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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토와 트레첸또(1300년대)이.탈.리.아 문화/미 술 belle arti 2020. 3. 1. 12:15
지오토는 이탈리아에서 자연주의 최초의 거장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저술가 빌라니와 보카치오, 그리고 바자리까지도 지오토의 충실한 자연묘사가 동시대인에게 끼친 엄청난 영향을 강조하고 있으며, 지오토의 예술양식을 그가 등장했을 당시 아직도 지배적이던 비잔틴풍 예술의 정직성 및 인위성과 대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생각은 모두 충분한 근거를 지닌다. 다만 우리는 지오토의 표현방법에서 볼 수 있는 명료성, 단순성, 논리성, 정확성을 후에 나타나는 더욱 세부적이고 유희적인 자연주의와 비교하는 데에만 익숙해 있을 뿐 지오토 이전에는 회화적 수단으로 전혀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그가 비로소 볼 수 있게 해주고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준, 사물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엄청난 회화기법상의 진보는 간과하고 있다. 우리는 그를 위대한 고전적인 화가로만 보지만 실제로 그는 무엇보다도 단순하고 이성적이고 냉철한 시민예술의 대가이며 그의 고전성은 직접적인 인상을 정리, 종합하고 현실을 합리화, 단순화한 데서 생겨난 것이지 결코 현실과 유리된 이상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고대적인 형식으로 돌아가려는 의지를 찾아보려 하지만 실제 그가 의도했던 것은 현실을 간략하게 파악해서 정확하게 표현하려는 그런 이야기꾼 같은 역할이었고, 그의 엄격한 형식주의는 반자연주의적인 냉담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희곡적인 효과를 획득하려는 노력에서 나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예술관은 비록 자본주의가 완전히 공고하게 된 시대에 나오긴 했으나 그래도 아직 요구조건이 까다롭지 않던 시민계급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그의 활동기간은 정치적 길드의 형성과 바르디가 및 페루치가의 파산 사이의 경제번영의 시대, 즉 중세적 피렌체의 가장 화려한 건물인 산타 마리아 노벨라 나 산타 크로체 궁전이나 피렌테 대성당과 그 종탑들을 탄생시킨 유럽 최초의 위대한 시민문화가 융성하던 바로 그 시기와 일치한다.
지오토의 예술은 그 예술의 발주자들이 번영을 추구하고 권위의 신장을 원하면서도 외부적인 격식이나 과시적인 소비에는 아직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듯이 엄격하고 실질적인 예술이었다. 피렌체 예술의 양식은 지오토 이후에 현대적인 의미에서 더욱 자연적으로 되었지만 - 더욱 과학적으로 되었기 때문에 - 르네상스 예술가들 중에서 지오토는 어느 누구보다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진실에 가깝게 묘사하려 성실하게 노력했다.
