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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 로마 숙명의 적 - 카르타고 Carthage II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5. 2. 7. 23:19



    제 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201)




    제 2 차 포에니 전쟁 전의 로마와 카르타고 점령지






    제 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와 카르타고 어느쪽에서도 적극적으로 도발하지 않았다.

    기원전 238년부터 219년 까지 카르타고와 로마인들은 제1차 포에니 전쟁을 끝내면서 하스드루발이 체결한 조약과 이베르 조약을 충실하게 지켰다.

    그러나 여러가지 요인들이 양국으로 하여금 서로 두려워하고 오해하게 만들어 서로를 궁지에 몰아넣고, 관계가 파국에 직면했을 때

    상호간에 전쟁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사군툼(Saguntum)












    사군툼은 경쟁도시인 마르실리아의 사주를 받아 한니발이 이베르 강에 이르는 모든 영토를 장악하려 한다는 불평을 로마 원로원에 끊임없이 제기했다.

    원로원은 실태를 파악할 사절들을 파견했고, 한니발에게 사군툼과 로마간의 신의(fides)관계 및 이베르 조약을 상기시켰다.

    불필요한 간섭, 혹은 과거 로마인들이 용병 반란을 이용했던 것처럼 카르타고를 적대시하기 위해 사군툼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한

    한니발은 즉시 자신의 정세 분석 보고서를 카르타고 원로원에 보내며 조언을 요청했고, 결국 기원전 219년 초 사군툼을 포위한다.







    이베리아 전사





    한니발이 사군툼을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로마 원로원은 당장 행동을 취할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218년 사군툼이 함락되자 로마의 위신은 크게 추락하고 시민들은 적개심에 불탔다.

    원로원은 카르타고에 사절단을 보내 전쟁을 원치 않는다면 한니발을 로마로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카르타고 원로의원 다수는 자신들이 지원한 지휘관을 내주는 치욕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카르타고는 전쟁을 택했다.



    많은 로마인들이 전쟁을 원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인과 갈리아 남부 켈트 종족이 힘을 합쳐 로마를 공격할 우려가 있었고

    해외무역에 종사하는 그룹의 규모가 커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카르타고가 히스파니아에서의 확장에 힘입어 옛 세력을 되찾자

    무역업자와 해운업자들은 그들이 더 강해지기 전에 카르타고를 한번 더 약화시키기를 원했다.

    그리고 귀족들 중에는 항상 성공적인 군지휘를 통해 명성을 얻으려는 야심가들이 있는 법이다. 


    양 진영은 두번째로 전쟁의 도전을 받아들인다.











    한니발의 정예부대는 충직하고, 훈련이 잘 되어있고, 최고급 히스파니아제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부대를 지원해줄 해군이 없었다.

    로마인들은 월등한 해군력에 힘입어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고, 아프리카와 히스파니아를 동시에 공격할 수 있었다.




    한니발이 인력과 물자를 충당할 유일한 원천은 히스파니아였고, 그에게는 믿을만한 부대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가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단일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었고, 전선은 이탈리아에 형성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로마가 위기에 처해있는 한 로마인들은 대병력을 이탈리아에 결집시키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이탈리아를 침공해야만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니발이 이탈리아 침공을 결심한 더 강력한 이유는 그가 잠재적으로 카르타고의 여서일곱 배나 되는 로마의 군사력을 뿌리부터 절단하고 싶어한 데 있었다.

    로마의 동맹체제와 이탈리아 연방을 분쇄해야만 막대한 전쟁 잠재력을 무력화하고 파쇄할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갈리아인들이 이미 로마와 전쟁중이었으므로 틀림없이 자신 쪽으로 규합하리라고 생각했고, 중부와 남부 이탈리아의 동맹국들도 동맹을 탈퇴하고 자신에게 합류할 것으로 기대했다.


    로마는 전쟁을 공세적으로 치룰 계획이었다.

    막강한 해군력으로 무대를 임의로 정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콘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부대는 히스파니아 침공을 위해 실제 마실리아에 상륙했다.

    또 다른 부대는 아프리카 침공을 위해 시칠리아에 집결했다. 그러나 마실리아에 너무 늦게 상륙하는 바람에 이미 그곳을 지나 알프스 산맥을 향해 진군중인 한니발을

    저지할 수 없었다.








    기원전 218년 5월 한니발은 보병 4만, 기병 6천, 60여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출발했다.

    이베르 강을 건너 피레네 산맥을 넘었고, 8월 중순 론 강에 도착하여 스키피오에게 저지를 받기 전에 그 강을 건넜다.

    한니발의 이동 경로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가 알프스 산맥에 들어갈 때 취했을 법한 유력한 이동 경로를 예측해 봐도 어느 경우든 쉽지 않은 경로였다.

    험준한 괘, 발목까지 빠지는 눈, 추위, 무엇보다도 산지 종족들의 뜻하지 않은 공격으로 인해 그는 병력과 물자에 큰 손실을 입는다.

    우여곡절 끝에 북 이탈리아의 평지에 도착했을 때 그의 병력은 보벼 2만 6천, 기병 4천, 코끼리 30 마리로 위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와 전쟁중이던 인수브레스Insubres인, 보이이Boii인이 합류하여 손실된 병력을 벌충해 주었다.









    The Insubres






    티키누스 전투는 한니발의 누미디아 기병이 스키피오의 기병을 포위하여 물리친 기병들의 소규모 접번이다.

    스키피오 자신도 부상을 입었고, 아버지와 동명인 17살의 아들 스키피오(훗날 아프리카누스 Africanus)에게 구출되지 않았다면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이 사소한 패배가 로마인들에게 원래 아프리카를 침공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군대를 북 이탈리아로 이동하게 할 만큼 심각한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단일 전선을 형성하고자 했던 한니발의 시도가 이미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초록색 선:    한니발 군대의 이동경로

    검표시:    중요전투지역





    한니발에게 포강 계곡 전 지역을 한나발의 수중에 넘겨주면서 북이탈리아를 상실한 트레비아 전투(기원전 218)








    트라시메네 호수 전투(기원전 217)


    중부 이탈리아 에트루리아로 이동하던 한니발은 로마인들의 예상과는 다른 경로를 택했고, 로마로 진군하는 듯이 보이도록 해놓고는 갑자기 동쪽으로 기수를 틀어

    페루지아의 트라시메네 호수의 북쪽 연안을 지나간다.

    한니발은 병력을 산 위에 잠복시켜 놓았다가 플라미니우스가 행군해오자 공격하여 3만 6천명을 대부분 죽이거나 생포했고, 얼마 후 세르비니우스가 보낸 4천의 기병대도 몰살시켰다.








    트라시메네 패전 소식을 들은 로마인들은 로마가 함락되는 것은 아닌가 두려움에 휩싸였으나

    한니발은 충분한 장비와 물자의 보급없이 요새화된 대도시를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이 탁월한 전술가는 이탈리아를 침공할 때 로마 동맹 체제에서 균열을 찾아낵 그 균열을 이용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전투에 승리하는 것은 오로지 이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출처> 로마사 - 세드릭 요/프리츠 하이켈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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