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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르미지아니노 Parmigianino
    이.탈.리.아 문화/미 술 belle arti 2020. 12. 21. 08:38

     

    지롤라모 프란체스코 마리아 마졸라 Girolamo Francesco Maria Mazzola (1503 Parma – 1540)

     

    Filippo Mazzola와 Donatella Abbati의 여덟 번째 자녀로 파르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Parmigianino가 태어난 지 2 년 후에 전염병으로 사망했고, Vasari에 의하면 소박한 예술가였던 삼촌들 손에서 자랐다고 한다. 1515 년, 그의 삼촌은 San Giovanni Evangelista 예배당 장식 의뢰를 받았는데. 후에 젊은 파르미지아노가 완성하였다. 

     1521 년, 프랑스와 교황 군 사이의 전쟁을 피해 삼촌들은 파르미지아니노를 Viadana 로 피난보냈고, Viadana에서 그는 Frati de 'Zoccoli 교회를 위한 Saint Catherine의 신비로운 결혼을 묘사하는 두 개의 패널을 그렸다. 그는 또한 San Giovanni에서도 일했으며 당시 쿠폴라의 프레스코 작업을 하고 있던 코레지오Correggio와 만나게 된다.

     

     

    Self-portrait in a Convex Mirror, c. 1524

     

     

     

    코레지오가 파르미지아니노의 초기 예술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화가인 것은 분명 하나, 제자는 아니었다고 알려져 있다.

    파르미지아니노는 1522~23년경 2편의 프레스코 연작을 그렸는데, 하나는 파르마에 있는 산 조반니 에반젤리스타 교회의 두 예배당에 그린 것으로 교회의 돔과 펜덴티브의 대형 벽화는 같은 시기에 코레지오가 제작했다. 다른 하나는 파르마 외곽에 있는 폰타넬라토 성의 천장에 그린 〈디아나와 악타이온의 전설 Legend of Diana and Actaeon〉로, 이 작품의 구성은 파르마의 카메라 디 산파올로에 있는 코레조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1

     

     

     

    Legend of Diana and Actaeon, 1523-24

     

     

     

     

      Detail

     

     

    코레지오의 영향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작품은 파르미지아니노의 첫 번째 중요한 작품 〈성녀 카타리나의 신비한 결혼 Mystic Marriage of St. Catherine>이다.

     

     

    Mystic Marriage of Saint Catherine,  c.1527

     

     

     

    위의 그림은 현재 나폴리 (Museo Nazionale di Capodimonte, Naples)에 있는 코레지오의 작품과 같은 주제의 작품으로, 파르미지아니노는 코레지오의 구성을 재해석하여 의식적으로 '인공적인'이미지를 추구했다. 

     

     

     

    Saint Barbara  (c. 1523)

     

     

     

    1524년 그는 볼록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록한 패널에 담은 유명한 자화상을 포함하여 3점의 작품을 가지고 로마로 갔고 이 작품들은 교황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로마에서 제작한 대표적 작품으로는 〈성 히에로니무스의 환상 Vision of St.Jerome〉(1527)이 있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몸매와 얼굴의 이상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점에서 라파엘로의 영향이 보다 지배적이라 할 수 있다. 1



     

    Vision of Saint Jerome, 1526–1527

     

     

     

    〈성 히에로니무스의 환상 Vision of St.Jerome〉은 1526년, Antonio Caccialupi 가족 예배당인 San Salvatore in Lauro의 제단화였다. 

    작품 제작 도중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로마 약탈> 피해가 심각해지자 파르미지아니노는 작업을 중단하고 볼로냐로 피난을 떠났다. 

     

     

     

    Madonna with St.Margaret and Other Saints, c.1529

     

     

     

    파르미지아니노는 3년 동안 볼로냐에 거주하면서 1528년, 그의 걸작 중 하나인 〈성모와 성녀 마르가레트와 여러 성인들 Madonna with St.Margaret and Other Saints〉을 그렸고, 1528 년 후반에는 <장미와 성모Madonna con la Rosa (Dresden)>와 <성모와 성 자카리아 (Uffizi)>를 그렸다.

     

     

     

    Madonna con la Rosa

     

     

    Madonna with Saint Zachariah 

     

     

     

    1531년에 파르미지아니노는 고향 Parma로 돌아왔다.

