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초기로마사 - 로마형성기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0. 4. 27. 20:45



    이탈리아에는 선사 先史 시대 유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학자들은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를 참고로 해서 대략 다음과 같이 로마의 기원을 추정하고 있다.

    기원전 10세기 경 인도유럽어족의 일파가 북쪽에서 남하하기 시작하여 이탈리아 각지에 정착했는데,
    그 중에 라틴인Latini 이라 불리우던 무리가 이탈리아 반도 중의 서부 연안 라티움 latium 에 정착했다.
    에트루리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이 이미 도시를 형성하고 있던 기원전 8세기까지도
    그들은 서너 군데 군락을 이루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소박한 농경민이었으며,
    손으로 짠 투박한 옷을 입고 조야한 도자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가옥은 보 혹은 장대로 지지한 초가 벽과 지붕을 엮은 원형이나 타원형 나무 오두막 집이었다.

    농지의 면적은 협소했으나 그 안에서 촌락들이 발달하여 훗날 읍이나 도시로 발전했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 알바 롱가 Alba Longa 로서, 라티움의 종교중심지이자 로마의 건설적인 모시 母市 였다.
    기원전 750년 경 라티움 지방의 원시 정착촌들 가운데 팔라티누스 언덕에 들어선 정착촌이 최초의 로마였을 것이다.


    후대 로마인들이 로마 건국일로 받아들인 날짜는 기원전 753년 4월 21일 이다.
    이 날짜는 기원전 1세기 말에 로마의 사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Varro 가 고대 로마에 관한 신화와 전설들을 토대로 도출한 것이었으나
    현대 학자들 또한 (고고학적 발굴에 의거하여)
    그 지역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를 기원전 750년 경으로 보고있다.




     


    팔라티누스 언덕




    신화와 종교 관습, 언어에서 추론할 수 있는 초기 로마의 생계수단은 주로 소와 양이었다.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측한 날로 여겨지는 4월 21일 팔릴리아 Palilia 축제는 마구간과 양우리를 청소하는 날로 기념되었으며,
    농작물과 가축의 다산을 기원하기 위해 원시시대 여신인 지모신 地母神 Tellus 를 기리기 위해 봄에는 수태한 암소를, 초겨울에는 수태한 암퇘지를 제물로 바쳤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들은 가축이동로를 놓고 사비니 산지 주민들과 전투를 벌이다가 협정을 맺고 공존하게 되었으며, 이 공존에 힘입어
    로마인들이 아펜니노산맥의 여름방목지를 사용하고, 사비니인들은 하 테베레 강 유역의 겨울 방목지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서로 통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8세기에 지중해는 상업활동으로 활기를 띄고 있었는데, 로마인들도 곧 그 활동에 참여한다.
    고대 무역 형태에 일어난 변화들은 로마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도록 만들었다.


    "이탈리아 반도는 북국과 남국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북국의 이점과 남국의 이점을 둘 다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이 이점은 상호작용으로 증대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한복판에 자리잡은 로마의 지리적 이점은 유일무이한 것이 된다.  ...신기와도 같은 인간의 지혜가 이렇게 유리한 지세와 온난한 기후의 혜택을 받은 이 땅에 로마인의 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라고 제정로마 초기 건축가 비트루비우스가 말한바 있지만 지리적 이점은 로마의 발전에 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기원전 7세기에 개별적인 촌락에서 발전한 소도시들에서 표준화하고 전문기술을 필요로 하는 제품들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좀 더 규모가 큰 상거래와 막대한 부를 암시한다.
    에스퀼리누스 언덕에 있는 기원전 7세기 중엽의 참호식 무덤에서 갑옷 한벌과 전차 한 대가 발굴되었다.
    기원전 625년 이후에는 에트루리아에서 수입된 금속제품들과 도자기들이 크게 증가했다.



    고고학적 증거들로 볼 때, 기원전 6세기 말경에는 로마 광장의 묘지가 폐쇄되었고, 그 지역에 고인 물이 배수되었으며, 가옥들이 그곳에 들어섰다.
    광장은 그 때까지 포장되지 않았지만 가옥들은 기와지붕에 상당한 크기의 목재로 지어졌다.








    라티움에 최초로 정착한 에트루리아인들은 아마 상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라티움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이곳을 지나는 도로들이 캄파니아의 부유한 시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철기시대에 머물러있던 라티움의 문화 생활에 금속, 점토. 가죽, 양털을 가공하는 기술을 전수했다.
    산지촌락들을 오피다 oppida, 즉 성벽을 갖춘 소도시들, 혹은 요새화한 성채를 갖춘 도시로 바꾸어놓았다.
    그들이 라틴인들에게 목재 골격을 갖춘 가옥을 짓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신전을 지어 에트루리아 양식으로 내부를 장식했으며 종교를 조직화한 제도로 만들어 본격적인 도시 국가를 건설했다. 이런 활동들에 힘입어 기원전 600년 경에는 에트루리아의 제도와 산업과 순수예술이 라티움으로 이전되었다.
    에트루리아의 신분구조가 곧 라티움에도 전래되었다. 상인들과 제후들, 유복한 라틴 가문들은 유산자에 의한 귀족정을 수립하여 여러 라틴 도시들의 경제, 사회 생활을 지배햇다.
    농업은 여전히 인구의 주된 작업이자 생계수단이었고, 라티움은 에트루리아의 지배를 받는 동안 잘 개간되엇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숲과 관목지대를
    개간하고, 소택지에서 물을 빼고, 개선된 농기구와 우월한 경작방법을 도입했고 농작물을 개량했다.
    개량된 농법이 인구증가를 촉진시켰고 인구증가는 다시 농업 발전을 더욱 촉진했다.
    더 많은 농지가 필요해짐에 따라 구릉과 산지가 개간되었는데, 얕은 토양이 비에 쓸려 내려갔다. 이에 영리한 지주들은 저지대와 산지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교한 쿠니쿨리 cuniculi 체계, 즉 바위를 깎아 대략 높이 1.5m  너비 60cm의 배수로를 만들었다.
    이 탁월한 배수체계는 여러 세대 동안 라틴 캄파니아의 농업을 보존시킨다.
    같은 시기에 건설된 배수로 운하인 에미사리아 Emissaria 는 알바 호수와 네미호수의 연안에 정착한 사람들을 위해 호수의 수위를 낮춤으로서
    광활하고 비옥한 농토를 개간시켰다.





    고대 로마시대의 배수로




    전승에 따르면 로마는 건국으로부터 기원전 500년 까지 일곱 왕들의 통치를 받았다.

    처음 네 왕은 라틴인들과 사비니인들로서, 로물루스, 누마 폼필리우스, 호스틸리우스, 앙쿠스 마르키우스였다.

    마지막 세 왕은 에트루리아인들로서,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였다.

    그러므로 기원전 750년 경부터 500년경에 이르는 시기는 일인정, 혹은 왕정시기라고 불린다.








    로물루스 신화가 새겨진 Sextus Pompeius( 137 BC )시기의 동전







    내용 발췌> 로마사 -  프리츠 M. 하이켈하임, 세드릭 A 요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