트레첸토 예술을 끝까지 지배한 것은 이러한 지오토적 자연주의였다. 부분적으로는 간혹 지오토 이전 전통의 틀에 박힌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양식의 흔적이 보이고 또한 중세의 성문자적 양식에 아직도 매달린 정체적이고 심지어는 반동적이기까지 한 경향도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배적인 경향은 단연코 자연주의적 취향이었다. 지오토의 자연주의가 최초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 것은 시에나에서이고, 여기서부터 그의 자연주의는 주로 시모네 마르티니의 활약과 그가 그린 당시 아비뇽에 있던 교황궁의 벽화를 통하여 서쪽과 북쪽으로 진출하였다. 따라서 한때는 시에나가 발전의 주도권을 잡고 피렌체는 뒷자리로 물러서는 결과가 되었다. 지오토는 1337년에 죽었고, 1339년부터 큰 가문들이 잇달아 도산함으로써 재정위기가 시작되었으며, 아테네공에 의한 살벌한 전제정치는 1342~43년에 걸쳐 있고, 1346년에는 대반란이 일어났으며 1348년은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피렌체에서 가장 맹위를 떨친 '흑사병 대창궐'이 있던 해이다. 페스트 창궐과 치옴피 반란 사이의 이 시기는 온통 폭동과 소요, 반란으로 점철되어 있다. 따라서 이 시대는 조형예술에서는 매우 비생산적인 시기였다. 시에나에서는 하층 시민계급이 피렌체에서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사회적, 종교적 전통에 더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적 발전은 위기나 정세변동에 방해를 받지 않고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또한 종교적인 감정은 아직도 그들의 생생한 생활감정의 일부였던 만큼 시대감각에 맞게 그리고 앞으로 계속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형태로 표현될 수 있었다. 지오토를 능가하는 회화기법상의 중요한 발전을 이룩한 것은 자연주의적 풍경화와 환각적인 도시 전망화의 창시자인 시에나 출신의 암브로지오 로렌제티 Ambrogio Lorenzetti 였다. 지오토의 화면공간이 비록 통일적이고 연속적이긴 하지만 화면공간의 깊이가 무대의 배경 정도를 넘어서지 못하는 반면, 로렌제티가 시에나의 광경을 그린 그림들은 그 넓은 공간성뿐 아니라 공간의 각 부분이 자연스럽게 서로 연결되고 있는 점에서도 지금까지 시도된 이러한 종류의 회화기법을 훨씬 넘어선 전망화를 이루고 있다. 그가 그린 시에나 시의 그림은 현실에 매우 충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도시의 어느 부분을 모티프로 사용했는가를 지금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며, 그의 그림에는 귀족의 저택과 중산층의 집들이 작업장 및 점포와 함께 조그만한 거리를 따라 언덕까지 올라가는 도시풍경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러한 도시화의 부분들은 마치 그것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사실적이고 생동감에 넘친다.
피렌체 예술의 발전은 처음에는 시에나보다 속도가 다소 느릴뿐더러 통일성도 모자랐다. 비록 전체적으로는 자연주의 발전과정에 이미 들어서 있었지만 결코 로렌제티의 풍경묘사와 일치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타데오 가띠, 베르나르도 다띠, 스피넬로 아레티노 도 로렌제티처럼 소박한 이야기꾼 화가였다. 그들은 회화적인 예술의욕을 확대하려는 지오토적 회화전통에 서 있고 무엇보다도 환각적인 기법에 의해서 화면공간의 깊이를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피렌체에는 이들이 추구한 방향 말고도 안드레아 오르카냐, 나르도 디 치오네와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한 또 하나의 예술경향이 있는데, 이들은 로렌제티 예술이 보여주는 친숙함이나 자연스러움 대신에 중세 전성기의 의식적 성스러움이나 생경한 좌우균형, 엄격한 리듬, 평면기하학적 장식성과 정면성, 병렬과 누적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이러한 기법들을 두고 그것이 단순히 반자연주의적 반동이라고 하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러한 반론은 충분히 근거가 있다. 이들은 이 시기의 회화에서 자연주의라고 하는 것은 결코 화면공간이나 환각이나 기하학적으로 구속된 형식이 붕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버나드 베렌슨이 바로 오르카냐와 결부해서 칭찬한 이른바 '촉각적 가치'까지도 자연주의적 성과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르카냐의 그림은 그가 그림속 인물에 부여한 조각적 양감과 조상적인 무게를 두고 보면, 화면 공간을 심화하고 확대한 로렌제티와 타데오 가띠 못지 않게 미술사에서 진보적 노선을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당시의 예술이 도미니크수도회의 영향 아래 계획적으로 시도된 고대복귀 경향의 일환리라고 하는 일반적인 가정이 얼마나 근거가 없는가를 알려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수도원의 에스파니아 사람을 위한 부속예배당의 벽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벽화는 비록 도미니크 수도회를 찬양하기 위해 헌납되었지만 많은 점에서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예술적 창조에 속하는 것이다.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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