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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지오네 Giorgione이.탈.리.아 문화/미 술 belle arti 2020. 11. 29. 21:25
본명 조르지오 바바렐리(Giorgio Barbarelii), 1478 ∼ 1510, 베네치아 화파 16세기 베네치아 르네상스 양식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조르지오네는 생애에 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어, 바사리Vasari의 《Le Vite 생애》에 실려있는 소문같은 이야기만 남아 있다. 바사리에 따르면 그는 온화한 성격의 미남으로, 화가이자 탁월한 류트 연주자이며 가수였다고 하는데, 공문서에 남아있는 기록을 추적해 보면 그는 1477-1478 년에 태어난 Veneto 주 Castelfranco 출신이다. 베네치아 방언 "Zorzo"또는 "Zorzi" 로 언급되던 Giorgio da Castelfranco (카스텔프랑코 출신 조르지오)는 사망 한 지 몇 년 후부터 조르지오네 Giorgione로 불리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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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 후반기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0. 11. 27. 12:52
1506년, 프랑스 왕이 파견한 통치자 샤를 당부아즈가 피렌체 의회로부터 허락을 얻어 레오나르도를 밀라노로 초청했으나, 한정되었던 체류기간은 양국 간의 정치적 긴장 때문에 영구적인 것이 되었다. 그로 인해 대작 〈앙기아리 전투〉는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샤를 당부아즈의 관대한 후원을 받으며 지낸 두 번째 밀라노 체류는 6년이나 계속되었다. 이 시기 다 빈치에게 부과된 임무는 주로 건축에 대한 조언이었고, 그 때문인지 미술작품이 많지 않다. 그는 〈암굴의 성모〉 두 번째 버전과,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의 기마상〉 구상 소묘 등을 그렸으며, 피렌체에서 가져온 〈성모자와 성 안나〉와 〈레다〉 작업을 계속했다. 레오나르도는 이 시기에 해부학과 식물학, 광학, 공학, 지질학, 물리학 등을 더욱 심도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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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 바르톨로메오 Fra Bartolomeo이.탈.리.아 문화/미 술 belle arti 2020. 11. 26. 11:44
1472~1517, Savignano di Prato, Tuscany 1483 년 혹은 1484 년부터 Cosimo Rosselli의 견습생 생활을 시작했고, 1490 년 후반에는 당시의 미술을 공허하고 부패한 것이라고 비난하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설교에 마음이 이끌려 1500년 도미니크 교단의 수도사가 된다. 프라 바르톨로메오는 전성기의 페루지노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에게 영향을 받아 고요한 조화와 사려 깊은 무게감이 있는 자신만의 스타일1을 완성했다. 1507년 피렌체를 방문한 라파엘로가 프라 바르톨로메오와 친구가 되어, 그에게 원근법 및 휘장의 채색 및 처리 기술을 알려 주었다고 하는데, 이후에 제작된 작품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1 Storia dell'arte / Francesco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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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 피렌체 2기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0. 11. 24. 11:37
1499년,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밀라노에 입성하고 루도비코 일 모로가 몰락하자 다 빈치는 밀라노를 떠나 잠시 만토바에 머물면서 이사벨라 데스테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해 3월에는 베네치아 의회로부터 터키의 침공에 대한 자문을 의뢰받고 위협을 받는 지역에 물이 범람하게 하라고 조언했다. 1500년, 18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피렌체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그해에 그는 산프란체스코 알몬테 교회의 기반과 골조의 손상을 조사하는 위원회의 건축 전문위원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산타 아눈치아타 수도원에서 세르비테 수도회의 손님으로 머물면서 〈성모자와 성 안나 Virgin and Child with St. Anne〉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 이듬해(1502) 여름 그가 피렌체를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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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 밀라노 시기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0. 11. 22. 13:33
1482년, 레오나르도는 밀라노 대공의 후원을 받게 되어 피렌체를 떠났는데, 30세의 예술가가 그리다 만 와 팔라쪼 시뇨리아의 산 베르나르 교회 제단화 의뢰를 버려둔 채 밀라노로 떠나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경험 지향적 사고 방식에는 당시 피렌체 상류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신 플라톤주의보다는 밀라노의 엄격한 학문적 분위기가 맞았을 수도 있고, 동성애자라는 익명의 고발 때문에 여러 가지 기회에서 제외되었던 것이 이유가 될 수도 있고, 루도비코 스포르자 백작의 화려한 궁정과 그를 기다리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매료되었을 수도 있다. 그는 1499년 루도비코가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17년간을 밀라노에서 보냈다. 왕실 명부에 pictor et ingeniarius ducalis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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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도제생활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0. 11. 19. 08:38
Leonardo da Vinci, 1452~1519 이제 이 인물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토스카나 지방 빈치 Vinci 마을의 레오나르도, 화가,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과학자, 음악가, 공학자, 문학가, 해부학자, 지질학자, 천문학자, 식물학자, 역사가, 지리학자, 도시계획가, 집필가, 기술자, 요리사, 수학자, 의사 어떤 항목에서도 평균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그의 명성은 '역사라는 필터를 통해 충분히 검증되고 걸러진' 것이며 1, 심지어는 키도 훤칠하고 용모도 빼어났고, 목소리조차 좋았다고 한다.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밤 3시경, 피렌체 공화국 토스카나의 '빈치(Vinci)' 마을에서 공증인이자 지주였던 아버지 안토니오 피에로와 농민인 어머니 카타리나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였던 레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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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론 Theismus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11. 18. 09:59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깊은 본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강력한 종교심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그것은 이름 붙이기 나름이지만 유신론 혹은 이신론 Deismus이다. 감정을 위해 다른 대체물을 구하거나 찾아내지 않고서 기독교를 벗어버린 사고방식이 이신론을 주도하였다. 유신론은 신적 존재를 향한 더욱 높은 긍정적 신앙심이다. 중세는 이런 신앙심을 알지 못했다. 이것은 기독교를 배제하지 않으며 언제라도 죄, 구원, 불멸성 등 기독교의 가르침과 결합될 수 있지만. 그러나 또한 그것 없이도 사람들 마음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경건성은 때때로 유치한 단순성을 가지고, 절반은 이교적인 울림을 가지고 등장한다. 신은 여기서 모든 소원을 이루어지는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다. 알베르티는 결혼식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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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II 세와 미켈란젤로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11. 16. 15:12
1505년 3월,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II 세에 의해 로마에 초청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생애의 영웅적인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 교황과 예술가는 두 사람이 모두 장대하고 격렬한 기질이었으므로 서로 충돌할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의기충천하는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항상 거대한 계획이 용솟음쳤다. 율리우스 2세는 고대에 필적하는 자신의 분묘 작업을 미켈란젤로에게 맡기려고 생각했고, 이 착상에 열광한 미켈란젤로는 40개 이상의 조각상을 포함하는 거대한 건조물을 계획하였다. 감격한 교황은 필요한 대리석을 확보하기 위해 미켈란젤로를 카라라로 파견하였다. 미켈란젤로는 8개월 이상을 이 산중에서 보냈다. 격렬한 흥분 속에서 어느 날, '말을 타고 이 지역을 돌아보는 가운데 해안 쪽에 우뚝 솟은 산봉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