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로마 국가제도의 실체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0. 7. 27. 11:48



    로마 공화정의 국제는 이론적 원칙을 가지고 단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수세기를 지나며 관습과 선례와 구체적인 법률이 조화를 이루며 발전했다.
    많은 학자들은 기원전 287년 호르텐시우스 법이 통과된 시점을 로마에 참된 민주적 정체가 출현한 시점으로 보고 있다.
    기원전 2세기 그리스 사가 폴리비오스같은 다른 학자들은 그 법을 가리켜 혼합된 정체,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훌륭한 정체가 고루 섞인
    혼합정체라고 불렀다(정무관에 의해 대표되는 군주정, 원로원에 의해 대표되는 귀족정, 호민관들과 민회에 의해 대표되는 민주정).
    이 이론에 따르면  각 계층은 서로 균형을 유지했고, 그로써 어느 한 계층이 나머지 두 계층을 누르고 더 강해질 수 없었던 셈이 된다.

    두 견해 모두 옳지 않다.
    공화정은 강력한 과두정(oligarchy)에 의해 지배되었다.


    로마 사회는 디그니타스와 아욱토리타스 같은 단어들을 중시한데서 드러나듯 지위와 신망을 지나치게 의식했다.
    현대와 같은 평등사상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원로원의 업무는 엄격한 서열의 원칙에 따라 집해되었다.
    인구(재산) 조사 때마다 켄소르들은 신망있는 전임 콘술들 가운데 한사람을 프린켑스 세나투스(Princeps Senatus), 즉 원로원의 제일인자로 임명했다.
    이 사람이 제읾 먼저 토론회에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프린켑스 세나투스
    Caesar Publius Licinius Valerianus Augustus



    그 뒤에 엄격한 서열 순서에 따라 켄소르 당선자들과 켄소르, 전임 켄소르, 콘술 당선자, 콘술들과 전임 콘술, 프라이토르 당선자들과 프라이토르,
    전임 프라이토르 순으로
    정견을 발표했다.
    토론이 이렇게 진행되면 원로원의 회원들은 방의 이 편이나 저 편으로 자리를 옮기는 방식으로 투표했다.
    서열이 낮은 사람들은 정견을 발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발pedes로 자리를 옮겨 의견을 표시하는 것 뿐이었기 때문에 페라디이peradii라고 불렸다.

    이런 체제 하에서 원로원이 토론은 콘술들의 선에서 결론의 윤곽이 잡히고, 앞의 발언자들이 제시한 노선을 따라 결론이 내려지곤 한 게 분명하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서열이 낮은 사람들은 대부분 전임 콘술들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정무관 직에 선출되었고, 더 높은 정무관 직에 오르기 위해
    그들의 지속적 후원을 기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콘술 후원자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특정 쟁점에 대해 그들의 견해에 동조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같은 이유로 정무관들은 짧은 임기 동안 귀족이 지배하는 원로원으로 부터 사실상 독립하지 못했다.
    그들은 원로원을 구성하고 있던 전임 정무관들의 집단적 지혜에 의존했을 뿐 아니라, 정무관들 자신이 아직 원로원 의원이 되지 못했을 경우
    원로원에 들어가기를 원했고
    이미 원로원에 들어간 사람들은 서열이 오르기를 가대했다.
    콘술들조차 군사령관 자리를 얻기 위해 원로원에 의존했다. 따라서 사실상 과두정을 형성하고 있던 원로원 내의
    실세 콘술들의 의사에 따르지 않으면 안되는 압박이 있었다.

    시민들의 보호자로 출발한 호민관조차 사실상 이 과두세력에 의해 선출이좌우되었다.
    다양한 민회들은 원로원의 토지 귀족들과 콘술 귀족들의 이익에 의해 좌우되었다.
    쿠리아 회는 공화정 시대 내내 형식적인 잔재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굳이 영향력을 행사할 필요가 없었으나
    켄투리아 회, 트리부스 회, 평민회는 달랐다.
    이 민회들은 정무관을 선출하고 법안을 통과시키는 배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중요한 법률적 기능들도 가지고 있었다.
    단위 투표제 때문에 켄투리아 회의 193개 켄투리아는 인구(재산)조사에서 가장 부유한 계층 사람들로 구성된 98개의 켄투리아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들의 시각은 부유한 원로원 의원들과 정무관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아마 기원전 241년 이후에 다수결에 도달하기 위해
    두번째 재산 계층의 투표를 필요로 했던
    어지간한 개혁 가지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위 투표제는 트리부스 회와 평민회에 속한 보통 시민들의 투표권도 억압했다. 이 두 민회에서는 투표가 트리부스 단위로 치러졌다.
    기원전 241년 이후 모든 로마 시민들이 등록한 트리부스의 수는 네 개의 도시 트리부스와 서른 한개의 농촌 트리부스로 고정되었다.
    따라서 토지가 없는 도시 거주자들은 투표권이 모두 합해 4 개 밖에 없기 때문에 서른 한 개의 투표권을 가진 농촌 트리부스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 투표는 모두 로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농촌 트리부스에 속한 소규모 토지 소유자들은 로마에 투표하러 갈 여유가 있는
    부유한 귀족 지주들에 비교할 때 크게 불리했다. 많은 농촌 트리부스들의 표는 소수 귀족들에 의해 좌우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켄투리아 회,
    원로원, 정무관직을 장악한 그 사람들이었다.



    신분 투쟁은 2백년 간 강도를 달리하며 지속되었다.
    그 기간에 공화정은 250년 이상 그 정체의 보증 마크가 될 법과 제도와 관행을 발전시켰다.








    내용발췌> 로마사 - 세드릭 A. 요, 프리츠 M. 하이켈하임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