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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세기의 전제국가
    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1. 26. 21:28

     

    15세기의 이탈리아 군주들

     15세기에 전제정치는 변화된 특성을 보인다. 수많은 작은 전제 군주들과 스칼라와 카라라처럼 큰 전제군주들이 몰락했다. 강력한 군주들은 원만하게 변화되었고 내적으로 더욱 강한 특성을 나타냈다. 나폴리는 새로운 아라곤 왕조를 통해 한층 더 강력한 방향을 얻었다. 그러나 15세기는 용병대장들이 독자적인 지배권, 곧 통치권을 추구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순수한 현실의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갔고, 재능과 포악함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작은 전제군주들은 배경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제는 자발적으로 더 큰 나라들에 봉사하고 그들의 용병대장이 되었다. 그런 일은 그들에게 약간의 돈과 벌 받지 않고 악행을 저지를 가능성을 마련해 주었고, 심지어는 영토를 넓혀주는 경우도 있었다. 

     

    15세기 외국 용병들(보병)의 복식과 무기 

     

     

     전체적으로 보면 크고 작은 전제군주들 모두가 더욱 긴장하고 신중하고 계산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고, 지나치게 대규모의 학살은 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분명하게 자기들의 목적에 이로운 악행만을 행했다. 그럴 경우에만 그 일과 무관한 사람들도 그들을 용서했기 때문이다. 합법적인 유럽의 왕가들에게 이롭게 작용했던 경건한 존경심이란 여기서는 흔적도 없었다. 

     이탈리아 군주들에게 본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언제나 재능과 냉정한 계산 능력이었다. 분노한 정열로 완전히 비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뛰어드는 '대담한 카를왕karl der kühne' 같은 인물은 이탈리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유형이었다. "스위스 사람들은 그냥 농부일 뿐이다. 그들을 모두 죽인다 해도 부르고뉴의 부자들에게 별 이익도 없다. 공작이 아무 저항을 받지 않고 스위스를 차지한다 해도 그의 연수입은 5천 두카토도 늘지 않는다" 이탈리아는 카를에게 나타나는 중세적 요소, 그의 기사적인 상상력과 이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karl der kühne 1433 -1477  

     

     다른 한편 이탈리아 영주들을 그들의 방식에서 능가했고 스스로 프란체스코 스포르짜의 찬미자라고 고백했던 루이 11세는 교양의 영역에서는 천박한 천성으로 인해서 이탈리아 지배자들에 훨씬 못 미쳤다. 15세기 이탈리아 국가들에게는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영주들은 높은 교양을 쌓았고, 많은 경우 아주 중요한 인물들이었으며, 그들의 처지와 과제를 놓고 보면 아주 특징적인 존재들이어서 오직 도덕적인 판단만 옳다고 하기 어렵다.

     

    이탈리아에서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배권의 근거는 불법적이었고, 언제나 한 줄기 저주가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인기나 봉토 수여도 이것을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국민들은 자기들의 통치자가 어딘가 먼 나라에서, 아니면 이방인에게서 양피지 한 조각을 사들였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황제들이 좀 쓸모가 있었더라면 전제군주들이 생겨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냉정한 인간 이성의 논리는 말하고 있었다.

     카를 4세가 황제의 제관을 받기 위해 로마에 간 이후로 황제들은 그저 이탈리아에서 자신들을 제외한 채 일어난 전제 상태를 '인가'하는 역할만을 했다. 문서말고 다른 것으로 이 전제 상태를 '보증'해줄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이탈리아에서 보인 카를 4세의 모습은 가장 굴욕적인 정치 코미디의 하나였다. 마리오 빌라니의 글에는 그가 비참한 모습으로 로마에 등장한 이야기, 칼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다가 두둑한 돈주머니를 짊어지고 다시 알프스를 넘어 돌아간 이야기들이 나와있다.  지기스문트 황제는 적어도 처음에는 교황 요한 23세를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설득하겠다는 좋은 의도를 품고 이탈리아에 왔다. 두 번째로 왔을 때 지기스문트는 반년이 넘도록 채무자 감옥에 앉아 있듯이 시에나에서 기다리다 간신히 대관식을 하러 로마로 갈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3세의 이탈리아 방문은 돈 들이지 않고 휴가 여행을 한다는 성격을 지녔다. 그는 원리를 문서로 확인받으려는 영주들, 혹은 황제를 화려하게 접대하고 싶어 하는 영주들의 환대를 받았다. 두 번째로 로마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는 페라라에서 하루 종일 방에서 떠나지 않고 500장의 증서를 발행해 주었다. 그는 기사, 박사, 백작, 공증인 등을 임명했다. 황제가 이처럼 문서를 남발해서 작은 성 전체를 온갖 작위로 채우는 것에 대해 당시 여론을 이끌던 인문주의자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의견이 달리했다. 황제파 시인들이 보내는 전통적 환호성이 있었던 반면, 포지오 같은 시인은 대관식이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제노바에서 루이 12세를 맞이하려고 총독 궁전의 가장 큰 홀 정면을 장식한 거대한 독수리(신성로마제국의 상징)를 치우고 모든 것을 백합(프랑스 궁정의 상징)으로 장식했을 때 역사가 세나레가는 그렇게 많은 혁명을 겪으면서도 언제나 남아있던 그 독수리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은 대체 제노바에 어떤 권한들을 가지고 있는가 물어보았다. 그 누구도 더 이상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탈리아의 그 누구도 그런 질문에 확실한 답변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카를 5세가 에스파냐와 신성로마제국을 동시에 지배하게 되었을 때에야 그는 에스파냐의 힘을 이용해서 황제로서의 요구들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제국이 아니라 에스파냐에 도움이 되었다. 

