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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세기의 전제국가
    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1. 26. 13:08

     

    14~15세기 이탈리아의 복식문화

     

    14세기의 크고 작은 전제국가들은 이런 종류의(프리드리히 II세 시대) 인상들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고도 남는다. 그들의 잔혹 행위는 널리 알려졌고, 역사는 그것을 장황하게 기록하였다. 그러나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근거하고 그에 따라 조직된 국가로서 이런 전제국가들은 그래도 이점이 더 컸다.

    당시 이탈리아 바깥의 군주들은 전혀 짐작도 못한던 일이었지만, 모든 수단이 정당화된다는 의식은 국경선 안에서 거의 절대적 권력을 가진다는 점과 결합되어서 이탈리아에 극히 특수한 인간 유형과 생활 방식을 만들어냈다. 지혜로운 전제군주 통치의 최고 비밀은 가능한 모든 곳에 세금을 매기거나 아니면 맨 처음에 아예 세금 체계를 잘 정비하는 일이었다. 주요 소득원인 기본세는 토지대장에 근거해서 부과하였다. 여기에 특별 소비세와 수출입품에 매겨지는 관세, 그리고 영주 가문의 개인 재산에서 나오는 수입이 덧붙여졌다. 세금 수입이 늘어날 가능성은 오로지 일반적인 복지와 교역이 증가하는 일에만 달려 있었다. 도시에서 흔히 행해지던 차입은 여기서는 별로 없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잘 계산된 약탈이 때때로 행해졌다. 예를 들면 진짜 술탄식으로 직위를 해제시키거나 최고위직 재무 관리를 약탈하는 등 국가 전체의 상황이 그로 인해 변동되지 않을 경우에 한해서였다.

    이런 수입들을 가지고 작은 긍정, 경호병, 징집 병력, 관리, 어릿광대, 그리고 영주 개인의 주변 인물에 속하는 여러 가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유지하였다. 권력이 불법적이라는 사실은 지속적인 위험을 만들어내면서 통치자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그가 맺을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관계는 출신과는 상관없이 정신적으로 높은 재능을 지닌 사람들과의 관계였다. 13세기 북유럽 영주들의 너그러움은 기사들과 시중들고 노래하는 귀족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재능 자체를 필요로 하고, 화려함을 좋아하고, 명성을 갈망하던 이탈리아 군주들은 달랐다. 그들은 시인이나 학자와 함께 있으면 새로운 땅에 있는 것처럼 느꼈고, 심지어는 새로운 합법성을 얻은 것처럼 느꼈다.

    베로나의 전제군주 칸그란데 델라 스칼라는 이런 점에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Cangrande della Scala  (9 March 1291 – 22 July 1329)

     

    그는 능력이 뛰어난 추방자들을 자기 궁정에 불러들여 이탈리아 전체를 접대하다시피 했다. 문필가들은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 이런 궁정들을 방문하는 것 때문에 혹독한 비판을 받았던 페트라르카는 14세기 영주의 이상적인 모습을 서술하였다. 그는 자신의 후원자에게 대단한 것을 요구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자기에게 허용된 방식으로 그렇게 했다. "당신은 신민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되고, 조국의 아버지가 되어야 하며, 그들을 당신 자신의 자식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요. 당신의 지체처럼 말입니다. 적에 대항해서는 무기나 친위병, 용병들을 내세우면 되지만 당신의 신민을 향해서는 선의로만 대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현존 질서를 사랑하는 신민들만을 뜻하는 것입니다. 매일 변화를 꿈꾸는 자는 반도이고 국가의 적이며, 그 같은 자들은 엄격한 정의로 다스려야 하니까요." 국가의 전권이라는 진짜 현대적인 허구가 여기 등장하고 있다. 군주는 모든 것을 다 배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와 공공건물을 세우고 관리하고, 노상 경찰을 만들고, 소택지를 개조하고, 포도와 곡식을 보호하고, 세금을 공평하게 할당하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과 병자를 지원하고, 탁월한 학자들에게 보호와 교류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들 학자들은 그가 죽은 다음의 명성을 확보해줄 것이라고 했다.

     

    전제군주들에 대한 증오

    그러나 일반적인 장점들과 개인들의 업적이 무엇이었든 간에 14세기 사람들은 벌써 이들 전제국가 대부분이 아주 잠깐만 지속할 수 있을 뿐 전혀 앞날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였거나 아니면 짐작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정치 체제의 경우, 내적인 이유에서, 영토가 넓으면 넓을수록 그만큼 더 지속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강력한 전제군주들은 항상 작은 전제국가들을 집어삼키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 시대에 비스콘티 가문에 희생된 군소 영주들만 해도 1백 명은 될 것이다. 그러나 거의 언제나 내부의 소요가 외부의 위험과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군주의 성격과 반응하면서 대부분의 경우에 파멸의 근원이 되었다. 잘못된 전권, 한편으로는 온갖 종류의 이기심과 쾌락의 욕구가, 다른 한편으로는 적들과 배신자들이 군주를 거의 피할 수 없이 고약한 의미의 전제군주로 만들었다.

