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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나긴 해전 - 카르타고와 로마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5. 1. 5. 04:19








    Trireme



    기원전 311년 20척의 트리레미스Trireme를 건조한 것이 해군을 창설하려는 로마인들의 최초 시도였다.

    이마저도 유명무실하게 되어 기원전 264년 로마는 해군을 전혀 보유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이탈리아의 동맹국들에게 의존했지만 그 나라들도 삼단 노 선박 이상의 수준은 되지 못했다.

    헬레니즘 세계의 해군들은 이미 오래전에 큰 바다에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무거운선박을 도입하고 있었다.

    카르타고 해군이 자부하던 것은 퀸퀘레미스 quinquereme 였다.









    Quinquereme





    이 배는 50-60개의 노가 장착된 한 개의 층으로 된 배로서, 노 하나에 다섯 명quinque의 수병이 배치되는 전함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트리레미스에 비해 무겁고 느렸지만 항해에 적합했고,  함포가 없었던 고대의 해전은 주로 충돌이나 적함으로 옮겨타 공격하기로 이루어졌으므로 중량이 필수적이었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264년 아피우스가 시칠리아로 건너가면서 퀸퀘레미스를 한 척 나포하기 전까지는 이같은 선박을 한 척도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 배를 모델로 삼고 그리스 동맹국의 조선 기사들의 도움을 받은 그들은 약 두 달 동안 백 척의 퀸퀘레미스와 스무 척의 트리레미스를 건조해냈다.

    수병이 모두 노젓는 일에 숙달되어야하는 트리레미스에 비해 다섯명이 하나의 노를 젓는 퀸퀘레미스는 한 두 사람만 숙달되면 나머지는 그들을 따라하기만 하면 되었고, 로마인들은 선원보다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해전을 육지전투화하기 위해 퀸퀘레미스의 시스템 및 크기는 로마인에게 매우 적합했다.


    기원전 260년 로마 총독 두일리우스Duilius는 이 새로운 함대를 이끌고 메사나에서 멀지 않은 바다에서 카르타고 해군과 대치했다.












    카르타고 제독은 쉬운 승리를 예측하고 정면충돌 공격을 감행했으나, 정예 전함들에 로마인들의 코르부스(상대방의 배로 옮겨 탈 수 있도록 끝이 쇠갈고리로 만들어진이동식 다리로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발명)가 가서 박히고, 로마 수병들이 쏟아져 들어와 전함을 탈취했다.




    이후 양국간의 엎치락 뒤치락하는 긴 해전에서 한동안 시칠리아에서 해군기지들만 보유하는 것에 만족하는 듯하던 카르타고는

    아프리카에서 제국을 확장하는 데 주력하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원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249년 그들은 다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255~253년의 돌풍에 의한 함대 손실, 좌초 등의 참사를 겪은 뒤

    해군을 재건했지만 바다에서의 우월한 지위는 이미 상실했다.  위력적이던 코르부스는 더이상 유용하지 않았고, 제독들의 역량도 부족했던 것이다.

    카르타고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특히 247년 시칠리아에 젊은 하밀카르 바르카Hamilcar Barca를 파견한 뒤부터는 더욱 그랬다






    Hamilcar Barca (d. 229/8 B.C.)





    탁월한 장군이었던 그는 로마 전열 배후를 전광석화처럼 이동하고 해안을 과감하게 공격함으로써 로마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바르카의 탁월한 전술과 카르타고 해군의 혁혁한 전과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는 전쟁에서 패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주로 로마가 패배했을 때 적시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지 못한데 있었다.


    로마의 궁극적 승리는 흔히 주장되는 끈기와 인내, 도덕적 자질 때문만이 아니라

    카르타고의 유약함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게 유약하게 된 것은 상인 부호들과 강력한 토지 귀족들 간의 내분과 기득권 투쟁 때문이었다.







    Hanno the Great




    해군과 바르카의 지휘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있을 때 이른바 대 한노 Hanno the Great가 이끄는 지주 그룹이 카르타고 정부를 장악했다.

    그들에게는 아프리카의 광활한 옥토를 정복하는 것이 시칠리아, 해군, 그리고 로마와의 전쟁보다 중요했다.











    한편 로마는 자신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해군력 복원에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시민들에게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 대가를 주겠다고 약속함으로써 해군복원사업에 투자하도록 설득했다. 기원전 242년 200척의 최신 전함들로 구성된 로마함대가 시칠리아 근해에 나타났다.

    카르타고 함대는 수병들도 제대로 훈련되지 않고 정비도 변변치 않은 상태에서 곡물과 물품을 잔뜩 싣고 있었다. 결과는 카르타고에

    전쟁의 대가를 지불하게 만든 참사였다. 평화를 청하는 길밖에 없었다.












    로마 평화조약 (기원전 241)


    카르타고 정부는 하밀카르 바르카에게 로마와의 평화 조약을 체결하도록 전권을 주었다.

    양측 모두 오랫동안 계속된 치열한 전쟁 덕에 지쳐있었다.

    큰 전쟁의 경우가 다 그렇듯이 승자와 패자 모두가 영향을 받았고 중대한 변화를 겪었다.

    무엇보다도 인력과 재산 양면에서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

    비록 부풀려졌을 수는 있겠지만 로마와 카르타고는 각각 수백척의 전함과 수만명의 인명을 잃었다.

    카르타고 해군력이 분쇄되었고, 지중해 서부에 대한 통제권이 영원히 종식되었다.

    반면에 로마는 광범위한 지중해 세계의 문제에 반드시 개입하는 주요 해군 및 해상 국가가 되었다.






    출처> 로마사 - 세드릭 요/프리츠 하이켈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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