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고대 로마 숙명의 적 - 카르타고 Carthage l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4. 4. 2. 21:56



    페니키아어로는 Kart-Hadasht(새로운 도시).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에서 튀니스 만으로 돌출한 본 곶(Cape Bon)에 자리잡은 도시로서, 그리스인들보다 훨씬 오래전에

    무역업자와 상인으로 유명했던 페키니아인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카르타고의 건국은 로마의 건국과 마찬가지로 전설로 싸여있다.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장편서사시 아이네이스에 카르타고를 건설한 주인공으로 나오는 디도DIdo 공주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디도 - 윌리엄 터너




    그러나 고고학 발굴 결과들은 기원전 750년 경에 건설되었음을 보여준다.

    지형적으로 지중해가 가장 좁아지고 따라서 양쪽 대륙으로 쉽게 접근할 수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아 제해권을 장악하기 이상적인 도시였던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의 중간에 위치한 몰타섬을 점령한 후에는 상업 및 식민지 개척의 걸림돌이던 그리스인들을

    지중해 서쪽 절반에서 몰아낸다.






    포에니 2차 전쟁 무렵의 카르타고 





    수십년간 카르타고의 모도시였던 티로스(디도는 티로스의 공주였음)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에 차례대로 종속되면서 더 이상 페키니아의 식민시들을 통제하거나 보호할 수 없게 되자 카르타고는 자신의 상업적 이익을 보호하고 확대하기 위해 어느 국가도 따라올 수 없는 강한 해군을 창설했다.

    결국에는 페키니아 식민시들과 동쪽에서 벵가지부터 서쪽 지브롤터와 포르투갈에 이르는 사르데니아, 코르시카, 시칠리아의 일부, 발레아레스 제도를 포함한 지역을 세력권으로하는 제국을 건설했다.







    카르타고의 화폐 310-290 BC





    카르타고는 지중해 연안의 풍부한 광물자원을 장악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이전의 수세기 동안 서에서 동을 잇는 해운업은 사실상 카르타고가 독점했다.

    이에 힘입은 카르타고 상인들은 그 지역 내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생산한 상품을 독점판매할 수 있었다.

    카르타고의 제품들 중에서 자유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었던 품목은 직물, 그 중에서도 자주색 염색 가공 직물뿐이었다.

    카르타고 산 직물은 지중해 전역에서 호평을 받았다.








    카르타고인들이 과학적 영농, 노예를 이용하는 집단 농장의 발달에 이바지한 점은 대개 간과된다.

    로마인들에게 대규모 노예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판매용 단일 곡물이나 단일 산물을 재배하는 기법을 전수한 것이 카르타고였다.




    카르타고의 정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묘사한대로 과두 공화정으로서,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년 선출되는 두명의 수페스(shophetim, 집정관)로 구성된 행정부와 3백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원로원, 민회, 104명의 법관으로 구성된 최고법원이 그것이다.

    민회는 실권을 가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정부는 부유한 사업가들, 상인들, 지주들로 구성된 소수의 강력한 과두정으로 구성되었다.

    두 명의 집정관과 모든 장군들이 민회에서 선출되었지만 모두 부자들이었고, 배타적인 과두체제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정부의 실권은 최고법원과 민회에 의해 원로원의 한 위원회로 기능하도록 선출된 30인 위원회 두 기관의 수중에 있었다.

    최고 법원의 구성원들은 원로원의원들이기도 했지만, 30인 위원회와 달리 민회에 의해 선출되지 않고 다섯명의 행정부 수장들(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을 5두 정부라고 부름)로 구성된 내각에 의해 선출되었다. 최고법원은 원래는 독재를 견제하기 위해 구성되었지만 점차 국가에서 가장 두려운 기관중의 하나이자 5두정부와 결탁하여 가장 탐욕스럽고 부패한 기관이 되었다.








    제 1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년)


    시칠리아에서 지중해 서부의 강력한 두 공화국인 로마와 카르타고가 양국의 국민 모두 원치않는 기나긴 전쟁을 시작했다

    로마인들은 장화같은 이탈리아의 발끝까지 세력을 확대하고 나자 불현듯 자기들이 해협 건너 시칠리아에 자리잡고 있는 카르타고라는 강대국과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피로스와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시칠리아를 장악하고 있는 세력이 언제든지 이탈리아를 침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터득한 바 있다.

    그러므로 많은 로마인들이 카르타고가 더 이상 시칠리아에서 세력을 강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가능하게 한 또 다른 원인은 야심찬 귀족들 사이에 퍼져있던 군사적 업적에 대한 욕구였다.

    다수의 로마 시민들이 승전의 기회를 열망하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의 논리에 설득 당한 것이 전쟁 발발의 네번째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카르타고로서는 그들이 바란바는 아니었지만 전쟁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로마인들이 침략자로 보였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로마는 시칠리아와 아무 연고도 없었던 반면 카르타고는 오래전부터 그 곳의 주요세력들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Lucius Cartilius Poplicola의 무덤에서 발견된 포에니전쟁을 묘사한 부조





    전쟁은 카르타고 인들이 불리했다. 그들의 전함은 피로스 전쟁 이후 대부분 부두에 정박해 있었기 때문에 배를 정비하고 수병을 모집, 훈련하려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해도 확고한 의지만 있었다면 쉽게 막을 수 있는 상황에서 수수방관한 것이 시라쿠사이의 히에로 2세를 격노케 하여 카르타고와의 동맹을 파기하게 만들었다.


    로마인들이 기원전 263년에 4천명의 육군병력으로 시라쿠사이를 공격했을 때 항복한 히에로는 15년 기간의 동맹을 체결하고, 로마의 대 카르타고 전쟁에 재정지원을 약속한다.

    다시 기원전 262년, 로마는 히에로의 지원을 받아 아그리겐툼을 포위 공격, 함락시켜 주민들은 노예가 되었다.

    아그리겐툼이 함락되자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인들을 아예 시칠리아에서 몰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보게 되었는데 장애물이라면 이제 완전히 가동 준비를 갖춘 카르타고의 함대였다.

    로마는 어떤 비용을 들여서라도 해군을 창설하던지 전쟁을 포기하든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출처> 로마사 - 세드릭 요/프리츠 하이켈하임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