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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트루리아 Etruria 史 개요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0. 4. 30. 11:10




    에트루리아 인들은 기원전 10세기 빌라노바인 Villanovan - 철기시대 이탈리아 북부지방 종족 - 과 함께 등장했으며
    기원전 396년 테베레 강 유역의 도시 베이오 Veio 침략을 기점으로 시작된 로마의 정복사업과
    문화적 유사성으로 인하여 기원전 1세기말 무렵, 로마문명에 완전히 흡수되어 역사에서 사라진다.














    color
       기원전 750년 에트루리아인들이 분포되어 있던 지역  

    color  기원전 750 - 500 년 확장된 분포지역                           

    ⊙     에트루리아 주요도시들                                

    ●     에트루리아  도시           

                                                   

                     

    에트루리아어로는 Rasenna 혹은 Rasna, 그리스어 Tyrsenoi (Τυρσηνοί, Türsenòi; dorico: Τυρσανοί, Türsanòi)
    둘 다 에트루리아海 Tirreni 를 의미하며, "Etruschi" 는 Τυρσηνίη, Türsenìe  거주민을 칭한다.

    헤로도투스 Herodotus 에 따르면 에트루리아인은 기근을 피해 소아시아 서해안에서 온 리디아인들이었다('역사' 제 1권).
    450년 뒤에 또 다른 그리스 사가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 Dionysius 는 자신의 저서 [고대 로마사]에서
    이들이 이탈리아 본토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최근 유전자 검사에 의하면 헤로도투스의 의견이 맞다고 한다)





    Triclinio의 분묘에서 발견된 프레스코화



    현재까지도 에트루리아인의 확실한 기원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대다수 에트루리아의 소도시들은 새 종족의 침공을 암시할만한 고고학적 유물의 급격한 단절 없이 초기 빌라노바 Villanova 지역이나
    그 근방에 나타난다.
    하지만 타지역의 빌라노바인들의 터에서는 이들과 공통되는 문화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기원전 750년 경에 적지만 의미가 있는 규모의 이민자들이 문화가 한층 발달된 동 지중해를 떠나 에트루리아에 와서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발달된 무기와 기술에 힘입어 지역 빌라노바인들 사이에서 신속히 권력과 지도력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민족의 기원이 어디서 비롯되었든, 에트루리아 문명은 부유한 천연 자원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다.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광물자원이 부의 원천이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농업, 광업, 제조업, 벌목, 상업을 통해 이 자원을 대규모로 확장시켰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정교한 배수터널과 함께 댐을 만들어 습지에서 물을 빼냄으로써 새로운 토지를 확보하고 기존 토지의 부패를 막았다.[1]

    카르타고, 시칠리아, 코르키라, 아테네, 페키니아, 이집트와의 무역은 지중해 세계의 앞선 도시문화들과 긴밀히 접촉하게 하고
    궁극적으로 이탈리아에 화폐경제와 표준주화가 등장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에트루리아에서 발견된 최초의 주화들은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에서 제조한 것이다.
    기원전 480년 이후에 에트루리아 도시들은 각자 자체의 금, 은, 동 주화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Populonia 에서 발굴된 동전




    에트루리아의 무역은 주로 사치품과 고가품으로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무역과 공업 종사 계통이 자본을 모았고, 이것은 상류층 사이에 우아하고 화려한 것에 대한 취향을 자극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동시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과도한 사치로 유명했다.




    에트루리아 시대 테라코타를 선묘화한 이미지





    에트루리아인들은 여러 강력한 국가들을 발달시켰고, 국가들은 각각 부유한 중심 도시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도시를 건설할 때 경제적 이유에서 계곡이나 하천 근방에 건설했고, 군사적인 이유로 방어가 쉬운 산꼭대기에 건설했다.
    성벽은 처음에는 나무나 흙 누벽으로 도시를 요새화했고, 후에는 흙으로 메꾼 돌벽으로 요새화했고 체계적인 계획에 따라 도시를 건측했다.
    에트루리아에 관한 고대의 자료들에 따르면 이들은 전성기에 열 두 도시국가의 동맹을 맺었다고 한다.







