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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디치가의 예술보호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3. 20. 10:11

     

    도시공화국의 돈 있고 명망있는 시민들은 일상생활 태도에서는 남의 이목을 고려하여 어느 정도 자제력을 발휘했으나, 적어도 그들 사후의 명성만큼은 확실하게 남겨두고자 하였다. 공적인 비판을 불러일으키지않고 영원한 명성을 획득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교회에 헌납하는 것이었다. 15세기 전반부에 아직도 나타나고 있는 종교적인 예술생산과 비종교적인 예술생산의 불균형은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사실에 의하여 해명될 수 있다. 종교적 경건성 자체는 더이상 미술품을 헌납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지 못한다. 까스텔로 쿠아라테지는 산타 크로체 사원의 정면 벽을 기증할 생각이었으나 사람들이 그의 문장을 표시하는 것을 거부하자 그 계획 자체에서 손을 뗀다. 메디치가조차도 그들이 후원하는 예술작품에 종교적 교회적 색채를 부여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코시모 메디치는 자신의 사적인 미술품 제작의 비용을 자랑하기 보다 오히려 숨기려고 했다. 메디치가 이외에도 파찌, 브란카치, 바르디, 사세티, 토르나부오니, 스트로치, 루첼라이 등의 가문이 예배당 건립과 장식을 통해 그 이름을 영원히 남기고 있다. 그들은 이 일을 위해 당대의 가장 뛰어난 예술가들을 기용하였다. 파치가의 예배당은 브루넬레스키가 건립하였고, 브란카치가, 사세티가, 토르나부오니가, 스트로치가의 예배당들은 당대의 유명한 화가인 마사치오, 발도비네티, 길란다이오와 필리포 리피가 각각 꾸몄다. 이와같이 당시의 많은 예술후원자 중에서 과연 메디치가가 가장 희생적이고 예술을 가장 잘 이해했는가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다만 확실한 것은 메디치가의 유명한 두 사람 중에서 코시모가 로렌조보다 더 견실하고 원만한 취미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아니면 이것도 단지 그의 시대가 좀더 안정되고, 균형잡혀 있었기 때문인가? 아무튼 코시모는 도나텔로, 브루넬레스키, 기베르티, 미켈로초, 프라 안젤리코, 루카 델라 로비아, 베노초 고촐리, 필리포 리피 등 당대의 쟁쟁한 예술가들을 기용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가인 도나텔로는 코시모보다는 오히려 로베르토 마르텔리를 자신의 예술을 더 알아주고 아껴주는 친구요 패트런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코시모가 도나텔로의 예술가로서의 진가를 충분히 이내하고 인정하였다면 도나텔로는 무엇때문에 그처럼 여러차례 피렌체를 떠났을 것인가! 코시모는 도나텔로와 그밖의 모든 화가와 조각가들의 위대한 친구였다.고 베스파치아노 비스티치는 그의 회고록에서 기술하고 있지만 뒤이어 그는 "코시모는 화가와 조각가들이 일거리가 없어 보이고 도나텔로가 하는 일 없이 지내는 것이 딱하게 여겨지자 그에게 산 로렌조 성당에 있는 설교단과 성구실의 문 만드는 일을 시켰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같은 예술의 황금기 시대에 도나텔로같은 예술가가 어째서 일 없이 지내야 하는 위험이 따랐고, 어째서 동정을 받는 식으로 일거리를 얻어야만 했던 것일까?

     

    Basilica di San Lorenzo, the Pulpito della Passione (Pulpit of the Passion) in bronze by Donat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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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corazione della Sacrestia Vecchia di San Lorenzo by Donatello

     

