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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의 이탈리아 정복 lll - 잿더미 위에서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1. 1. 30. 22:48



    당시 로마에게 적의 침공보다 심각했던 것은 독재에 대한 두려움이었을던 것 같다.
    그리스의 도시국가가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면 비상시국에는 강력한 개인에게 정부를 맡기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인식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는 그렇지 않았다.
    독재 정치 후보자들이 없지 않았으나 그런 유혹이 먹혀들기에는 공화정의 자유에 대한 전통이 워낙 확고했다.
    역량이 뛰어났으나 독재 정치에의 야심을 가진 카밀루스는 탁월한 공적과 두터운 신망에도 불구하고 추방당했으며
    다른 두 명의 최고 군사 및 정치 지도자들은 처형되었다.

    결국 로마는 한 사람의 강력한 지도자 없이도 개혁을 달성한다.

    기원전 367년경에 시작된 정부의 재조직은 행정의 효율성을 높인 동시에 기존의 귀족들과 신흥 평민 가문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했다.
    단순히 대외적 압력이라는 목전의 위기에 대처하려던 기원전 4세기의 정부 재조직 및 두 사회계층의 정치적 평등 달성은
    향후 이탈리아 정복이라는 목적하에 기획된것은 아니었지만 이 효과적인 위기대처의 결과 이탈리아뿐 아니라
    지중해 세계까지 정복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소멸해 가는 도시들의 동맹이었고, 갈리아인들 역시 알리아 강에서 연출했던 영광을 반복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과거 갈리아인들의 도발은 로마인들에게 정부개혁의 필요성을 각성시켜 준 셈이되었다. 결과적으로 에트루리아의 위협을 제거해 주었고,
    무차별한 살상과 철저한 약탈로 인해 많은 이탈리아 공동체들로 하여금 로마의 지도와 보호를 원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갈리아인들은 발작적이고 비효율적인 작전들로 인해서, 이탈리아의 운명이 로마인들과 삼니움인들 사이서 결정되도록
    판을 만들어 놓았다.



    삼니움인들(Samnite)인들과 로마


    Samnite soldiers, from a tomb frieze in Paestum, Lucania, 4th century BC.



    로마인들과 삼니움인들은 갈리아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기원전 354년에 동맹조약에 서명한 듯하지만, 오래 갈 수 없었다.
    삼니움인들은 인구증가와 자원부족으로 주변종족 정복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밖에 없었다.
    기원전 350년 경에는 삼니움이 로마보다 훨씬 강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영토가 로마의 세 배 반이나 넓었고, 인구도 두 배나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기가 끝나기도 전에 로마가 삼니움을 제압하게 된 원인은
    로마가 인력과 자원에서 점차 우월성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로마는 대략 10년 단위로 한 단계씩 세력을 확장해갔다.
    반면 삼니움은 영토의 확장에 비해 전투력이 증대되지 않았다. 토착민들 중 많은 수는 부자가 되었고, 지역 귀족들 사이에서
    지도자의 지위를 얻었다. 

    이들은 무산계급이 벌이는 방대한 정복사업으로 현상황이 바뀌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친로마적 경향이 있었고,
    루카니아의 삼니움 지배계층은 북쪽의

    동족들에게 등을 돌리고 그리스 도시 국가에서 역할을 수행하고 싶어했다. 이따금씩 이들은 자기 부족과 대치하면서까지 로마인들과 동맹을 맺는다.
    삼니움인들은 용맹한 전사들이었고 자기들의 산지를 지키려는 열의가 대단했지만 너무 배타적이어서 인근 종족들과 협력하지 못했기 때문에 
    로마가 삼니움 인근부족들과 동맹을 맺었을 때 곧장 심장부로 진군할 수 있었다.
    삼니움은 네 개의 대 종족들로 구분되었는데, 통일과 결집이 어느 때 보다 필요한 전시에 갈가리 흩어지는 느슨한 연방을 구성했다.
    이 연방은 장기간에 걸친 전쟁정책을 수립할 국가적 성격이 결여되어 있었다. 따라서 로마와의 전쟁에서 거둔 혁혁한 승리도
    항구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로마인들은 삼니움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산악 전투의 비결을 익혔지만 삼니움인들은 로마인의 정치, 외교 방식을 배우지 못했으며
    이 차이가 오랜 세월 전쟁을 치러온 두 종족 사이에 최후 승리와 최종적 패배라는 명암을 갈라 놓았다.