     

    Taddea Visconti, Duchess of Bavaria  (1351 – 28 September 1381)

     

    하다못해 자신의 가까운 혈족만이라도 믿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모든 것이 불법인 곳에서는 지배권의 계승이나 재산분배에서 확고한 상속권이 없게 마련이다. 위기의 순간에는 단호한 사촌이나 아저씨가 가문 전체를 위해서, 아직 성년이 되지 못했거나, 무능한 왕자를 제거하였다. 서자를 쫓아내는 일이나 인정하는 문제를 놓고도 끊임없이 싸움이 벌어졌다. 공개적인 모반이나 사나운 혈족 살해가 드물지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 친척들은 통치자가 지나치게 공공 도덕을 위반할 경우 그를 희생시켜서 가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통치는 가문 전체의 것이었다. 그래서 통치자는 가문의 고문단과 결속하였다. 이 경우에도 재산과 영향력의 분배는 극단적인 싸움을 만들어내기가 쉬웠다. 

    당시 피렌체 작가들에게서 이런 체제 전체에 대한 깊은 증오가 나타난다. 화려한 등장과 화려한 의상을 통해서 전제군주들은 자기들의 허영심을 만족시킨 것보다 국민의 상상력을 더 많이 자극하였는데, 이러한 것들이 작가들의 비웃음을 샀다. 높이 홀로 서 있고, 감옥들과 엿보는 구멍들로 채워진 영주들의 성을 작가들은 악과 비참의 소굴로 그렸다. 또 다른 사람들은 군주에게 봉사하는 모든 사람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라고 예언하고 마지막에는 필연적으로 모든 선하고 쓸모 있는 사람들의 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군주의 운명까지 탄식하였다. "전제군주들이 생겨나고 성장하고 자리를 잡아가는 것과 아울러 그들의 내면에서는 그들에게 분쟁과 몰락을 가져올 소질들도 함께 자라난다" 가장 깊은 대립은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공화국 피렌체에서는 당시 개인들의 개성이 풍부하게 발전하느라 분주했는데도, 전제군주들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신하들 이외에 다른 사람의 개성을 인정하지도 허용하지도 않았다. 동시대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이들 군주의 무시무시하고 신을 저버린 행태는 많은 군주들이 악명 높은 점성술을 믿고 신앙심을 갖지 않았다는 점을 통해 더욱 특별한 색깔을 띄었다. 

     

    밀라노 비스콘티 가문

    14세기 전제정치의 가장 완벽하고 전형적인 모습은 논란의 여지없이, 대주교 조반니가 죽은 이후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에서 볼 수 있다. 우선 베르나보에게서 가장 무시무시한 로마 황제들과의 유사성이 나타난다. 당시 가장 중요한 국가적 목표는 군주의 산돼지 사냥이었다.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은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베르나보 비스콘티는 가능한 모든 강제 수단을 동원해서 세금을 올려 엄청난 재물을 모았다. 조카 잔 갈레아쪼가 그를 기습해서 권력을 장악한 사건도 특징적인 일이었다.

     

    Gian Galeazzo Visconti

     

    잔 갈레아쪼에게서는 거대한 것에 대한 진정한 전제군주의 감각이 드러난다. 그는 만토바와 파도바를 무력화 시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제방을 쌓았고, 베네치아의 바다 호수들을 말려버릴 생각을 했다. 그는 모든 수도원 중에 가장 경이로운 것, 즉 파비아의 은둔 수도원과 밀라노 대성당을 건설했다. 이 대성당은 크기와 화려함에거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교회를 능가하는 것이엇다. 그리고 아버지가 시작하고 그가 완성시킨 파비아 궁전 또한 당시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궁이었다. 그의 유명한 도서관과 엄청난 양의 성자 유해 수집품도 그곳으로 옮겨졌다.

    그는 병들어 죽어가면서도 이탈리아 왕권이나 황제의 관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가 정복한 국가들은 한때 연간 금화 120만 굴덴의 정규 세금 말고도 80만 굴덴을 특별 보조금으로 지불해야만 했다. 그가 죽은 뒤, 온갖 폭력 수단을 동원하여 정복하였던 왕국은 산산조각나고, 한동안은 원래의 영토조차 찾을 수 없었다. 

     

     

    출처>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야코프 부르크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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