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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지오네 Giorgione이.탈.리.아 문화/미 술 belle arti 2020. 11. 29. 21:25
본명 조르지오 바바렐리(Giorgio Barbarelii), 1478 ∼ 1510, 베네치아 화파
16세기 베네치아 르네상스 양식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조르지오네는 생애에 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어, 바사리Vasari의 《Le Vite 생애》에 실려있는 소문같은 이야기만 남아 있다. 바사리에 따르면 그는 온화한 성격의 미남으로, 화가이자 탁월한 류트 연주자이며 가수였다고 하는데, 공문서에 남아있는 기록을 추적해 보면 그는 1477-1478 년에 태어난 Veneto 주 Castelfranco 출신이다.
베네치아 방언 "Zorzo"또는 "Zorzi" 로 언급되던 Giorgio da Castelfranco (카스텔프랑코 출신 조르지오)는 사망 한 지 몇 년 후부터 조르지오네 Giorgione로 불리게 되었다.
Zorzo, 혹은 조르지오네라는 별명은 마사치오처럼 그의 신체적 조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키가 큰 조르지오, 몸집이 큰 조르지오라는 의미이다.
불행하게도 조르지오네의 유소년기나 교육에 관한 정보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어쨌든 그는 매우 어린 나이에 베니스에 도착하여 Giovanni Bellini의 작업장에서 거주하며 색채와 풍경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48년 Carlo Ridolfi 는 조르지오네가 수습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현지 예술가들과 프레스코 화 기술을 익혔으며, 이 전문 지식을 활용하여 궁전의 외관과 내부 장식에 전념했다고 기록했지만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모두 소실되었다.
일생 동안 예술가로서 인기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회화 역사상 가장 수수께끼의 인물로 남게 된 조르지오네는 직접 서명한 작품이 한 작품( Laura, 1506) 밖에 없었기 때문에, 작품 목록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도상학적 의미까지 지금까지도 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쟁의 대상이되고있다.
등장과 함께 눈부신 활약을 보인 베네치아 화단에서의 10년가량의 활동만으로 그는 예술사적으로도 중요한 작가가 되었다. 가능한 한 작품 숫자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그의 죽음에 따른 과장을 줄인다고 해도, 그의 활동은 베네치아 회화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어 회화의 "현대적 기법"으로의 전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조르조네의 그림에 나타나는 기법과 색채, 분위기는 확실히 벨리니의 후기 양식과 비슷하다 1
조르조네는 그림의 배경을 중시했으며, 특히 배경 풍경을 그리는 데 뛰어났다. 그는 종교화를 그리거나 신화, 고전을 다룰 때도 풍경을 주체적으로 담았다.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으로 여겨졌으나 오늘날 조르조네의 초기작으로 인정되는 〈모세의 불의 심판〉, 〈솔로몬의 심판〉 등에서도 이야기 소재에 비해 풍경이 독립적이고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차분하고 감미롭게 묘사되어 있다. 〈성모자〉, 〈양치기들의 경배〉 같은 작품에서도 색채의 완벽한 조화와 몽환적인 배경 묘사가 뛰어나다. 2
조르조네는 따뜻한 빛으로 전체 화면을 감싸고,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해 부드럽게 표현했으며, 그림 속 요소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시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스푸마토 기법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앞서 사용한 기법이고, 후일 티치아노 기법의 특징이었는데, 조르조네가 다 빈치의 스푸마토 기법을 직접 접했다거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또한 조르조네는 풍경만을 다루기도 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풍경을 배경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다루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폭풍우〉를 비롯해 〈잠자는 비너스〉 같은 작품들은 목가적인 전원 풍경을 주체적으로 다루며 풍경화라는 새로운 장르의 개척에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풍경화는 17세기 이후 회화의 한 장르를 차지했다.2
밤과 폭풍우 같은 자연현상과 이에서 비롯된 정취를 묘사하는 데 특히 뛰어났던 조르조네의 대표작은 〈폭풍우〉이다. 풍경을 독자적인 주제로 다룬 혁신적인 그림으로 르네상스 풍경화의 이정표가 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506년경 베네치아의 귀족 가브리엘레 벤드라민의 주문으로 제작되었다. 폭풍우 치는 언덕과 도시,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여인, 병사 등 연관성 없는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주제와 의도가 무엇인지 해석이 분분한 작품이다.
