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길드의 예술활동과 수집가들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3. 17. 08:20

     

    이탈리아에서는 길드의 예술활동은 다른 유럽 국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신들의 예배당이나 길드 회관의 건축과 장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치도시인들이 함께 쓰는 교회 건물의 설립같은 사업에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예술적 사업이 처음부터 길드의 권한에 속해 있기는 했으나 다른 여러 집단들의 정치적, 경제적 영량력이 상실되어감에 비례해서 길드가 담당하는 문화사업의 규모도 점차 커졌다. 그러나 자치도시 자체가 개인 자산의 관리자였듯이 대부분의 경우 길드도 자치도시의 전문가들 혹은 그 통제기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길드 그 자체가 결코 건축주가 될 수 없었을뿐더러 그들이 직접 기획 설립한 건축물의 정신적 창조자라는 명예를 누릴 수도 없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대체로 건축물을 지을 돈을 관리하거나, 돈이 모자랄 때 빚을 얻는다든가 조합원의 명예로운 의무로 설정된 성금을 거두어 보충해나가는 일이었다. 길드는 그들에게 맡겨진 사업을 기획, 감독하기 위해 조합원 자체에서 건축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이 건축위원회는 사업의 종류에 따라 4명 내지 12명의 오페라이operai 라고 불리는 구성원에 의하여 조직되었다. 이 위원회가 하는 일은 주로 공개입찰을 공고하고, 예술가들에게 각각 담당할 일을 위탁하고, 계획서를 검토하며, 공사를 감리하고 재료를 조달하며, 임금이 제때에 지불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이 벌이고 있는 건축사업을 예술적, 기술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특별한 전문지식이 요구될 때는 전문가들을 불러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피렌체의 아르떼 델라 라나(모직물 제조인 조합)가 피렌체 대성당과 종탑, 칼리말라 길드 (모직물 상인 조합)이 피렌체 세례당과 산 미니아토 교회를 , 아르테 델라 세타(견직물 조합)가 기아원 건물의 설립을 지도, 감독한 것은 모두 그러한 활동범위 안에서였다. 

     

    Guilds dominated local politics and influenced national and international affairs

     

     

    이들 사업이 어떻게 자유경쟁의 원칙에 의해 이루어졌던가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은 피렌체 세례당의 청동문이 만들어진 경위이다. 1401년 칼리말라 길드는 이 문을 만들기 위해 공개입찰을 고시했다. 이 공개입찰에 응시한 경쟁자 중에서 마지막 심사에 오른 것은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 이아코포 델라 꿰르치아를 포함한 여섯 명의 예술가였다. 그들에게 일년의 시간적 여유를 주고 청동부조를 하나씩 제작하도록 했다. 오늘날까지 보존되어온 작품들의 주제가 비슷한 점으로 미루어 그들이 만든 청동부조의 내용이 매우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 일을 하는 시험기간 동안 예술가의 제작비와 생활비는 칼리말라 길드가 부담했다. 1년 후에 드디어 그들이 작품을 제출하자 이를 최종적으로 심사, 결정하기 위해서 무려 34명이라는, 당대의 유명한 예술가로 구성된 심사위원회를 길드가 지명했던 것이다. 

     

    Gates of Paradise by Lorenzo Ghiberti at the Baptistery, Florence, Italy

     

    시민계급은 처음에는 주로 교회나 사원에 헌납하기 위해 예술품을 주문했다. 그러나 15세기 중엽에 이르면서부터 그들은 사적인 목적을 위하여 세속적인 성격을 띤 예술품을 대량으로 주문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영주나 귀족의 성이나 저택뿐만 아니라 돈 많은 시민의 집들까지 회화와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할보다 더 크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예술활동을 통하여 그들 자신을 기념하고 빛내보고자 하는, 즉 그들 자을 과시하려는 소망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소망은 교회적, 종교적 예술작품을 헌납할 때도 그대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스토로치, 꽈라테지, 루첼라이 같은 유명 가문들이 이제 자기네 예배당보다 저택을 짓는데 더 관심을 기울이면서부터는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오반니 루첼라이는 이와같이 세속적, 현실적인 예술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새로운 유형의 건축주 중에서 아마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그는 양모공업으로 부자가 된 도시귀족 출신인데, 로렌조 시대에 이르러 사업에서는 손을 떼고 인생을 향락하는 데 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세대에 속했던 사람이다. 그는 당시 세태에 대한 유명한 기록 가운데 하나인 그의 자전적 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50년 동안 돈을 벌고 쓰는 데에만 몰두해왔다. 이제 와서 나에게 명백한 사실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돈을 버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나에게 더 많은 만족과 희열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이다"

     

     

    Firenze Palazzo Rucellai by Leon Battista Alberti 1446 and 1451

     

    그는 계속해서 그가 후원해서 건립한 교회건축에 대해 언급하면서 예술후원가로서의 이러한 행위가 그에게 가장 큰 만족감을 주었는데 그 이유는 교회 건축이 신의 영광과 도시의 영예를 높여주었을뿐더러 자기 자신의 기념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지오반니 루첼라이는 이미 예술의 헌납자요 건축주일 뿐만 아니라 수집가이기도 했다. 그는 카스타뇨, 우첼로, 도메니코 베네치아노,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 베로키오, 데지데리오 다 세티냐노 등의 작품을 수집, 소장했다. 예술애호가들이 헌납자에서 수집가로 발전하는 과정을 가장 잘 추적할 수 있는 예는 메디치가이다. 코시모 메디치는 아직도 무엇보다 산 마르코, 산타 크로체, 산 로렌조 등의 성당과 피에졸레의 바디아 성당을 건립한 예술후원가였지만, 그의 아들 피에로 메디치는 이미 미술품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드디어 로렌조 메디치는 본격적인 미술품 수집가가 되었던 것이다. 

