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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 생활의 유형들
    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5. 26. 18:19

     

    매우 외면화된 종교의 인습 속에서 민중은 아주 힘찬, 불안과 엑스타시를 줄 정도로 힘찬, 그러나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는 후에 프로테스탄티즘이 제기하게 될 문제나 정신적인 감동들은 아무것도 제기하지 않는 그런 신앙을 갖고 있었다. 일상적인 삶의 불경한 순박성과 미온성은 간간이 경련적으로 민중을 사로잡곤 하는 격정적인 신앙의 깊은 감동들에 의해 끊기곤 하였다. 만약 우리가 이 대중을 단순히 경건한 자들과 세속적인 자들로 나누려든다면, 우리는 약하고 혹은 강한 종교적 긴장들의 대립을 잘 이해할 수 없다. 

    라틴 민족들은 아마도 북유럽사람들보다 더 쉽게 세속적인 삶과 높은 종교적 교양의 복된 순간들 사이의 모순을 잘 참고 견딘다. 이 시대의 종교 생활이 보이는 모순 중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사제 계급에 대한 공공연한 멸시이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제들에 대한 이 멸시는 사제권의 신성함이 고취시키는 매우 큰 존경심과 나란히 병립한다. 이 경멸은 교회의 고위층들이 보이는 세속성과 하위 성직자 계층이 보이는 천박함에서 설명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똑같이 이교적 본능에 기인한다. 완전히 기독교화되지 못한 민중의 영혼은, 싸움이 금지되어 있고, 정숙함이 부과된 사람에 대한 반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용기와 사랑을 근간으로 한 기사도적 오만은 성직자의 이상을 배척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거기다가 성직자 계층의 타락은 최종 마무리를 짓는 격이었다. 그렇게 하여 귀족과 부르주아들과 농노들은 수세기 전부터, 탐식과 사치에 젖어 사는 수도사들과 사제들을 희화화하는 데 즐거움을 느꼈다. 그것은 잠재적이고도 보편적인 끈질긴 증오였다. 민중들은 사제 계급의 악폐를 공격하는 말을 듣는 데 지칠 줄 몰랐다.

     

     

     

    한편에서, 14,15세기 민중 설교가들에 의해 일깨워진 폭발적인 신앙의 비약이 탁발 수도회들의 부흥에 원천을 둔다면, 다른 한편으로 이 수도회들은 그 자체의 천박성에 의해 예사로운 경멸과 조롱거리로 화한다. 

    탁발 수도회원들에 대한 특별한 반감은 중대한 사고 변화의 징후이다. 그들이 구현하고 있는 형식적이고 독단적인 청빈의 개념은 새로이 태어나고 있던 사회적 감정에 더 이상 부응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가난을 하나의 사도적 미덕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사회악으로 여기기 시작하였다. 

    그 시대의 종교 생활은 극단적인 대조를 나타낸다. 사제 계급과 수도사들에 대한 경멸과 증오는 그들의 신성한 직무에 대한 깊은 존경심의 반대 급부일 뿐이다. 이는 종교적 의무의 개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순진한 물질주의가 가장 깊은 종교심들과 교대로 나타난다. 

    대중들의 종교 생활의 급격한 전이와 대조들은 개개인의 종교 생활 속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신앙의 진리들은 늘 영혼 속에 마치 천둥처럼 급격한 방식으로 침투된다. 그것은 성 프란체스코의 체험의 창백한 모방이다. 

    대영주들의 경우 귀족 생활의 근본적인 불건전함은 오만방자한 호사와 난잡한 향락으로 더불어 그들 신앙의 발작적인 성격을 더욱 가중시켰다...15세기의 제후들과 영주들은 신앙심과 향략의 상상 못 할 혼합을 보여준다...사치와 쾌락을 미친듯이 좋아하고 강신술에 탐닉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독실한 신자여서 수도 생활을 하면서 아침기도회와 하루에 대여섯 번의 미사를 올리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신앙심과 잔인성의 지독한 혼합도 있었다. 몇몇 영주들은 세속 독신자의 전형을 보인다. 

    이같은 착란에서 우리는 위선과 텅빈 편협한 신앙을 보아서는 안되며 오히려 근대적 정신으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정신적인 양극 사이의 긴장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왕국과 대립 상태에 놓인 죄악의 세상이라는 개념 속에 완벽한 이원론이 존재한다. 중세의 정신 속에서는 모든 순수하고 고양된 감정들이 종교 속에 흡수되는 반면 자연스럽고 관능적인 그래서 의식적으로 억압된 제 성향들은 세상에의 죄악된 사랑이라는 차원으로 떨어진다. 중세의 의식 속에서는 이 두 가지 삶의 개념들이 말하자면 나란히 서로 양립하며 형성된다. 경건하고 금욕적인 개념은 모든 윤리적인 감정들을 자신에게로 이끈다. 반면 관능은 악마에게 내맡겨진 채 스스로를 무섭게 벌한다. 이 두 경향 중 어느 하나가 크게 우세할 때 성자나 죄인이 생겨난다. 그러나 대체로 이 두 경향은 저울의 커다란 간격과 함께 불안정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15세기 사람들은 늘 근엄한 신앙에 기괴한 허식에의 애호를 결합시킨다. 장식에의 욕구는 그림, 조각, 금은 세공술 같은 종교예술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정신 생활 그 자체에도 스며든다...이 같은 호화로운 신앙심에서 과장되고 연극적인 겸양의 현시까지는 불과 한 발자국 밖에 되지 않는다...이 같은 이상 속에 15세기는 새로운 시대를 알릴 만한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르네상스 자체도 거기에 달라지게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이상은 대위기 전이나 후나 똑같다. 성스러움과 신비로움은 시간의 흐름 밖에 있다. 반종교개혁시의 성자들의 유형은 중세말의 유형과 동일하며 그들은 또 그 전 세기들의 성자 유형들과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기사도 로망티즘 곁에, 그로써 하나의 기정된 삶의 형태를 이상적으로 표현하려는 욕구를 이해하려면, 성스러움의 로망티즘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특기할 것은 모든 시대에 걸쳐서 이 성스러움의 로망티즘은 종교 의식의 성대함보다는 극단적인 겸양지덕과 금욕주의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교회는 가끔씩 종교 문화를 부흥시키고 순화시킨 위대한 행동가들을 성인품에 올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때고 민중의 상상력은 초자연적이고 극단적인 것에 더 집착하였다. 

     

     

    출처> 중세의 가을 / 호이징가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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