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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큰 통치자 가문들 -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과 스포르짜 가문
    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1. 30. 09:00

     

     

     밀라노 공작 집안의 영주들은 15세기 이탈리아 사람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통치는 잔갈레아쪼 이래 절대군주제를 확립했다. 비스콘티 가문 최후의 통치자인 필리포 마리아Filippo Maria Visconti(재위 1412~1447)는 특별히 주목할 만하고, 다행스럽게도 잘 기록되어 남겨진 인물이다.

     

     

    Filippo Maria Visconti(1392~1447)

     

     

     지위가 높고 중요한 소질을 가진 한 인간을 두려움이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에게서 거의 수학적일 정도로 정교하게 나타난다. 국가의 모든 재원과 목적은 단 하나, 영주의 안전에 집중되었다. 그래도 그의 이기주의는 피에 굶주린 잔인성으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훌륭한 정원들과 나무 그늘 길, 놀이 구역 등으로 둘러싸인 밀라노성 안에 틀어박혀 그는 여러 해 동안이나 밀라노시에 한 발도 들여놓지 않았고 오로지 자신의 훌륭한 성들이 있는 지방 도시들만 방문했다. 빠른 말들이 끄는 돛대 없는 바지선의 대열이 그를 태우고, 이 목적으로 특별히 건설된 수로를 따라 목적지에 데려다주었는데, 그것은 완벽한 예법을 지키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성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백방으로 감시당했다. 누구라도 창가에 서는 일이 금지되었다. 바깥을 향하여 신호를 보낼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군주에게 가까이 가야 할 사람들에 대해서는 복잡한 시험 단계가 있었다. 그는 오로지 시험을 거친 사람들에게만 최고의 외교 업무와 하인 업무를 맡겼다. 여기서 이 두 가지 업무는 똑같이 명예로운 일이었다. 이 영주는 장기간의 힘든 전쟁들을 치렀고 언제나 중대한 정치 사안들을 다루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는 포괄적인 전권을 가진 사람들을 끊임없이 밖으로 파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안전은 이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그래서 용병대장들은 첩자를 통해서, 특히 선과 악을 서로 접합시켜서 이들을 헷갈리게 만들고 서로 거리를 두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필리포 마리아는 가장 깊은 내면에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두 개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별들과 맹목적 필연성을 믿었고, 모든 구난 성인들에게 기도를 드렸다. 그는 고대 작가들의 글과 프랑스 기사소설들을 읽었다. 그리고 자기 앞에서 죽음 이야기를 하는 것을 참지 못했고 아무도 이 행복의 성에서 죽는 일이 없도록 죽어가는 총신들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던 그는 후에 스스로 상처를 닫고 방혈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고 품위를 유지하며 죽었다.

     

     

     

    Filippo Maria Visconti & the Astrologer

     

     

    그의 사위이자 마침내 상속자가 된 행운의 용병대장 프란체스코 스포르짜Francesco I Sforza(1401 ~1466)는 모든 이탈리아 사람들 중에서 가장 15세기적인 마음을 가진 남자였다. 천재성과 개인적인 능력이 이 사람에게서보다 더 빛나는 승리를 거둔 적은 없었다.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가 행운의 여신의 총아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밀라노는 그토록 유명한 통치자를 얻게 된 것을 명예로 여겼다. 

     

     

     

    Francesco Sforza

     

     

