽 투스쿨룸 근처에 솟아있는 알기두스 산이라는 전략적 고지를 점령한 뒤로 로마인들은 그들을 몰아내기가 어려웠다.
    파스티에 따르면 기원전 458년에 로마 군대가 알기두스 산 밑의 계곡에서 아이퀴인의 함정에 걸렸는데, 다섯명의 기병이 포위선을 뚫고 로마에 그 소식을 전하지 않았더라면
    로마 군은 몰살당할 뻔했다고 한다.

    전승에 의하면 너무나 중대한 위기였기 때문에 원로원이 보낸 사절이 농사에 전념하고 있던 킨킨나투스Cincinnatus를 만나러 갔다.




    원로원의 요청을 받고있는 Cincinnatus

    Juan-Antonio Ribera-y-Fernandez
    Museo del Prado in Madrid




    원로원의 강권을 못이긴 킨킨나투스는 독재관 직을 수락하고 군대를 끌고 가서 아이퀴인에게 대승했다.
    승전 후에 그는 독재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서 황소를 키우며 농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의 승리는 아직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로마인들이 기원전 431년까지 알기두스 산에서 아이퀴인들을 몰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볼스키인들을 몰아내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이들은 남동쪽에서 끊임없이 라티움을 침략했고, 해안을 따라 여러 라틴 도시들을 점령했다.
    볼스키인은 북쪽으로 알바누스 산까지 깊숙이 뚫고 들어왔고, 그 세기 말에 가서야 비로소 로마와 라틴 동맹군이 그들을 라티움에서 몰아내고
    접경에 여러 식민시들을 세워 방비했다.


    베이이인

    기원전 5세기에 로마가 감행한 침공은 특히 테베레 강 이북으로 15마일 떨어진 에트루리아의 도시 베이이를 겨냥한 것이었다.
    베이이는 크고 부유하고, 요새화한 도시로서, 하 테베레 강 유역을 놓고 로마와 관할권 투쟁을 벌인 주요 경쟁세력이었다.







    기원전 5세기 중엽에 라티움에 남은 에트루리아의 유일한 요새는 베이이에서 강 건너편에 자리잡은 피데나이에서 테베레 강과 합류하는
    크레베라 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여전히 영웅전사를 앞세운 구직 전술로 전투를 벌이던 로마의 씨족 파비우스가는 사실상 전멸을 당했다.
    그러나 기원전 426년  전투 끝에 베이이의 왕을 죽인 코르넬리우스 코수스의 지휘하에 로마인들은 피데나이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20년 뒤 로마인들은 전쟁을 재개하여 베이이 자체를 공격했다.
    리비우스는 그 공격을 트로이 전쟁에 견줄만한 10년간의 서사시적 혈전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 정도로 대규모 전쟁은 아니었다.
    그래도 로마가 그 때까지는 감행해 본적이 없었던 대규모의 군사작전이었다.

    로마인들은 마침내 베이이의 성벽 밑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방법으로 승리를 거둔다.
    이는 로마인들이 전쟁에 토목기술을 사용한 현저한 예였다.
    토목기술을 사용한 공격이 군단 병력의 공격보다 더 성공적으로 입증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결국 베이이를 함락시키고 주민들을 노예로 팔아 넘기고, 그 영토를 합병했다. 그렇게 합병한 영토는 로마의 면적에 거의 두 배나 되었다.


    갈리아인

    베이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독재관 카밀루스가 자축하고 있는동안, 갈리아인들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밀려오고 있었다.
    얼마 뒤에는 그들이 반도를 휩쓸고 내려오면서 지나는 곳마다 죽음과 폐허를 남겨놓게 된다.
    로마는 그들이 지나갈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남진을 피할 수 없었다.
    로마인들이 갈리 인들Galli, Gauls 이라 부른 이 새로운 침략자들은 켈트족으로 알려진 큰 덩어리의 인도 유럽어족의 일부였다.
    이들은 특히 금속 제련 기술이 뛰어났고, 여러 세기 동안 라인 강에서 도나우 강 중간에 이르는 유럽 중부에 정착했었다.
    이들은 기원전 700년 이후에 그리스와 에트루리아와의 교역에 힘입어 급속히 발전했다.
    기원전 500년경에 인구 증가와 게르만 족의 이민으로 인한 압박이 이들을 밖으로 내몰고 있었다.
    비록 그리스에 정착하려던 켈트인들은 격퇴되었지만 그중 한 종족인 갈라티인은 기원전 3세기 초에 소아시아로 비껴가서 그곳에 정착했다.
    다른 많은 켈트인 집단들은 이탈리아 북부, 영국 제도, 프랑스 대부분의 지역, 히스파니아의 많은 부분으로 이주했다.