    로마의 동맹 체제

    기원전 338년에 해체된 옛 라틴 동맹은 긴 역사를 지녔다. 이 동맹은 공동의 축일을 합동으로 거행하기 위한 고대 종교 동맹들 가운데
    하나에서 발전했다.

    이 동맹은 스푸리우스 카시우스Spurius Cassius의 주도로 초기 로마 공화국 정부와 서른 개의 라틴 도시들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 의해
    정치적/법률적 지위를 획득했다.

    이 조약은 기원전 358년에 로마의 주도권을 강화하는 몇 가지 조문들이 첨가된 채 재개되었다.
    카시우스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공격과 방어 동맹을 수립한 원래의 조약문에서 로마는 형식상 라티움에 대한 모든 지배권을 포기했다.
    골자는 두 진영의 영원한 평화였다. 다른 지역과의 전쟁 발발시의 의무와 권리를 동등하게 규정했고 라틴인의 권리Latin Rights로 알려진
    시민들의 사적인 권리에 관한 규정들도 있었다.

    로마 시민과 동맹국 시민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는 통혼권, 사업권과 통상권, 이주권이었다.
    초기에는 라틴 시민들 상호간에 이주권이었고 후에는 시민권을 획득할 권리를 가졌다. 라틴인이 로마로 이사하면 제비뽑기에 의해
    배정된 트리부스에 속해 투표권을 가졌다.






    기원전 338년 이후의 라틴인의 권리

    로마인들은 옛 라틴 동맹을 해체할 때 이전의 적대감이나 증오감이 살아나도록 방치하지 않았다.
    적어도 여섯 개의 라틴 도시들 즉 무니키피아Municipia 는 기존의 독립을 상실하자마자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포함하는 완전한 시민권이
    보장되는 로마 국가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이 도시들에서는 여전히 지역 정부가 기능을 수행했다. 동맹이 건설한 식민시들도 동일한 권리를 보장받았다.
    나머지 라틴 도시들과 신뢰를 얻은 몇몇 에트루리아 동맹 도시들은 투표권은 없는 한정된 로마 시민권을 받았지만 징집령에 응해야하는
    의무가 있었다.

    지역 정부를 둘 권한은 허용받았으나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수립하거나 자체 도시들 간의 동맹을 결성할 수 없었다. 저체 도시들간의
    통혼권이나 통상권은 금지되었다.

    이런 행위는 오직 로마만 수행할 수 있었다.
    그들은 외침에서 완전히 보호를 받았고, 모든 경제활동에서 로마 민법의 충분한 혜택을 보장 받았으며 지역 정부의 특권들을 여전히
    누릴 수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이 혜택을 만족스럽게 여겼고, 충실히 협력하여 완전한 시민권에 따른 특권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입증하고 싶어했다.


    이렇게 로마는 자신에게 패배한 라티움 지역의 모든 적국들을 충성과 희망의 끈으로 묶어 두었다.
    이 정책이 현명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라틴 동맹국들은 패배를 겪는 암울한 순간에도 장래의 적들이 내미는 각종 유혹에 굴하지 않고
    충실히 로마 편이 되었다.




    라틴인의 권리가 이탈리아 공동체로 확장됨

    기원전 338년의 조약은 시민권의 역사 전반과, 피정복 공동체들과 중앙 정부 사이의 상호 관계의 역사에 새 획을 그었고
    처음에는 이탈리아, 나중에는 지중해 세계에 대한 정복에 전형이 되었다.
    이 것은 고대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정치적 재능의 발휘였고, 정복의 무기로서 몇 개의 군단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기원전 338년 이전의 피정복 도시들이 완전히 파괴되거나 원한에 사무친 상태로 방치되어 정복자의 통제력이 완화되는 시점에서는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태세가 되어 있었다면 기원전 338년 이후에는 로마라는 중앙 정부 안에서 자치 정부 체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내용발췌> 로마사 - 프리츠 M. 하이켈하임, 세드릭 A.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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