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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세기의 이탈리아
    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1. 25. 20:26

     

    전제군주에 의해 통치된 지역의 내부 상태에 대해서는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있는 노르만 국가들이 훌륭한 모범을 보여 준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만든 국가가 그런 경우이다. 사라센 사람들을 근처에 두고 배신과 위험의 한가운데서 성장한 그는 일찌감치 사물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처리하는 데 익숙한 사람으로, 왕으로서는 최초로 현대적인 인물이었다. 

     

    Frederick II  (26 December 1194 – 13 December 1250)

     

    여기에 사라센 국가들과 그 행정 체계를 상세히 알았다는 점, 교황들과의 생존 전쟁 등이 덧붙여 졌다. 이 생존 전쟁에서 양측은 전쟁터에서 가능한 모든 힘과 수단을 다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리드리히의 명령은 봉건국가를 철저히 파괴하는 것과 국민을 변화시켜 스스로의 의지력을 잃고 무장 해제되어 최고도로 통제 가능한 대중으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그는 사법권과 행정권을 서양에서는 유례가 없었을 정도로 중앙에 집중시켰다. 어떤 관직도 선거로 차지할 수 없었으며 포괄적인 토지대장과 회교도식의 고통스럽고도 잔인한 방식으로 세금을 거두었다. 여기에는 국민은 없고 오로지 통제 가능한 신하들만 존재했다.  예를 들면 특별 허가 없이는 외국인과 결혼할 수도, 외국에서 공부할 수도 없었다. 나폴리대학은 학업을 가장 먼저 제한했다. 

    프리드리히가 지중해 전체에서 독자적인 무역을 하변서 수많은 상품들을 독점하고 신하들의 무역을 방해한 것은 진짜 회교도 식이었다. 그가 이단자를 쫓아낸다는 핑계로 실제로는 독립적인 도시 생활 신봉자들을 박해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행동은 더욱 고약한 것이었다. 

     

    An  augustale  coin of Frederick II, from the  Messina  mint of Sicily, struck some time after 1231

     

    시칠리아에서 루체리아와 노체라로 이주한 사라센 사람들이 주로 안으로는 경찰력, 밖으로는 군대의 핵심 세력이 되어서 그에게 봉사하였다. 이 사람들은 온갖 비명에 무감각했고 교회의 금지령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무기를 빼앗긴 신하들은 뒷날 만프레드가 몰락하고 앙주가 나라를 정복할 때에도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앙주 가문은 이런 통치 방식을 물려받아서 계속 유지했다.

     

     

    Castel del Monte , in  Andria , Apulia, Italy. 1240

     

     

    중앙집권을 이룬 프리드리히 황제 말고도 독특한 권력 찬탈자가 등장한다. 황제의 보좌관이자 사위인 에쩰리노 다 로마노였다. 그는 통치 체제나 행정 체제를 대표하지는 않았다. 주로 동북부 이탈리아에서 통치권을 얻기 위한 전투만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후세를 위한 정치적인 모범으로서 자신의 황제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다. 

     

     

    Ezzelino III da Romano  (April 25, 1194 – October 7, 1259)

     

     

    그 이전까지의 정복과 중세의 왕권 찬탈 행동은 실질적인 상속자나 아니면 상속자라고 내세운 가운데, 그도 아니면 비신자나 추방자에 대해서만 행해졌다. 에쩰리노는 최초로 대량학살과 잔학 행위들을 통하여, 즉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 왕권을 세우려는 시도를 하였다. 후세의 그 누구도, 심지어 체사레 보르자조차도 범죄의 엄청난 규모라는 점에서 에쩰리노를 능가하지 못한다. 

    그런 시대에 프리드리히의 신하로 태어난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입헌군주제 통치 이론을 내세웠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군주는 군주 자신이 지명한 원로원과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표기관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이론은 강의실에서도 점차 사그라 들고 프리드리히와 에쩰리노는 13세기 이탈리아의 가장 커다란 정치 현상으로 남았다. 그들은 거의 우화적인 모습으로 <백개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되었다. 이 이야기의 올바른 편집은 19세기에 와서야 이루어진 것이지만 어쩰리노는 이 책에서 벌써 지극히 위대한 인상을 표현할 때 나타나는 수줍은 경외심으로 서술되고 있다. 목격자의 기록에서부터 절반쯤은 신화화한 비극에 이르기 까지 이 인물에 대해 하나의 완벽한 문헌이 만들어진 것이다

     

    The meeting between Saint Anthony and Ezzelino da Romano, fresco by Giovanni Antonio 

     

    두 인물이 사라진 직후, 주로 교황파와 황제파의 싸움에서 전제 군주들이 다수 등장한다. 그들은 보통 황제파의 우두머리였다. 사정과 조건들이 그토록 달라도 일반적으로 전제가 되어 있는 불가피함을 볼 수 있다. 수단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들은 교황파와 황제파가 시작했던 것을 계속 이어받았으니, 곧 반대파를 절멸시키거나 쫓아 보내고 그들의 집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출처>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야코프 부르크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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