애초에 등장하는 소재들이 특정 주제 아래 상징적 알레고리로 작용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주제 없이 자유롭게 그린 그림인지조차 알 수 없다. 번개를 제우스의 상징으로 보아 신화적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아기를 모세로 보고 구약성서에서 이집트를 떠나 피신하는 중 휴식을 취하는 모세를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군인을 아담, 여인을 이브로 보고, 젖을 먹는 아기는 죄를 짓지 않은 상태의 카인으로 보기도 한다. 전경에 숨어 있는 뱀은 이브를 꼬여 낸 뱀으로, 배경의 번개 치는 언덕과 마을은 이들이 추방된 낙원으로 여긴다. 또한 베네치아에서 당시 유행하던 포에지로 보기도 한다. 2
1520~43년 베네치아의 귀족 마르칸토니오 미키엘이 쓴 베네치아의 미술 컬렉션에 대한 기록에 조르조네의 그림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 기록은 조르조네가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성되었기 때문에 대체로 믿을 만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3명의 철학자〉(1510경)는 미키엘이 특별히 조르조네의 것으로 단정한 작품으로서 미키엘은 조르조네가 죽은 뒤 베네치아의 화가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가 그것을 완성했다고 진술했다. 이 그림의 구도와 색채는 완전히 조르조네의 화풍으로서 세바스티아노는 다만 약간의 끝마무리를 했을 뿐인 것 같다. 게다가 청년·장년·노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세 남자의 꿈꾸는 듯한 우울한 분위기는 조르조네의 전형적인 성향을 나타낸다. 1
〈잠자는 비너스〉(1510경)는 조르조네가 죽을 때 미완성으로 남았다. 미키엘은 이 풍경화의 배경을 티치아노가 덧붙였다고 전하고 있다. 오른쪽 원경에 건물들이 있는 풍경은 티치아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되풀이되고 있으므로 그림 자체가 그 사실을 입증해준다.
〈잠자는 비너스〉를 시작으로 베네치아의 미술에서는 사랑의 여신을 주제로 한 일련의 그림들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특히 티치아노의 그림들이 유명하다. 그러나 장엄하고 이상적인 이 그림만큼 한적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완전하게 표현한 작품도 없다. 〈유딧 Judith〉(1505경)은 자료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와 똑같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녀는 자기 민족의 복수자라기보다 일종의 여신으로 표현되어 있다. 1
1510년 가을, 조르조네는 흑사병으로 서른셋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작품 활동 기간은 10여 년에 불과했지만, 베네치아 회화에 이룩한 혁신은 컸다. 동시대의 화가인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와 티치아노는 그가 이룩한 혁신을 계승했으며, 그의 미완성 작품들을 완성했다. 이들의 지나친 열광으로 조르조네와 세바스티아노, 티치아노의 초기 작품 사이에 경계가 분명치 않아 조르조네는 후대에 이르러 그 존재 자체를 의심받기도 했다. 19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도 있다. 그의 이름은 어느 작품에도 나타나 있지 않으며, 무엇이 그의 작품인지조차 분명치 않다. 조르조네는 예술에 있어 불을 인간에게 전해 준 프로메테우스와 같다.”2
수백년 동안 조르지오네의 작품으로 알려졌던 <전원에서의 합주>는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티치아노의 작품이라는 설이 대두되었는데, 두 예술가 중 누구의 작품이라는 것을 증명할만한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Christiane Joost Gaugier는 조르지오네가 그림을 시작했으나 완성하기 전에 사망하여, 제자인 티치아노가 완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 [Daum백과] 조르조네 – 다음백과
2 [Daum백과] 조르조네 –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김영은, 청아출판사이미지 출처> 야후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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