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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켈란젤로의 도제생활
    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9. 24. 20:15

     

    1475년 3월 6일생인 미켈란젤로는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피렌체 시민으로 당시에는 카프레제Caprese 행정관이었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유모에게 맡겨 기르게 했는데, 교외(세티냐노Settignano)에 살고 있던 유모의 남편은 석수장이었다. 끌과 망치를 가지고 노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고 자신의 글에서 밝히고 있는 미켈란젤로는 13세가 되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술가의 길을 택해 당시 거장 화가 중의 한 명이었던 도메니코 길란다이오의 도제 생활을 하게 된다.

    1400년대 말의 피렌체는 길에서 베로키오, 보티첼리, 젊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로쪼 같은 예술가, 폴리지아노와 피코 델라 미란돌라와 같은 학자들을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도시였다. 수많은 예술계 거장들이 피렌체 시내에 공방을 차리고 제자들을 직접 가르치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어린 제자들은 살아있는 전설들의 교육에 만족하지 않고, 성당의 프레스코화를 연구하고 복사하러 몰려 다녔다고 한다. 

    < 내일은 지오토야, 산타 크로체로 모여!! > 

    < 다음은 마사치오야, 카르미네에서 모인다!! >

    그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뛰어나 스승으로부터 칭찬을 받던 미켈란젤로는 채 1년도 되지 않아 자신이 물감과 붓을 사용하는 회화보다는 돌에서 형상을 찾아내는 조각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회화를 <자신의 직분이 아닌 예술>로 정의하고, 베르톨도가 이끌고 있는 조각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길란다이오의 공방을 떠난다.

    조각 학교는 로렌조 데 메디치가 산 마르코 정원에 이미 적지 않은 고대 조각들을 수집하여 놓고 베르톨도로 하여금 조각에 뜻이 있는 뛰어난 학생들을 교육하도록 만든 곳이었다. 

    붓을 내려놓은 미켈란젤로는 이곳에서 대리석과 끌에 익숙해지는 것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첫 작업으로 웃고 있는 늙은 판faun의 두상을 복사했는데, 베르톨도는 이를 로렌조 데 메디치에게 보여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마니피코는 그를 메디치 가의 공관에서 지내게 하고,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할 정도로 특별히 아꼈다.

    이렇게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부에서 고대 수집품에 둘러 싸여, 메디치가 자녀들을 위해 초빙한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마르실리오 피치노, 폴리지아노 등) 에게서 플라톤 철학을 배우고, 수준 높은 그들의 토론을 경청하면서 라틴어·문학에도 높은 소양을 갖추게 된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으나 그의 일생에서 상대적으로 안정되었던 메디치 가의 보호 속에서 얻은 첫 과실은  <계단 위의 성모>였다. 

     

    Madonna of the Stairs, c. 1491, Marble, 56.7 cm × 40.1 cm

     

     

    연령도 시간도 초월한 듯한 엄숙하고 부드러운 모습의 성모와 어머니를 향해 몸을 비틀어 근육을 모두 드러내고 있는 작은 헤라클레스 같은 예수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이 작품은 성모자상이라기보다는 영웅을 기르고 있는 여신처럼 보인다. 

    이에 미술사학자 Francesco Negri Arnoldi 는 이 작품을 <기독교 전통과 고대 이상의 조화>라는 미켈란젤로의 인문주의 개념에 기초한 첫 <기존 도상 체계의 극복> 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옆모습을 보이는 성모는 고대 조각을 연상케 하며,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생생한 아기 예수는 형태에 대한 미켈란젤로의 순수한 관심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1. 

     

    높이 50센티에 불과한 이 작은 평부조는 조각면을 가득 채우는 공간 구성과 비례로 이미 거대하고 기념비적인 것을 선호하는 작가의 성향을 나타낸다. 

     

    Battle of the Centaurs, c. 1492, Marble, 84.5 cm × 90.5 cm

     

    이후 고부조 작품을 구상하던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매우 아끼던 인문학자 폴리지아노의 지도에 따라 <켄타우로스와 라피타이인의 싸움>을 조각하게 되는데, 유창한 힘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이 부조는 젊은이들의 투혼과 거칠고 사나운 싸움을 표현한 것으로, 당시 15세이던 과묵하고 주의 깊은 소년은 이 작품을 통해 영원히 혼동될 수 없는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로렌조 일 마니피코에 의해 고양된 피코 델라 미란돌라, 마르실리오 피치노, 폴리지아노, 베니비에니 등의 일류 학자들의 인문학적 토론들은 미켈란젤로에게 <의심할 여지없이 존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놀라운 미지의 문을 열어주었다.

    유년시절의 가정교사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치려 했지만 항상 실패했던 그 미켈란젤로가 비아 라르가의 메디치 궁 안에서 인문주의자들이 마치 현실처럼 이야기하고 토론하며 일상생활에서 완벽하게 조응하는 네오 플라톤주의에 진입한 것이다. 

     

    "이 돌을 한 번 볼까? 이 작은 돌조각은 비록 아무것도 표현하고 있지 않지만..."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말한다 "이 안에 하나의 이데아가 갇혀 있다네, 하나의 형상. 조각가가 그저 필요 없는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들어내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해. 이제 자유롭게 된 놀랄만한 형상은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네 친구들이여, 지성의 힘으로 찾아내는 것이지" 

    어린 미켈란젤로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깊은 공감을 공유하고는 밤에 홀로 곱씹어 보고, 아침이면 산 마르코의 정원에서 돌 위에 작업으로 표현했다. 

     

     

     

    내용 발췌> 미켈란젤로 / 브루노 나르디니

    1. Storia dell'arte / Francesco Negri Arnol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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