     

     

    Karl V.-Carlos I. 1548 (Tiziano) 

     

    서출 왕자들

     외국인들, 예를 들어 프랑스인 코미네 같은 사람들에게 대단히 이상하게 여겨진, 합법적 출생에 대한 무관심은 15세기 왕조들의 정치적 불법성과 관계가 있다. 그 두 가지는 나란히 진행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어떤 왕가도 정통 가계에 불순한 요소가 끼어들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나폴리의 아라곤 가문은 서출 혈통이었다. 알폰소 1세의 동생이 아라곤 혈통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우르비노의 통치자인 위대한 페데리고는 아마도 몬테펠트로 가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교황 피우스 2세가 만토바 회의에 참석하러 갔을 때 에스테 가문의 서자 여덟 명이 페라라까지 그를 마중 나왔다. 적법한 아들들이 미성년일 때 다급한 위험이 닥치는 경우가 많아서 서자들에게도 왕위가 허용되었다. 출생이 합법적이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고 일종의 연장자 상속이 나타난 것이다. 이곳에서는 합목적성, 개인과 그 재능에 대한 인정 등이 다른 서양 국가들에 나타나는 법칙과 관습보다 더욱 강했다. 교황의 아들들도 자신의 국가를 수립하던 때가 아닌가!

     

     

    Castello Aragonese, Napoli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외국인들과 막 일어나기 시작한 반종교개혁의 영향 아래 이런 경향이 엄격하게 취급되었다. 

     

    용병대장들

     15세기에 가장 많은 경탄을 받았던 최고 불법성의 형식은 - 출신과 상관없이 - 통치권을 획득한 용병대장이었다. 근본적으로 따지면 11세기에 노르만 사람들이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런 종유의 시도는 이탈리아에 지속적인 불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고용주가 돈이 부족해서 땅과 신민을 내주는 경우, 용병대장이 영주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찬탈 행위 없이도 가능한 일이었다. 어차피 용병대장들은 일시적으로 부하들을 해고하는 경우에도 겨울 진지를 만들어 필요한 보급품들을 보관해둘 안전한 장소가 필요했다. 그렇게 무장을 갖춘 용병대장의 첫 번째 예는 존 호크우드였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에게서 마냐카발로와 코티뇰라를 양도받았다. 이미 어딘가의 전제군주일 경우 그것은 자기가 물려받은 영토를 더 크게 만들 기회였다. 용병대장의 통치욕 때문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잔치판은 밀라노에서 잔 갈레아쪼가 죽은 다음에 벌어졌다. 잔 갈레아쪼의 두 아들의 통치는 주로 이 용병대장 군주들을 없애는 일로 이루어졌다. 

     용병대장과 고용주간의 부도덕한 관계는 15세기의 특징적인 일이었다. 실제사건은 아니지만 어디에나 잘 들어맞는 일화 중에 하나는 어떤 장수가 한 도시를 적의 억압에서 해방시키자 시민들은 매일처럼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를 상의하다가 자신들이 해줄 수 있는 어떤 보상도 충분하지 못하다. 그를 도시의 통치자로 만든다 해도 보상으로 부족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일어나 그렇다면 그를 죽여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받들자고 제안한다. 실제로 용병대장들은 자신들의 고용주를 두려워해야 할 처지였다. 싸움에 이기면 그들은 위험한 존재가 되어 제거되었다. 로베르토 말라테스타가 식스투스 4세를 위한 싸움에서 승리한 후 제거된 것처럼. 전쟁에서 패배해도 그들에게 복수했다. 용병대장들은 자주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고용주에게 볼모로 넘겨주어야 했고, 그러면서도 서로를 믿지 못했다는 것이 관계의 실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아주 완벽한 내면의 선의만이 그들이 절대적 무법자가 되는 일을 막아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성스러운 모든 것들을 비웃고, 잔혹한 배신을 일삼았던 용병대장들도 있었다. 교황의 파문을 받고 죽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몇몇은 재능과 인품을 대가의 경지로까지 발전시켰다. 그로 인해 병사들의 인정과 경탄을 받았다. 근대 역사상 처음으로 다른 어떤 고려 없이 군대 지휘자의 개인적인 명망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던 경우이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짜의 생애에서 그 빛나는 예를 볼 수 있다.

     

     

    Francesco Sforza Duke of  Milan

     

    그는 어떤 계급상의 선입견에도 방해받지 않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개인적인 인기를 얻었고, 위험한 순간에 그것을 적절하게 이용했다. 그를 보면 적들은 무기를 버리고, 얼굴을 가렸던 면갑을 열고 존경심에 차서 그에게 인사했다. 누구나 그를 전사战士의 아버지로 여겼기 때문이다.