    Tarquinia






    Abruzzo 의 에트루스칸 성벽






    초기 에트루리아 도시국가들의 실권은 귀족 족장 위원회가 본인들 중에서 선출하고 지지하는 왕에게 있었다.
    왕은 국가의 상징이고 군사령관이고 종교의 대사제이자 재판관이었다.
    그러나 세습군주도 절대통치자도 아니었다.
    기원전 6-5세기 어느 시점부터는 왕에게서 정치, 군사, 사법의 권력을 박탈하고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이 지배하고 일년 임기의 선출직 행정관들이 수장이 되는 공화정을 수립했다. 국가의 실권은 어느 때나 소수의 지주 가문들의 수중에 있었다.






    Tarquinia 분묘 내부



    회화는 에트루리아 예술의 대표장르는 아니지만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그림들은 타르퀴니아와 카이레의 분묘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그림들은 고대회화의 저장고로서 심지어 이집트를 능가한다.
    질적으로는 그리스 미술이 우위였으나 도자기에 보존된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 에트루리아의 회화작품들이
    그리스와 후기로마의 사이에 유일한 다리를 놓아주기 때문이다.









    에트루리아 사회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고도로 발달한 가정생활과 다소 평등했던 여성의 지위이다.
    남녀관계가 그리스보다 차별이 적고 동료의 성격이 강했으며, 로마인들보다 덜 가부장적, 권위적이었으며
    그들 가정은 아버지와 어머니 간의 법률적, 사회적 평등과 남편과 아내의 상호존중에 기초를 두었다.










    에트루리아의 아내는 자신의 독특한 권리를 지닌 인격체였다.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도 양친의 이름을 모두 반영했다.








    아내의 무덤이 남편의 무덤보다 호화스러운 경우가 많았으며 석관 덮개에는
    아내의 조각상이 남편의 조각상 옆에 만들어졌는데, 품위와 자신감이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에트루리아 여성들이 누리던 이러한 특별한 권리와 자유는 로마의 가정에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로마의 가정에서도 여성이 대다수 그리스 여성들보다 높은 지위를 누렸다.










    에트루리아의 예술은 그들의 가장 두드러지고 항구적인 업적이었다.
    종교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신인동형적인 모습을 띠는 다신교) 예술에 기회와 자극을 주었다.
    에트루리아의 성전 경내는 장식부조들과 그림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이집트의 사후불멸설을 신봉하던 에트루리아인들은 사자들을 위해 정교한 무덤을 만들어 주었고, 무덤 건립과 장식에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죽은 자의 인격을 계속 남겨두려는 욕구가 조각상의 전승을 낳았다.


    에트루리아 예술에는 세 가지 경향이 있다.
    1.  빌라노바인의 경향 - 소박한 기하학적 무늬
    2. 지중해 동부의 경향 - 오리엔트(아시리아, 히타이트, 페르시아, 이집트) 적 주제들
    3. 그리스 - 기원전 6세기 내내 그리스는 에트루리아와 지중해 세계 전체의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티카의 검정색(후에는 붉은색)꽃병이 수입되어, 감탄과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아드리아海 와 포강 삼각주 근처에 위치한 에트루리아 도시 Spina의 도기




    그러나 에트루리아에 지역학교들과 전통이 널리 보급되고 기원전 6세기부터 5세기 초까지 활동한 본토예술가들의 보수적 경향이 확고히 자리를 잡으면서 그리스 영향은 다소 희석되었다.