    그들의 후손은 부르타뉴, 아일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산지에서 만나볼 수 있다.


    기원전 500년 이라는 이른 시기에 갈리아 인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에트루리아인들이 지배하고 있던 이탈리아 북부로 진입하기 시작한 듯 하다.
    다섯 개의 거대한 종족이 여자들과 자녀들, 소떼와 양떼, 전차, 마차, 등짐을 진 짐승을 거느리고 평야를 새까맣게 메우면서 밀려 내려왔다.
    에트루리아인들은 그 광활한 지대에서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볼로냐는 기원전 350년까지 버텼고, 마르차보토도 오랜 혈전을 치른 뒤에 함락되었지만 대다수 지역은 쉽게 점령당했다.
    침략자들 중 다수는 그곳에 정착하여 온화하고, 역량있고, 근면하도 번성하는 좋은 농부들이 되었다.
    코모에서 안코나까지, 밀라노에서 베르나까지 나라 전체가 켈트인이 대세를 이루는 하나의 영토가 되었으며 로마에게 키살피나 갈리아Cisalpina gallia(알프스 이쪽 편의 갈리아)로 알려지게 되었다.



    키살피나 갈리아Cisalpina gallia




    침략자들의 마지막 대열에 합류한 세노네Senone인들은 북쪽의 좋은 땅이 이미 차지된 것을 발견하고 남진하여 기원전 390년에 에트루리아의 소도시인
    클루시움(키우시)를 덮쳤다.
    불안을 느낀 로마인들은 협상을 요청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냈지만, 사절단 중 한 사람이 갈리아의 한 족장과 싸우는 바람에 협상은 무산되었고 평화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로마는 좋은 요새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갈리아인을 중간에서 저지하기 위해 진군해 올라갔다.
    이들이 마주친 것은 알리아 강이었다. 이 강은 북쪽에서 흘러 로마에서 11마일 쯤 되는 지점에서 테베레 강과 합류하는 작은 강이었다.
    쇠 신발을 신은 갈리아 기병대와 길고 날카로운 칼로 무장한 보병이 둔하고 기동력이 떨어지는 로마의 창병 팔랑크스를 공격했다.
    대열이 무너지면서 공포에 사로잡힌 로마인들은 테베레 강을 헤엄쳐 건너 베이이로 도주했고,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요새화했다.
    갈리아 인들은 무방비 상태가 된 로마로 진군하여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제외한 모든 것을 불태웠다.
    일곱달 동안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포위한 갈리아인들은 베네티인들이 포강 계곡에 있는 자신들의 영토를 침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들은 속히 귀향하기 위해 1천 파운드의 금을 배상금으로 받고 철수하는 데 합의했다.


    로마는 훼손되고 고갈되었다.
    로마인들이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러 돌아 왔을 때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할 필요가 절실했다.
    그들은 베이이 공격에서 그 성벽이 난공불락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베이이 근처의 석회화로 베이이와 비슷한 성벽을 쌓기로 결정했다.
    이 돌은 과거에 사용한 어떤 석재보다 우수했는데, 로마인들은 기원전 2세기 말까지 그것을 네모 반듯한 블록으로 다듬어 전면이 들쭉날쭉하게 블록을 쌓았다.
    이런 방식으로 건축된 것이 이른바 세르비우스 성벽이다. 이 성벽은 두께가 3.6미터, 높이가 7.2 미터로서 아벤티누스 언덕을 포함하여 총길이 8.8 킬로미터로 도시 전역을 에워쌌다.

    갈리아인들이 로마의 영토에서 철수한 뒤 적대감을 나타내기 시작한 도시들도 있었으나 카밀루스가 이들의 공격에 대응해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전승은 뒤죽박죽된 연대, 내용의 중복, 날조 때문에 매우 불확실하지만 로마가 이 당시에 라티움의 정세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을 거두었을 가능성은 있다.







    내용발췌> 로마사 - 세드릭 A. 요, 프리츠 M. 하이켈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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