    파르마에서 남은 생애를 보냈는데, 후기의 주요작품으로는 〈목이 긴 성모 Madonna dal Collo Lungo〉(1534)와 산타 마리아 델라 스테카타 교회의 돔에 그린 프레스코가 있다. 후자의 작품은 거대한 규모의 교회의 장식 계획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그가 제작을 극도로 지체했기 때문에 결국 계약을 어긴 죄로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1

     

     

     

    Madonna with the Long Neck, 1535-40

     

     

     

    <목이 긴 성모>는 매너리즘(manierisme:기교주의) 특유의 형태로, 코레지오풍의 섬세한 명암법을 살리고 빛의 효과를 구사하여 우아하고 세련된 화풍을 이룩하였다. 성모를 우아하고 고상하게 표현하려고 애쓴 나머지 성모의 목을 마치 백조처럼 길쭉하게 그려놓아 작은 타원형 얼굴에 길고 가는 목을 가졌으며 그녀의 손은 부러진 것처럼 맥이 빠지고 그녀의 손가락은 가늘게 뻗어있다. 그녀의 상체는 과장되어 배꼽까지가 얼굴의 세배나 되게 길며, 배꼽 아래의 넓고 긴 아랫배를 상상할 수 있다. 긴 다리에 발은 가늘고 길며, 또한 그녀는 그녀 뒤의 기둥보다 키가 크다. 그녀의 왼쪽 허벅지와 다리는 그녀의 엉덩이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 것처럼 보여 몸에 붙어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또한 인물들을 성모의 양쪽에 균등하게 배치하는 대신에 붐비는 천사들을 비좁은 왼쪽 구석에 몰아놓고, 오른쪽에는 괴상한 모양의 원주와 너무 작아서 성모의 무릎에도 못 미치는 예언자를 배치하여 넓게 터놓고 있다. 

    이 작품을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기교적이라고 폄하할 수도 괴상한 취미를 가진 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완벽한 조화에 관한 고전적인 해결 방식만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매우 일관된 방식을 사용하여 전통적 수법을 애써 피하고 있다. 

    출처>cafe.daum.net/philrand/MfR2/553?q=파르미지아니노

     

     

     

     

    Portrait of Galeazzo Sanvitale, 1524

     

     

     

    파르미자니노는 16세기에 베네치아 밖에서는 가장 잘 알려진 초상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잔 갈레아초 산비탈레 Gian Galeazzo Sanvitale〉(1524)·〈안테아 Antea〉(1535경~37) 등 젊은 여성을 그린 뛰어난 초상화 중 몇 점이 현재 나폴리의 카포디몬테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양식은 가늘고 우아한 형태와 뛰어난 기교로 가장 화려하고 널리 알려진 마니에리스모 양식의 하나였다. 그것은 전성기 르네상스 고유의 자연주의 원칙을 약화시키고 라파엘로의 후기 양식을 극도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1




     

    Antea, 1525

     

     

     

    그의 작품의 특징은 모호한 공간적 구조와 길게 변형시킨 인물 형태, 그리고 자연미를 초월하는 율동적·감각적인 아름다움으로써, 특히 가느다란 형태를 통한 우아미의 추구는 회화에서뿐만 아니라 많은 데생에서도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처음으로 에칭을 사용한 이탈리아 화가의 한 사람으로 주로 수요가 많은 자신의 드로잉을 복제하기 위해 에칭을 제작했다. 1



     

     

    Portrait of a Man, 1530

     

     

     

    파르미지아니노는 1540년 8월 24일 37 세의 나이에 열병으로 사망했다.

     

     

     

    Boy with a Finger in His Mouth, 1530

     

     

     

    Turkish Slave, 1533

     

     

     

     

    Cupid Making His Bow , c. 1533–1535

     

     

     

    Lucretia, 1540

     

     

     



    파르미지아니노처럼 르네상스 시대가 끝나갈 무렵의 화가들은 이렇게 주관적이고 감상적인 눈에 의해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는 회화사에서 개인의 기교와 개성이 마음껏 발휘되는 해방의 시기였다. 절대적 정신 가치였던 신권이 붕괴되어가는 정신적 위기 상황에서 미술가들은 중세미술의 신성불가침 한 전형적 규범, 전성기 르네상스 미술의 균형 잡힌 절제미 따위의 짐을 벗어던졌다. 이전의 거장들이 공들여 만든 조화와 균형과 이상적 자연미 구현이라는 절대가치는 독창적 착상과 상상력, 장식적 우아함, 자의식이 강한 기교에게 그 자리를 내주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미술가들은 통일된 양식을 만들기보다 개개인의 특성을 극대화시켰으며 틴토레토(Tintoretto, 1518∼94)와 같은 화가는 대각선이나 중심점이 존재하지 않는 불안정한 구도를 통해 극적인 효과를 표현하고자 했고, 브론치노(Bronzino, 1503∼72)는 원근법이 적용되지 않은 얕은 화면 위에 몸을 꼬거나 비튼 인물들로 신화나 전설을 우아하고 관능적으로 표현하는데 몰두했다. 그리고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는 자연적 색채를 무시하고 모호한 윤곽과 평면적 구도로 감성적이고 환상적 분위기의 종교화와 초상화를 남겼다. 이들이 재현한 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의 아름다움이었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무엇인가 새롭고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것을 창조하고자 모색한 이 작품은 인습적인 아름다움과는 다른 어떤 효과를 이룩하고자 하는 욕망에 근본을 둔 오늘날 현대 미술과 맥을 같이 하는 매우 '현대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출처>http://cafe.daum.net/philrand/MfR2/553?q=파르미지아니노



     

     

     

    내용 출처>

    1  [Daum백과] 파르미자니노  다음백과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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