    교황 피우스 2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그의 생애의 결산을 들어보자. "1459년 공작이 군주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만토바에 왔을 때 그는 60세였다. 기사로서는 젊은이 같고, 용모와 모습은 고상하고 위엄이 넘치며 말할 때는 조용하고 붙임성이 있고 영주의 태도를 지녔다. 우리 시대에 다시 없이 생생하고 정신적인 재능을 지녔고, 전쟁터에서는 패배를 모르는 그는 낮은 계층에서 한나라를 통치하는 지배층으로 올라간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덕을 지녔으며 그의 자식들은 하늘의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그는 별로 아프지 않았고 그의 중요한 소원들은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도 몇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그의 아내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그의 애인을 죽였다. 그의 동료 전사이며 친구인 트로일로와 부루노로는 그를 떠나 알폰소 왕에게로 넘어갔다. 동생 알레싼드로는 언젠가 한 번 그에 맞서도록 프랑스 사람들을 부추겼다. 그의 아들 중 한 명은 그에 맞서 나쁜 음모를 꾸몄다가 체포되었다. 전쟁으로 정복했던 앙코나를 전쟁으로 다시 잃었다."

    이 학식이 높은 교황이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거나 아니면 전혀 제한이 없었던 영주 권력의 결말에 대해 언급할 생각을 가졌다면 일반적인 깨달음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이 가문의 미래가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 천사처럼 아름답고, 게다가 조심스럽고 다방면으로 교육도 받은 자식들은 어른이 되자 끝없이 타락한 이기주의에 빠져 들었다.

     

     

     

    Leonardo da Vinci's study for the monument of Francesco Sforza († 1466)

     

     

     

    Francesco Sforza and his wife Bianca Maria Visconti as Solomon and the Queen of Sheba by Piero della Francesca

     

     

     

     갈레아쪼 마리아(재위 1466~1476)는 겉으로 나타난 것 만으로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손과, 자기가 지불하는 높은 급료를 자랑삼았고, 신용이 높은 것과 황금 2백만 개에 상당하는 보물과, 유명한 사람들이 자기를 둘러싼 것과 군대와 새 사냥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리고 연설을 즐겼다. 

     

     

     

    Galeazzo Maria Sforza  ( 1444 – 1476)

     

     또한 그는 변덕스러워서, 예를 들면 하룻밤 사이에 방 하나에 모든 인물들을 그려 넣으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끔찍스러운 잔인성을 보였고 앞뒤 생각없이 방탕한 면도 있었다. 몇몇 몽상가들에게 그는 전제군주의 모든 특성을 다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 그들은 그를 죽이고 나라를 동생들의 손에 넘겼다. 그들 중 하나인 로도비코 일 모로는 뒷날 감옥에 갇힌 조카를 무시하고 나라의 통치권을 차지하였다. 프랑스 사람들이 끼어들게 된 것과 이탈리아 전체의 나쁜 운명은 바로 이 권력 찬탈과 관계가 있었다. 

     

     

    로도비코 일 모로

     

     흔히 무어 사람(일 모로Il Moro)이라고 불리는 로도비코 스포르짜ludovico sforza(1452 ~ 1508)는 이 시대의 가장 완벽한 군주 유형이었다. 그는 무조건적인 도덕적 판단만 들이밀 수는 없는 천연산물처럼 보인다. 그가 취한 수단들의 깊은 부도덕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것을 사용한 것은 지극히 천진하게 보인다. 누군가 그에게 목적뿐 아니라 수단에도 도덕적 책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설명해주려 한다면 아마 그는 깜짝 놀랄 것이다. 가능한 한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으려고 했던 것을 자신의 특별한 미덕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정치적 능력에 대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전설적인 존경심을 그는 당연한 공물처럼 받아들였고 1496년에도 그는 이렇게 자랑했다. 교황 알렉산더는 자신의 사제이고 막스 황제는 자신의 용병대장이고 베네찌아는 자신의 금전 출납관이고 프랑스 왕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오고 가는 심부름꾼이라고.

