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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켈란젤로 - 초기
    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9. 26. 14:32

     

    1490 년, 도메니크회의 수사 사보나롤라는 산 마르코 수도원에서 묵시록에 관한 설교를 시작했다. 

    당시 그는 37세였고 미켈란젤로 15세, 성령으로 들끓는 것 같은 자그마한 남자가 토해내는 열변을 눈 앞에서 보면서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낀다. 온통 피에 물든 신이 이탈리아를 분노의 칼로 찌르는 것 같은 설교였다. 피렌체는 전율하였다. 청중들은 미친 사람들처럼 울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면서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 가장 이상적인 시민이었던 사람들이 수도회에 입회하겠다고 했고 피코 델라 미란돌라, 폴리치아노와 같은 학자들까지도 이성을 잃는다.

    피렌체를 비유한 소돔과 고모라, 로렌조 일 마니피코를 암시하는 부유하고 두려움이 없는 자들의 죄악에 대한 설교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미켈란젤로도 두려움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예술을 선택한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예술은 지성과 아름다움으로부터 자양분을 얻지 않을 수 없고, 마니피코 주변에 있어야 제대로 성장하고 꽃 피울 수 있었다. 

    비아 라르가의 메디치 궁에 머문 3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미켈란젤로는 조각 뿐 아니라 인문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으며 읽고, 쓰고, 질문하며 자신을 단련해왔다. 그 시간이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일생 동안 고대와 현대, 세속적 메시지와 기독교 신앙 간의 조정자 역할을 해나갈 수 있는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찬으로서의 인생은 그 이상의 것이었고, 사보나롤라가 옳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보나롤라는 마니피코 주변에서 꽃 피우던 인문주의의 안티테제였다.                                                                                  

    어쨌든 사보나롤라는 고딕의 전제주의와 도그마에 진실했다. 그를 위협하기도 하고 달래 보기도 했으나 소용없는 일이 되자 마니피코는 <말하게 놓아 두어라, 지치는 날이 있겠지> 라고 말했다고 한다. 

     

     

     

     

    메디치 궁에서 생활하는 동안 미켈란젤로는 수도원장의 배려로 아나토미아(인체 해부학)를 연구하기 위해 산토 스피리토 수도원을 드나들며 시체를 직접 다룰 기회를 가졌고, 목재로 십자가에 못 박힌 크리스토 상을 조각했다. (지금 산토 스피리토에 남아있는 크리스토 상은 소실된 원본을 복제한 것이다)

     

     

    Michelangelo’s Crucifix, 1492, 142 cm × 35 cm

     

     

     

     

    1492년 8월, 로렌조 마니피코가 부친 피에로 Piero di Cosimo de' Medici와 같은 통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43세였다.

    로렌조의 희망에 따라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마지막 고해를 들었다. 

     

    교황 인노첸조 8세는 <이제 이탈리아의 평화는 끝났다> 고 한탄했으며,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특별히 미켈란젤로에게는 시간과 생이 석화石化된 것처럼 멈추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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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4년 1월, 피렌체가 온통 마비될 정도로 유례 없는 눈이 내렸다. 

    로렌조가 세상을 떠난 이후 메디치 궁을 떠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침묵에 잠겨있던 미켈란젤로는 드디어 대리석 덩어리에 헤라클레스를 조각하기 시작했다. 17세였다. 

    로렌조의 가업을 이어받은 피에로 데 메디치의 변덕에 따라 쫓겨났다가 다시 비아 라르가의 궁으로 돌아간 미켈란젤로는 그 동안에 헤라클레스상을 조각했고, 알폰소 스트로치에게 미리 판매된 헤라클레스상은 이후 프랑스 왕에게 넘어가 17세기 초까지 퐁텐블로의 정원에 놓여 있다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피렌체 시민들에게 "얼간이 피에로"로 불리우던 당시 스물한 살의 피에로 데 메디치는 우정까지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상당히 경박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자신의 가문이 거둔 미켈란젤로를 자랑스러워했으나 진정한 가치를 알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당시 메디치 궁에는 로렌조의 자녀들 이외에 폴리지아노, 미란돌라, 베니비에니, 로렌조 마니피코가 연주를 청하던 미켈란젤로의 동년배 류트 주자 카르디에레가 남아 있었다. 어느 날 공포에 질린 카르디에레는 미켈란젤로를 찾아와 찢어진 검은 상복을 입은 로렌조 마니피코가 꿈에 나타나 피에로가 머지않아 고국에서 쫓겨나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전하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막상 전하기를 두려워하던 카르디에레는 다시 나타난 로렌조가 명령을 따르지 않은 자신을 책망하며 뺨을 때리는 꿈을 꾼다.

    미켈란젤로는 그에게 피렌체 근교 카레치의 별장에 있는 피에로를 찾아가 로렌조의 전언을 전하라고 재촉했고, 카르디에레는 길에서 만난 피에로에게 죽은 아버지의 전언을 전달했으나 크게 비웃음을 당한다. 조소와 꾸지람을 듣고 돌아온 카르디에레의 이야기를 듣자 미켈란젤로는 더 이상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여 이미 알폰소 스트로치에게 예약되어 있던 헤라클레스의 상을 마지막으로 완성하여 넘기고 아버지와 의논하여 두 친구와 함께 피렌체를 떠나 베네치아로 떠난다. 1494년 10월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1달도 지나지 않은 11월, 피에로 데 메디치는 봉기한 민중들에 의해 피렌체에서 쫓겨난다. 

     

     

    내용 발췌> 미켈란젤로 / 부르노 아르놀디, 미켈란젤로의 생애 / 로맹 롤랑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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