     

    스포르짜 가문

     프란체스코 스포르짜의 아버지 야코포는 형제가 스무 명이나 되었다. 그들 모두 파솔리니 가문과의 끝없는 전쟁에 압력을 느끼며 파엔짜 근처의 콘티뇰라에서 거칠게 양육되었다. 집안 전체가 무기 창고이자 위병실이었고, 어머니와 딸들까지 전투적이었다. 열세 살에 야코포는 그곳을 떠나 파니칼레에 있는 교황의 용병대장 볼드리노에게 합류했다. 야코포는 떠돌아다니면서 경력을 쌓아 점차 출세하게 되자 가족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가족 수가 많은 왕가가 군주에게 주는 이점을 누렸다. 야코포가 돈 문제에서 극단적으로 신의를 지킨 것, 그 때문에 패배한 후에도 금융업자들 사이에서 신용을 잃지 않았다는 것은 지속성과 영향력에 대한 그의 집착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는 어디서나 병사들의 약탈을 막고 농부들을 지켜주었고, 정복한 도시를 파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정부 루치아(프란체스코 스포르짜의 어머니)를 군주와의 혼인관계를 이용하려고 다른 남자와 결혼시켰고, 친척들의 혼사도 일정한 계획에 따라 치렀다. 그는 동료들의 무신앙 및 방탕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가 아들 프란체스코에게 들려준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른 사람의 여자를 건드리지 말 것, 둘째, 부하들을 때리지 말 것, 만일 그런 일이 생기면 그를 멀리 보낼 것, 셋째, 고집 센 말과 편자를 잘 잃어버리는 말을 타지 말 것. 그는 위대한 장군은 아닐지라도 위대한 병사의 인품을 가졌다. 강하고 잘 훈련된 신체, 인기 있는 농부의 얼굴, 놀라운 기억력 등이었다. 모든 병사들과 그들의 말, 그리고 여러 해 동안의 급료 관계 등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틈이 날 때마다 역사책을 읽었고, 그리스어와 라틴어 책들은 번역을 시켰다.

     그보다 더욱 명성을 얻은 아들 프란체스코는 처음부터 분명하게 위대한 통치권을 지향하였다. 그리고 빛나는 군대 지휘와 주저 없는 배신을 통해 강력한 밀라노를 얻었다(1447~1450). 그리고 스포르짜는 용병대장들이 통치권을 차지하는 일은 자기 자신으로 끝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코모 피치니노가 시에나를 장악하려 했을 때 그에 맞서도록 파견된 군대와 장교들은 그를 놓아두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오르베텔로에서 그를 포위하고 있으면서 그에게 식량을 공급했다.  그는 명예롭게 궁지에서 벗어났지만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가 밀라노의 스포르짜를 만나고 나서 나폴리의 페란테에게 갔을 때 온갖 보증과 높은 결속감에도 불구하고 페란테는 스포르짜와 공모해서 그를 카스텔 누오보에서 죽인다.

     

    용병대장들의 몰락

     물려받은 국가를 소유한 용병대장들도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자코모 피치니노가 몰락한 이후 새로운 용병대장 국가가 출현하는 것은 모두에게 참을 수 없는 스캔들로 여겨지게 되었다. 네 개의 '큰 나라' 나폴리, 밀라노, 교황국, 베네치아 등은 어떤 방해도 허용하지 않는 균형 체제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일부는 용병대장 출신이고, 일부는 아직도 용병대장을 겸한 작은 전제군주들이 많던 교황국에서는 식스투스 4세 이후 독점권을 가진 친척들이 찬탈 시도를 하곤 했다. 그러나 사태가 조금이라도 불안정하면 용병대장들도 다시 나타났다. 옛날에 브르고뉴에 봉사했던 대장 보칼리노가 자기가 얻은 도시 오시모와 함께 터키로 넘어갈 뻔한 일이 일어났다. 다행스럽게도 로렌쪼 일 마니피코의 중개로 그는 돈을 받고 물러났다. 샤를 8세의 침략으로 모든 것이 흔들리던 1495년에는 브레시아 출신 용병대장 비도베로가 자신의 힘을 시험하였다. 수많은 귀족과 시민들을 죽이고 체세나시를 장악한 일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요새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또 다른 악당 리미니의 판돌포 말라테스타가 아버니 로베르토 말라테스타가 물려준 군대를 거느리고 비도베로는 라벤나의 대주교에게서 카스텔 누오보시를 빼앗았다. 그렇지 않아도 교황의 압력을 받고 있던 베네찌아는 판돌포에게 비도베로를 체포하라고 명령했고, 비도베로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판돌포는 그를 배려해서 우선 감옥에서 목졸라 죽인 다음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와 같은 권력 찬탈의 마지막 중요한 예는 무쏘의 성주였다. 그는 파비아 전투가 끝난 다음 밀라노의 혼란을 틈타 코모 호숫가에서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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