     

     

     

    Ludovico Sforza Duke of Milan by Da Vinci

     

    Beatrice d'Este, wife of Ludovico Sforza  by Giovanni Ambrogio de Predis,c.1490                     

     

    Cecilia Gallerani,mistress of Ludovico Sforzaby Leonardo da Vinci,1480-90                                           

     

     

     놀라울 정도의 사려깊음으로 그는 최후의 곤궁 속에서도(1499) 그는 가능한 모든 탈출구들을 저울질해보았다. 그리고는 본인에게 명예가 되는 일이지만 인간 본성의 선의를 믿었다. 그는 밀라노성을 사수하겠다는 동생 아스카니오 추기경의 제안을 물리쳤다. 일찍이 그와 심한 싸움을 했기 때문이다." 추기경 전하, 나쁘게 여기지 마시오. 나는 당신을 믿지 않아. 비록 내 동생이긴 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의 귀환을 보증해줄 성을 사수할 지휘관을 골라두었다. 자기가 언제나 선의만으로 대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지휘관은 곧바로 성을 배신했다. 

     이 무어사람은 내심 선량하고 쓸모 있는 통치를 하려 애썼다. 그는 밀라노와 코모에서도 자신의 인기를 믿었다. 그러나 말년에 자기 나라의 재원을 지나치게 소모했다. 그리고 크레모나에서는 새로운 세금에 대해 반대 연설을 한 명망 있는 시민을 남몰래 목졸라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 이후로 그는 알현할 때에도 나무 울타리를 쳐서 사람들이 자기 곁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부르고뉴 궁정이 없어졌기 때문에 당시 유럽에서 가장 화려했던 그의 궁은 극히 부도덕했다. 아버지가 딸을, 남편이 아내를, 오빠가 누이를 팔았다. 오직 군주만은 항상 부지런히 활동했고, 자기가 이룬 업적의 아들로서, 자신 역시 스스로의 정신적 수완으로 존재하고 있던 사람들 - 곧 학자, 시인, 음악가, 화가들과 비슷하다고 여겼다. 그가 설립했던 아카데미는 학자 양성보다는 자신을 위해 존재했다. 그는 거기 속한 사람들의 명성을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교제와 그들의 봉사를 필요로 했다. 브라만테가 처음에 보잘것없는 대우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96년까지 정확하게 보수를 받았다. 그가 자발적으로 거기 머물지 않았다면 무엇이 그를 이 궁정에 잡아 둘 수 있었겠는가? 세상은 당시 그 누구보다 그를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로도비코 일 모로 안에 무엇인가 고귀한 요소가 살아 있었다고 한다면 이 수수께끼 같은 거장이 그토록 오래 그의 궁정에 머물렀다는 것이야 말로 바로 그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뒷날 체사레 보르자와 프랑수아 1세에게도 봉사했던 것을 보면 어쩌면 이 사람들에게서도 남다른 품성을 보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일 모로가 몰락하고 난 다음 이방인들 손에 질 나쁜 교육을 받고 자란 그의 큰아들인 마씨밀리아노는 아버지를 조금도 닮지 않았다. 작은 아들 프란체스코는 하다못해 잘난 체라도 했다. 이 시기에 그토록 자주 통치자가 바뀌고 그로 인해 끝도 없이 고통을 당하고 있던 밀라노는 어쨌든 이런 변화가 장차 야기할지도 모르는 반작용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려고 애썼다. 1512년 에스파냐군과 마씨밀리아노에 밀려 물러나던 프랑스 사람들은 밀라노 국민들이 자기들을 쫓아내는 데 동참하지 않았고, 반란을 꾀하지도 않았으며, 새로운 정복자 편으로 넘어가지도 않았다는 보증서를 밀라노에 써주었다. 이 불행한 도시가 정복자가 바뀌는 순간에 아라곤 사람들이 나폴리에서 떠날 때 그랬던 것처럼, 고급 귀족 악당 패거리들의 약탈에 노출되곤 했다는 사실은 정치적 관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 Castello sforzesco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위키백과 인물 소개: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https://ko.wikipedia.org/wiki/필리포_마리아_비스콘티

    프란체스코 스포르짜 https://ko.wikipedia.org/wiki/프란체스코_1세_스포르차

    루도비코 스포르짜 https://ko.wikipedia.org/wiki/루도비코_스포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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