    헌납자에서 수집가로

    이러한 수집가의 등장과 주문자로부터 독립해서 작품활동을 하는 예술가의 출현은 역사적으로 서로 상관관계에 있다. 르네상스의 역사에서 이 두 요소, 즉 수집가와 독립적인 예술가는 거의 동시에 나란히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런 변화는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완만한 발전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르네상스 초기에는 아직도 대부분의 예술품이 주문에 의해서 수공업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예술품의 제작은 예술가 자신의 창작충동, 즉 예술가의 주관적인 표현의지나 자발적인 착상이 아니라 주문하는 사람에 의해 이미 규정된 과제를 수행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미술시장은 아직 공급이 아니라 수요에 의해 결정되고 있었다. 제작된 일체의 미술품은 처음부터 그 사용가치가 규정되어 있었고, 실생활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사람들은 제단화를 주문할 때도 화가가 잘 알고 있는 어느 특정한 예배당에 맞게 그려달라고 요구했고, 기도상이나 초상화들도 어느 공간, 벽을 위해 그려달라는 식이었다. 조각품들도 처음부터 특정 장소를 위해 계획되었고, 심지어 중요한 가구들까지도 어떤 내부 공간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었다. 오늘날과 같이 예술적 자유를 누리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당시의 예술가들이 꼭 지켜야 했고 또 지킬 수 있었던 이러한 외부적인 구속이나 강제성이 예술을 위해 좋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하나의 교조처럼 믿어진다. 또한 그들이 이루어놓은 결과를 보면 이런 생각이 충분히 근거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의 예술가들은 견해를 달리했다. 즉 그들은 미술시장의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가능한 한 그들에게 부과된 외부적 제약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까지의 단순한 미술품 수요자 대신에 미술품 애호가, 전문감식가, 수집가 즉 종전처럼 필요에 의해서 미술품을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나와 있는 것을 구입하는 현대적 의미의 미술고객이 등장하면서 조성되었다. 이러한 유형의 새로운 예술애호가층이 미술시장에 출현함으로써 주문자 및 구매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던 종래의 예술제작 방식은 종말을 맞고 작품의 자유로운 제작, 공급에는 지금까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기회가 보장되게 되었다. 

    고대 이후 우리가 상당한 양의 비종교적인 미술품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는 1400년대의 예술이 최초의 것이다. 이러한 세속적인 미술품으로는 세속적인 내용을 담은 벽화와 회화, 그림무늬의 타피스트리, 자수, 금세공, 문장과 같이 예부터 알려진 장르 말고도 르세상스에 와서 처음 등장한 새로운 미술품들, 그중에도 장중한 궁정적 양식 대신에 아늑함과 친근미를 강조하는 상층 시민계급의 새로운 주택문화의 소산들을 들어야 할 것이다. 풍부하게 장식한 붙박이장의 목재 벽판, 그림과 조각이 있는 장롱, 화려하게 만들어진 침대, 둥근 틀에 넣어진 가정 예배용 그림tondo, 그밖에 마욜리카 도자기와 수많은 공예품 등은 이런 주택문화와 결부되어 제작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의 공통 특징은 예술과 공예, 순수한 예술품과 단순한 공예품 사이에 거의 구분할 수 없는 동질성이 압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질성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은 고도로 무목적적이고 비실용적인 예술의 독자성이 점차 인식되고, 그 독자성이 공예품의 기계적 성격과 대조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서서히 미술가와 공예가가 동일인이던 상황은 변화하고 화가는 지금까지 농이나 벽관, 깃대나 항아리에 그림을 그릴 때와는 다른 의식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주문자의 희망에 구속되지 않고 고객을 위한 생산에서 상품생산으로 전환했다. 이러한 전환이 예술애호가, 전문감상자, 수집가의 등장을 위한 예술가측에서의 선결 조건이었다. 수요자측에서의 전제조건은 형식주의적, 비실용주의적인 예술관, 즉 아직 소박한 형태이기는 하나 그래도 이미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관이다. 수집가의 등장에 뒤이어 곧 나타나는 현상이며 미술 작품 및 작가 에 대한 구매자의 비인격적인 관계와 더불어 비로소 가능해지는 현상이 화상의 출현이다. 1400년대에는 체계적인 미술품 수집은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술품 제작과 관계없이 순전히 매매만 위주로 하는 화상은 생겨나지 않았다. 그러한 화상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6세기에 이르러서인데, 이때부터 과거의 미술품에 대한 정규적인 수요와 생존하는 작가의 작품 구매가 행해지기 시작했다.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미술상은 Giovanni Battista della Palla이다. 그는 자기 고향 피렌체에서 프랑스 왕을 위해 미술품을 주문, 구매해서 조달했는데, 이대 그는 이미 예술가들에게서 직접 살 뿐만 아니라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예술품까지 구입했다. 얼마 후 부터는 순전히 상업적, 투기적 목적으로 그림을 주문하는 경우도 빈번해졌다.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