    로렌조 메디치의 예술이해를 옳게 평가한다는 것은 코시모 메디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니 오히려 더 힘든 일이다. 우리는 로렌조 주위에 있던 예술가의 높은 수준과 재능의 다양성을 로렌조 자신의 공적으로 돌리고, 그가 장려, 보호했던 시인이나 철학자가 표현하고 있는 강렬한 생활 감정도 로렌조 자신의 인격에서 나와 파급된 것이라는 생각에 익숙해졌다. 일찍이 볼테르가 말했듯이 로렌조의 시대는 페리클레스 시대, 아우구스투스의 시대, 루이 14세의 이른바 '위대한 세기 gran siècle' 등과 더불어 인류의 행복했던 시대의 하나로 간주된다. 로렌조는 시인이고 철학자였으며, 미술수집가이자 세계 최초로 생긴 미술 아카데미의 설립자였다. 우리는 또한 그의 생애에서 신플라톤주의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으며, 이 철학적 사조 역시 그에 의하여 직접 장려, 발달되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밖에도 그가 자기 주위에 있던 예술가들과 가졌던 동지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세세한 일화들도 널리 알려져 있다. 베로키오는 그를 위해 고대 유물을 복원했고, 줄리아노 다 산갈로는 빌라다 카이아노와 산토 스피리토 사원의 성구실을 만들었으며, 그는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를 자주 기용했고 보티첼리와 필리포 리피 역시 그와 매우 가까운 친구였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단에서 빠져 있는 예술가의 이름도 한 번 생각해 보자. 로렌조 메디치는 스트로치 성을 만든 베네데토 다 마이아노나 그의 재임기간 중 여러 해 동안 피렌체에 체류했던 페루지노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도나텔로 이후 최대의 예술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도 작품을 의뢰하지 않았다. 다 빈치는 피렌체에서 예술가로서의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밀라노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다 빈치가 실플라톤주의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로렌조의 무관심을 설명해주는 지도 모른다.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의 관념론처럼 현실세계에 대한 순수한 관조적 태도를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순수한 관념을 규범적 원리로 간주하고 이 관념세계에 준해서만 현실세계를 대하는 모든 철학이 그렇듯이, 그것은 '비속한' 현실세계의 일에 관여하는 것을 거부하는 생활태도의 표현이었다. 요컨대 신플라톤주의는 현실세계의 운명은 현실세계를 실제로 관장하는 실권자들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진정한 철학자는 피치노가 주장하듯이 유한한 현실세계에 대해서 죽음으로써 초시간적인 이념세계 속에 살려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적 자유의 마지막 자취까지도 말살하고 일체의 정치적 참여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던 로렌조와 같은 지배자에게 이러한 철학이 마음에 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어쨌든 언제나 쉽사리 시적인 말로 변형할 수 있고 아무렇게나 해석될 수 있는 플라톤 철학은 그의 취향에도 꼭 맞았을 것이다. 

    예술보호가로서 로렌조 메디치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베르톨도와의 관계이다. 품격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별로 뛰어나지 않았던 이 소품 조각가는 동시대 예술가 중에서 로렌조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다. 그는 로렌조와 한 집에 살았고, 매일같이 식탁을 같이하고 여행할 때도 동반했으며, 그의 신임자요 예술문제의 자문이자 로렌조가 세운 미술 아카데미의 지도자였다. 그는 유머와 요령이 있고, 임기웅변의 재주가 있었으며, 주인과 친숙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훌륭한 교양의 소유자였고 패트런의 예술적인 견해나 희망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공감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훌륭한 인격자이면서도 자신을 기꺼이 윗사람에게 종속시킬 줄 아는, 한마디로 궁정예술가의 이상형이었다. 작업중의 베르톨도가 "복잡하고 이상하며 때로는 진부하기도 한 알레고리나 고대의 신화를 하나씩 고안해내는 일"을 옆에 와서 가끔 조언해주면서 인문주의자로서의 자신의 박식과 신화적 몽상과 시적 공상들이 즉석에서 구체화되는 것을 보는 것이 로렌조 메디치에게는 큰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재료를 유연하며 오래 가는 상품 청동에 국한시키고 소규모의 장식적이며 우아한 구도의 형식을 택하는 베르톨도의 스타일 자체가 아마도 로렌조의 예술관에 가장 부합했을 것이다. 로렌조가 특히 소공예품을 좋아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가 소장했던 작품 중 피렌체 조각의 대작은 매우 적다. 로렌조 수집품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5천 내지 6천개로 추정된느 조각 또는 부조가 있는 보석류이다. 이 장르는 고대부터 있어왔던 것으로 그래서 로렌조는 이를 더욱 좋아했다. 베르톨도의 예술을 사랑한 것도 그가 고대예술의 기술과 고대적 소재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미술 수집가. 예술보호자로서의 로렌조의 활동은 한마디로 스케일이 큰 영주의 도락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의 수집품이 여러 측명에서 아직도 한 영주의 골동창고 성격을 띠는 것이었듯이, 그의 일반적인 예술적 취향, 즉 장식적인 것과 값비싼 것, 유희적인 것과 기예적인 것에 대한 취향 역시 소군주국 영주들의 로코코적 예술취향과 많은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 것이었다. 

     

    Bellerophon Taming Pegasus  (c. 1480–82), designed by Bertoldo di Giovanni, executed by Adriano Fiorentino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야후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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