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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로스 전쟁과 남 이탈리아 정복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1. 2. 15. 20:57

    에트루리아는 기원전 282년 이후에도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고, 로마인들은 결국 그들에게 온건한 평화조약을
    제시했다. 또 다른 위기가 닥쳤기 때문이었다.
    중부 이탈리아에서 삼니움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자, 이제 남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그리스 도시 국가
    타렌툼과 로마 사이에 첨예한 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Calabria, Tarentum. Diobol, about 250 bc 11-12mm



    타렌툼인들도 자신들 쪽의 아펜니노 산맥에서 삼니움뿐 아니라 브루티아인들과 루카니아인들과 전쟁을 해서 그들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타렌툼인들은 아드리아 해를 건너 그리스의 여러 군사모험가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그 중 한 사람도 타렌툼을 강대국으로 만들거나 직접 제국을 창출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타렌툼인들은 제2차 삼니움 전쟁 때 양 진영 사이에서 중재하려던 자기들의 시도를 로마가 거절한 일과,
    에3차 삼니움 전쟁이 끝난 뒤 자신들의 아풀리아 접경지대에 로마가 식민시 베누시아를 건설한 일 때문에 이미 심기가 불편했다.
    그 상황에서 타렌툼 만 서쪽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리스 도시 투리이가 루카니아인에게 공격을 받자 타렌툼이 아닌 로마에
    원조를 요청하는 일이 발생했다.
    아마 투리이인들은 로마가 타렌툼보다 신뢰할 만 하고 위험도 덜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지원을 약속한 위 루카니아인들을 패주시키고 투리이에 소규모 수비대를 배치했다.
    레기움, 로크리, 아마도 크로톤까지 로마에 보호를 요청하여 승락을 받았다.
    로마가 그리스령 이탈리아의 내정에 간섭하게 되자 타렌툼은 의혹과 증오에 사로잡혔다. 기원전 282년 10척으로 구성된
    로마의 소규모 함대가 기원전 334년의 조약을 어기고 타렌툼 만으로 항해하자 타렌툼인들은 경고도 하지 않고 공격을
    가하여 전함을 침몰시키고, 로마제독을 죽여버린 후, 투리이로 진격한 뒤 로마 수비대를 몰아내고 그 도시를 약탈했다.
    로마에서 사절이 파견되어 시정과 배상을 요구했으나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고, 말할 기회도 얻지 못했다.
    타렌툼인들이 만약 그리스 전쟁 모험가 피로스Pyrrhus 왕을 부르지 않았다면 로마 사절들의 말을 듣고
    사태를 수습하려는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Pyrrhus of Epirus 272 BC


    피로스는 그리스 북서쪽에 자리잡은 작은 산지국가 에피로스의 왕이었다.
    야심많은 인물이었던 그는 이집트에서 교육을 받고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해 동안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지원금을 받았다. 그는 이탈리아에 오기전에 중무장한 2만명의 중장보병 부대를 고용했고, 인도산 전쟁용 코끼리를 20마리 구입했다.
    그는 이탈리아에 상륙한 직후 헤라클레아에서 로마 군대와 부딪혔다. 놀랍게도 그의 중장보병 밀집대전술은 로마군단을 뚫지 못했다.
    삼니움 군대 방식으로 무장하고 훈련을 받은 로마군단은 여기저기서 흩어진 뒤에 언제든 다시 결집할 수 있었다.
    마라톤 전투이래 처음으로 밀집대전술이 호적수를 만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로스는 코끼리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피로스는 코끼리와 기병대로 로마 군단의 양쪽 옆구리를 공격하는
    편법을 사용했다. 이렇게 포위를 당한 로마 군단은 7천명의 병력을 잃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피로스도 4천명의 병력을 잃었으니 다만 전술상의 승리밖에 거두지 못한 셈이다.
    그는 기원전 283년에 재차 반란을 일으킨 바 있는 오스키인과 삼니움인들에게 지원을 받았다.
    이렇게 남 이탈리아 거의 전역을 장악하게 된 피로스는 로마를 기습 공격하기로 작전을 세우고 강행했다.
    그는 로마 시에서 64km 내에 있던 프라이네스테까지 진격했으나 그 동안 자신을 지원해오던 로마의 다른 동맹국들이
    자신의 깃발아래 모이지 않았다. 그는 공세적인 평화조약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자 또 한번의 전투를 준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아풀리아에 위치한 아스쿨룸에서 로마인들과 대치했다.
    첫날에 로마는 피로스의 팔랑크스(밀집대전술) 부대가 힘들 못 쓰는 울퉁불퉁한 지대에서 전투를 벌였다. 다음 날
    피로스는 후퇴하는 척하면서 평평한 지대로 나갔다. 로마인들이 따라왔다.
    피로스의 코끼리들이 로마인들의 전열 한 가운데를 뚫었다. 굘귝 피로스가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 대가가 너무나 컸다. 4천명의 병력을 잃은 피로스는 "이런 승리를 또 한 번 거둔다면 나는 망한다!"고 외쳤다고 한다.


    로마에 승리를 거두기 위해 너무 큰 대가를 치른 피로스는 이탈리아에 제국을 세우려는 그 이상의 시도를 단념했다.
    그가 생각을 바꾸게 된 데에는 다른 곳에 기회가 열려 있었던 점도 작용했다.




    내용발췌> 로마사 - 프리드리히 M 하이켈하임, 세드릭 A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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