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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은 전제국가들
    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1. 28. 09:34

     

     일반적으로 15세기의 전제군주들에 대해서는 작은 나라들에서 가장 고약한 일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작은 나라에서는 저마다 계급에 걸맞은 생활을 원하는 가문들이 상속권을 놓고 싸우기 일수였다. 이를테면 카메리노의 베르나르도 바라노는 동생 둘을 죽였는데 자신의 아들들에게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서였다. 작은 도시의 지배자가 실용적이고 절도 있고 피를 흘리지 않는 통치술과 함께 문화에 대한 열정까지 가진 경우는 큰 가문에 속한 사람이던가 아니면 정치적으로 큰 가문에 종속된 사람이었다. 페사로Pesaro의 군주 알레싼드로 스포르짜가 그런 경우였다. 그는 위대한 프란체스코의 형제이며 우르비노의 페데리고의 장인이었다. 훌륭한 통치자로서 그리고 적절하고 온화한 섭정으로 그는 오랜 전쟁을 겪은 다음 평화로운 통치를 즐겼다. 책을 많이 모아서 아주 훌륭한 도서관을 만들고, 학술적이고 종교적인 대화를 하면서 여가 시간을 보냈다.

     

    Alessandro Sforza 1409-1473

     

     볼로냐의 조반니 2세 벤티볼리오도 이런 부류에 속했다. 그에 반해 카메리노의 바라니 가문, 리미니의 말라테스타 가문, 파엔짜의 만프레디 가문, 특히 페루자의 발리오니 가문의 경우에는 얼마나 피 흐르는 야만성이 드러나는가. 

     

    페루자의 발리오니 가문

     발리오니 가문은 군주 권한을 갖지는 않았지만 도시에서의 상속권을 가지고 엄청난 부와, 실질적인 관직 임명의 영향력을 통해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가족 내에서는 한 사람이 전체의 우두머리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다양한 가계 혈통들 사이에는 깊이 숨겨진 증오가 자리잡고 있었다. 오디 가문이 지휘하는 적대적인 귀족 집단이 그들에 맞섰고 중요한 가문들에는 항상 암살자들이 들끓었다. 매일 폭력 행위가 나타났다. 때로는 서로 다른 집안의 암살자들이 대로상에서 싸우기도 했다.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탄식했고, 교황의 대리인과 친척들은 침묵하거나 그곳을 떠났다. 마침내 오디 가문이 페루자를 떠나자 도시는 발리오니 가문의 절대권 아래 포위된 요새가 되었다. 대성당도 군대 막사로 이용되고, 음모와 기습에 대해서는 무시무시한 보복이 행해졌다. 1491년에는 130명의 침입자들을 한꺼번에 죽여 궁전의 벽에 매달았다. 그리고는 광장에 35개의 제단을 차리고 사흘 동안 미사와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도시에서 저주를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교황 인노켄티우스의 친척은 대낮에 칼에 찔려 죽었고, 분쟁을 조정하려 파견된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친척은 공개적인 조롱을 받았다. 

     

     

    Baglioni 가문의 문장

     

     연대기 기록자는 이 무시무시한 공포의 세월 속에서도 페루자 사람들이 지녔던 경건함과 신앙심을 지적하고 있다. 샤를 8세가 가까이 오고 있을 때 발리오니 가문 사람들과 아씨시 일대에 자리 잡은 추방자들이 전쟁을 벌여 골짜기 지역에 있던 모든 건축물은 파괴되고, 들판에 경작지가 없어지고, 농부들은 산적과 살인자로 변하고, 무성하게 자란 덤불에는 사슴과 늑대가 살게 되었다. 

     나폴리에서 돌아오는 샤를 8세보다 앞서서 움브리아 지방으로 간 교황 알렉산더 6세는 페루자에서 문득 자기가 발리오니 가문 사람들을 항구적으로 처치해버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그들 모두를 한 자리에 모으기 위해 귀도 발리오니에게 창시합 같은 축제를 제안했다. 그러나 귀도는 가장 멋진 구경거리는 페루자 사람 모두가 무장하고 모인 것을 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교황은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곧 이어서 추방자들이 한 번 더 기습을 했고, 이번에는 발리오니 가문의 영웅심만 겨우 승리를 거두었다. 광장에서 18살 된 시모네토 발리오네가 병사 몇 명을 거느리고 수백 명을 상대로 싸우다가 스무 군데 이상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아스토레 발리오네가 도와주러 달려왔을 때 도금된 철갑옷을 입은 그는 투구 위에 매를 올려놓고 말 위에서 다시 몸을 일으켰다. "모습은 전쟁신 마르스와 같았고, 행동은 군중 속에서 단연 돋보였다." 당시 라파엘로는 열두 살 소년으로 피에트로 페루지노 밑에서 견습화가 수련을 받고 있었다. 어쩌면 이 시기의 인상들이 성 게오르기우스의 성 미카엘을 그린 초기의 작은 그림들 속에 새겨졌을 것이다. 거대한 성 미카엘의 초상화 속에는 그 시절의 요소가 스러지지 않고 남아 있다. 

     

    Raphael, Expulsion of Heliodorus

     

     적대자들 중 일부는 죽고 일부는 두려움으로 움츠러들어 더 이상 그런 공격을 감행할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부분적인 화해와 귀환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페루자는 더 안정되지도 더 평화롭지도 않았다. 군주 집안의 내부 갈등은 점점 끔직한 폭력으로 이어졌다. 

    이 가문의 비극의 대부분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대성당은 포도주로 씻기고 새로 축성되었다. 발리오니 가문에 대한 전설이 생겨났는데, 그것은 사실 이 잔혹 행위를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옛날부터 고약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전설이다. 한 번은 27명이나 되는 사람이 한꺼번에 죽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미 전에도 한 번 발리오니 가문의 집들이 모두 무너져서, 그 기와로 길을 포장했다고 한다. 발리오니 가문의 궁전들은 교황 파울루스 3세 치하에서 정말 무너졌다. 

     

    리미니, 미란돌라, 시에나의 전제군주들

    리미니의 전제군주들은 앞으로도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Sigismondo Malatesta의 경우처럼 뻔뻔스러움, 무신앙, 전사로서의 재능, 수준 높은 교양이 한 사람 안에 합쳐져서 나타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러나 이 집안처럼 악행이 쌓이는 곳에서는 악행이 재능을 눌러서 전제군주들을 몰락으로 이끌어간다. 

     

    Sigismondo Malatesta

     

    작은 전제국가들에게 1527년경은 체사레 보르자의 시대처럼 저주받은 시대였다. 극히 일부만 그 시대를 살아남았지만 그것도 복은 아니었다. 1533년 피코 가문의 작은 군주들이 다스리던 미란돌라에서는 조반 프란체스코 피코가 동생의 아들에게 살해되어 목숨과 통치권을 빼앗겼다.  1490년대 이후 작은 패거리들로 찢긴 시에나에서 판돌포 페트루치가 행한 것 같은 특성 없는 전제정치는 자세히 관찰할 가치도 없다. 중요하지 않은 악당인 그는 법학 교수 한 명과 점성술사의 도움을 받아 통치하면서 때때로 살인 행위를 저질렀다. 가장 영리한 사람들조차 실패한 일에 성공한 다음 - 그는 체사레 보르자의 간계를 벗어났다 - 결국 버림받고 멸시받으며 죽었다. 그래도 그의 아들들은 그 엉터리 전제국가를 오래도록 유지했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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