    다음 세기(기원전 450 - 340년)에는 그리스 영향도, 에트루리아 예술활동의 질도 쇠퇴했다.
    예술의 침체와 동시에 정치, 사회, 경제적 위기가 발생했는데, 이는 아마 로마, 갈리아, 그리스와의 전쟁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탈리아 최초의 건축물은 에트루리아의 것이었고, 이것이 로마 건축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에트루리아의 가옥양식은 지붕이 없는 안뜰을 빙 돌아가며 거실들을 배열하는 로마의 아뜨리움 atrium 의 모델이 되었다.
    로마 신전들은 그리스와는 다른 에트루리아의 신전 디자인으로부터 광범위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에트루리아 건축가들은 아치와 둥근천장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했다.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의 아치와 둥근천장을 채택하여 로마문명과 밀접하게 관계된 위대한 공학 및 건축상의 업적들을 많이 이루어냈다.





    에트루리아 전사의 모습(현대작품)




    기원전 7세기 중엽 에트루리아인들은 본토에 내실이 다져진 상태에서 외부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확장은 주로 더 큰 부와 기회를 확보하기 위해 사병을 동원한 약탈자들과 기업가들에 의해 주도 되었다.
    기원전 7세기에는 에트루리아 왕좌가 로마를 장악하기 까지 했으며 기원전 6세기 초에는 캄파니아에 침입하여 소도시들을 세웠다.
    기원전 540년에 카르타고인들의 지원하에 코르시카 근방에서 페키니아계 그리스인들과의 해전에서 승리하여 그리스인들을 마실리아(마르세이유)
    로 퇴각하도록 만들었다.
    기원전 6세기 후반에는 북방에 살고있던 민족들을 제압하고, 기원전 6세기가 끝날 무렵, 세력은 절정에 달하여 그들의 영향력은 알프스 산맥에서부터 살레르노까지, 동해안에서 서해안까지 뻗혀 있었다.
    에트루리아인들의 배가 양쪽 바다를 누비고, 지중해 서부의 패권을 놓고 그리스, 카르타고 해군들과 접전을 벌였다.















    당시 에트루리아인들이 이탈리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적으로 우수한 무기와 전략 덕분이었다.
    이 무기와 더불어 그리스의 중장보병 밀집대전술을 채택했는데, 훗날 로마인들도 에트루리아로부터 이 전략을 습득하였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확보한 그들의 모든 선점권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안정적인 정치조직과 통일된 군 지휘체계의 부재 -
    에트루리아의 정복은 팽창해가는 통일국가의 응집된 추진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몇몇 호전적인 족장들의 일관성없는 시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이 세운 개별적인 식민도시들은 중앙집권적 정치권력이나 확실한 동맹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업, 문화, 종교적 연대에 의해서 결집되었다.


    기원전 474년 에트루리아인들은 시라쿠사의 히에론 1세와의 해전에서 대패한다.
    그 패전으로 해군은 궤멸되었고, 본토마저 그리스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기원전 5세기, 로마인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던 에트루리아 왕조를 축출하고 베이이를 급습함으로서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기원전 438년 삼니움인들이 캄파니아에서 에트루리아 영향력을 일소해버린다.
    기원전 4세기에 접어 들면서 갈리아인들이 포 강 계곡으로 밀려들어 펠시나(볼로냐 근방)를 차지하고 남쪽으로 진군하여
    에트루리아 본토의 클루시움(키우시)를 공격한다.
    많은 점령지들을 잃은 에트루리아는 기원전 350년 이후에 로마인들과 생존을 위한 전투를 벌였으나, 이미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익히고 발전시킨 단계였고, 이탈리아의 운명은 항구적으로 로마인의 손으로 넘어간다.






    페루지아 비라고 불리우는 에트루리아 비석 -기원전 3-2 세기
    페루지아 고고학박물관 소장








    에트루스칸 스핑크스

    Chiusi (시에나 근방의 도시) 고고학 박물관








    목걸이 메달
    기원전 480년 경




    에트루리아 장신구











    내용 발췌> 로마사 - 프리츠 하이켈하임/세드릭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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