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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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알레고리 The Genius of Victory미.켈.란.젤.로/조 각 scultura 2020. 9. 22. 10:32
서문 / 로맹 롤랑 피렌체 국립 미술관에는 미켈란젤로가 '승리자'라고 부른 대리석상이 있다. 체격이 훌륭하고, 굽실굽실한 머리카락이 나지막한 이마에 덮여있는 나체의 청년이 수염이 덥수룩한 포로의 등을 한 쪽 무릎으로 누르고 우뚝 서 있다. 포로는 몸을 웅크리고 머리만 앞으로 불쑥 내밀고 있다. 그러나 승리자는 그 포로를 내려다보지 않으며, 내려치려던 손도 멈추고, 그 입가에는 쓰디쓴 표정이 감돌고, 눈길을 돌리고 있다. 그는 이미 승리를 원치 않는다. 오히려 싫어진 것이다. 그는 싸워 이겼다. 그러나 또한 진 것이다. 이 '비창한 회의'의 상, 이 '날개 찢겨진 승리'는 미켈란젤로의 전 작품 가운데 오직 하나, 그가 죽을 때까지 아틀리에에 소장했던 것이고, 마음의 벗이었던 다니엘레 다 볼테라의 영구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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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생활에서의 종교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9. 20. 11:39
한 국민의 도덕성은, 신에 대한 의식의 문제, 곧 신이 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믿음을 가지느냐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믿음이 세계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든, 아니면 비참함과 빠른 몰락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든 상관없이 그렇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물론 장소와 사람에 따라서 아주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르네상스 시대와 이 시대의 도시들은 결정적이고 신선한 행복감이 지배하고 있었다. 생각이 전체적으로 어두워지는 것으 16세기에 외국의 지배가 확정되면서 비로소 분명하게 나타난다. 당시 이탈리아의 불신앙은 악명이 높았다. 그 증거를 찾으려 애쓰는 사람들은 증언과 예제들을 어렵지 않게 모을 수 있다. 여기서도 우리의 과제는 분류하고 구별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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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사의 논리 - 바로크이.탈.리.아 문화/인문학 scienze Umanistiche 2020. 9. 19. 09:04
뵐플린은 엄격한 것에서 자유로운 것으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폐쇄적인 형식에서 개방적인 형식으로 나아가는 발전에서 예술사의 전형적인 전개과정을 찾고자 한다. 그는 제정 로마시대, 후기 고딕, 17세기 및 인상주의의 양식사를 서로 평행하는 현상으로 보았다. 그는 이러한 각 시대에는 언제나 객관적인 엄격한 형식을 갖춘 고전주의가 지나고 나면 일종의 바로크, 즉 주관적 감각주의와 다소간은 급진적인 형식 해체가 뒤따랐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러한 두 양식의 양극성을 예술사의 기본 공식으로 생각하였고, 만약 보편사적 법칙성과 역사발전의 주기성이 존재한다면 이 공식이야말로 그런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전형적 양식의 주기적 반복에서 출발해서, 예술사에는 어떤 내면적 논리와 독자적이고도 내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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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의 재평가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18. 11:23
인상주의를 통한 바로크의 재평가 17세기 예술이 총괄적으로 바로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바로크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18세기에는 아직도 그것은 당시의 고전주의적 예술이론의 관점에서 보아 무절제하고 혼란스러우며 기괴하게 느껴졌던 예술 현상에 적용되었다. 거의 19세기 말경까지 지배적이었던 이러한 개념에서 고전주의 자체는 제외되었다.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입장은 물론이고 부르크하르트의 입장까지도 근본적으로는 고전주의적 예술이론의 관점에 의거하고 있다. 즉 그들은 모두 바로크를 무규칙적이고 자의적이라는 이유를 붙여 비난했고, 그것도 바로크 예술가인 니콜라 푸생을 모범으로 간주하는 미학의 이름으로 비난했다. 부르크하르트나 베네데토 크로체 같은 뒷날의 순수주의자들(잡다한 현대적 경향에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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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9. 17. 11:30
다른 어떤 국민보다 이탈리아 국민을 깊이 지배하는 상상력이야말로 모든 종류의 정열이 진행되면서 더욱 격렬해지고 상황에 따라서는 범죄적인 수단까지 동원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었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과격한 허약함과 함께, 이탈리아에서는 힘의 방종을 볼 수 있다. 때때로 그것은 거대한 규모로까지 발전되었다. 범죄는 독특하고 개인적인 밀도를 얻었다. 한계는 아주 드물었다. 불법적이고 폭력에 근거한 경찰국가의 통제에 대해서 누구나, 비천한 국민조차도 내면적으로는 자신이 속박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법의 정의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아무도 믿지 않았다. 살인이 일어나면 더 자세한 상황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보통 살인자 쪽에 동정심을 느꼈다. 처형이 있기 전에 그리고 처형이 처해지는 동안에 남자답고 자부심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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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의 개념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15. 09:01
하나의 미술 양식으로서 매너리즘이 전 유럽에 골고루 퍼져 있던 분열된 생활감정을 반영한 것이라면, 바로크는 본질적으로 좀 더 동질적인 성격을 띠면서도 유럽 각 문화권에서 제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난 세계관의 표현이다. 매너리즘은 비록 그것이 중세의 기독교적 예술보다 훨씬 좁은 범위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고딕과 같은 범유럽적 현상이었다. 이와 달리 바로크는 국가나 문화권에 따라 서로 상이하게 등장하는 다양한 예술 경향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의 공통분모로 묶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궁정적・카톨릭적 그룹의 바로크가 시민적・프로테스탄트적 생활권의 바로크와 판이하게 다르고 베르니니와 루벤스의 예술이 렘브란트와 반 고옌의 예술과 다른 내적・외적 세계를 묘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두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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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토레토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14. 09:26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진정한 후계자는 이러한 범유럽적인 '미켈란젤로적' 마니에리즘이 아니라 이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본질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던 틴토레토(1518-1594)이다. 베네치아는 군주의 궁정을 갖고 있지 않았고 틴토레토는 티치아노처럼 외국의 궁정을 위해 일하지도 않았다. 아니, 베네치아 공화국으로부터 작품 주문을 의뢰받은 것도 그의 만년에 이르러서였다. 그는 궁정이나 국가 대신에 주로 교우회의 일을 맡았다. 그이 예술의 종교적 성격이 주문자의 요구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와 정신적으로 가까운 집단에서 고객을 골랐기 때문인지는 확언하기 힘들다. 아무튼 그가 비록 방식은 다르다 하더라도 미켈란젤로와 비교될 수 있을 정도로 당시의 종교적 재생을 깊게 표현한 이탈리아 유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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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서의 마니에리즘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9. 12. 16:16
주로 1520-30년의 10년 동안에 걸쳤던 피렌체 마니에리즘의 비교적 짧은 제1기는 르네상스의 아카데미즘에 대한 반동이었는바, 이 경향은 16세기 중엽에 절정을 이룬 제2기에 와셔야 브론치노와 바사리를 중심으로 고조・강화되었다. 그러니까 마니에리즘은 르네상스 예술에 대한 하나의 반항으로 시작되었고 이로 인한 예술발전상의 단층을 동시대인들은 완전히 의식하고 있었다. 이미 바사리가 폰토르모에 관해 언급한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과거와의 단절로 생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바사리는 폰토르모가 체르토사 디 발 데마의 벽화에서 뒤러의 양식을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 또래의 사람들 곧 1500~10년에 태어난 세대가 다시 높이 평가하게 된 고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