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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주의를 촉진시킨 사람들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3. 11. 09:54

     

    시민 계급의 인문주의

    여기서는 우선 주로 피렌체에서 고대 탐구를 자기들의 삶의 주요 목표로 삼고서, 일부는 스스로 위대한 학자가 되었고, 일부는 학자들을 후원한 위대한 딜레탕트가 되었던 시민 계급 사람들을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15세기 초 르네상스의 과도기에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서 처음으로 인문주의가 실질적으로 일상 생활에 꼭 필요한 요소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뒤를 따라서 영주들과 교황들이 진지하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니콜로 니콜리와 잔노쪼 마네티는 이미 앞에서 여러 번이나 언급되었다. 베스파시아노는 니콜로 니콜리를 가리켜 외적인 환경에서도 고대의 분위기를 해치는 것은 그 무엇도 참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서술하였다. 잔노쪼 마네티는 좀 다른, 높은 의미에서 고대를 대표하였다. 학문을 통해서만 인간은 불멸성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피렌체 공직을 행하면서도 그는 마치 높은 이상이 일깨워진 것 처럼 직무를 수행했다. 인문주의 연구와 종교성이 합쳐진 방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노력에 대해 봉급을 받지 않았으며, 여가 시간에는 도시의 역사를 집필하였다. 

    로렌조 메디치

    15세기의 메디치 가문 사람들, 특히 코시모와 로렌조 일 마니피코 등이 피렌체와 자기들의 동시대 사람들에게 영향을 분석하고자 한다면 정치말고도 당시 교양의 영역에서 그들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가장 강력한 원인이 될 것이다. 코시모는 상인이자 지역의 파벌 지도자라는 지위에 있으면서 그 밖에도 생각하고 탐구하고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을 자기 편으로 삼았다. 코시모는 플라톤 철학이 고대 사유 세계의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자신의 주변 세계를 이 인식으로 가득 채웠고 인문주의 안에서도 고대의 재탄생을 촉진시켰다는 특별한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플라톤주의와 관련해서는 저 위대한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코시모의 정신적인 아들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피에트로 메디치가 통치하던 시절에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한 학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피에트로의 아들이자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조도 소요학파를 떠나 그에게로 넘어왔다. 그의 가장 유명한 동급생들은 다음과 같다. 바르톨로메오 바롤리, 도나토 아치아유올리, 피에르필리포 판돌피니 등이다. 

    로렌조 주변에 몰려들었던 유명한 학자들의 모임은 이상주의적인 철학의 더 높은 특성을 통해서 결합된 것이었고, 이러한 종류의 다른 모임들보다 탁월했다. 다만 이 모임에서는 피코 델라 미란돌라 같은 사람이나 행복을 느낄만 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아름다운 점을 말하자면, 이 모든 고대 숭배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이탈리아 문학의 성지였으며, 로렌조의 개성이 나타나고 있는 온갖 빛들 중에서 이 빛이야 말로 가장 강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가 로렌조에 대해서는 각자 좋을 대로 판단할 일이다...그는 만능은 아니었지만 정신을 보호하고 진작시키려고 애썼던 모든 위대한 인물 중에서는 가장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 중의 하나였고, 그의 경우 이것은 아마도 더욱 깊은 내면의 욕구에서 나온 것이었다. 

     

    Michelangelo Showing Lorenzo il Magnifico the Head of a Faun,Ottavio Vannini,1638-42,  Palazzo Pitti

     

    현재 우리 세기(19세기)는 교양의 가치와 고대의 가치를 아주 큰 소리를 내며 옹호하곤 한다. 그러나 15세기와 16세기 초 피렌체 사람들의 경우처럼 완전히 열광적인 헌신과 교양의 욕구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곳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탈리아에는 피렌체말고도 개별적인 그룹들과 사회 전체가 한동안 온갖 비용을 다 들여가면서 인문주의를 탐색하고 학자들을 후원한 도시들이 여러 곳 있었다. 그 시대의 편지 모음에서 이런 종류의 개인적인 관계들을 넉넉하게 찾아볼 수 있다. 

    영주 궁정에서의 인문주의

    전제군주가 자신의 개성과 재능에만 의지하는 문헌학자와 내적으로 동종이라는 사실은 앞에서도 이미 암시하였다. 문헌학자들은 분명하게 자유도시보다는 전제군주의 궁정을 선택하였다. 보수가 더 높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랬다. 아라곤의 위대한 알폰소가 이탈리아 전체의 지배자가 될 것처럼 보이던 시기에 에네아스 실비우스는 다른 시에나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써보냈다. "그의 지배 아래서 이탈리아가 평화를 누린다면 내게는 도시 지배보다 더 낫겠습니다. 고귀한 왕의 기질은 탁월함에 대해서 넉넉하게 보상을 해주니까요" 전에는 인문주의를 찬양하느라 영주 들에게 지나치게 후한 점수를 주었다가, 최근에는 이 점에서도 점잖지 못한 측면, 즉 돈에 팔린 아첨이라는 점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다. 모든 것을 고려해보면 영주들이 자기 시대 자기 나라 교양의 선두에 서야 한다고 믿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그들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증언이다. 특히 교황들의 경우 니콜라우스 5세는 학자 수천 명이 교회의 편에 도움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운명에 대해서 태연자약하였다. 피우스 2세의 경우 학문을 위한 희생은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다만 그 자신은 개인적으로 니콜라우스보다는 그래도 훨씬 더 학자 공화국의 지휘관으로 적합했다. 그리고 극히 편안하게 이런 평판을 누렸다. 파울루스 2세가 비로소 비서들의 인문주의에 대해서 두려움과 불신을 느꼈다. 그의 후임인 세 사람, 즉 식수투스, 인노켄티우스, 알렉산더 등은 헌사를 즐겨 받아들였고 사람들이 원하는 한 시를 짓도록 내버려 두었지만 다른 일들에 너무나 열중해서, 그리고 권력의 근거를 다른 곳에서 찾고 있었으므로 문인, 문헌학자와 많은 교류를 하지 못했다. 율리우스 2세는 그 자신이 문학의 중요한 대상이었으므로 시인들을 얻기는 하였으나 그들을 잘 보살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의 뒤를 이어 레오 10세가 "로물루스의 뒤를 이어 누마가 오듯이" 나타났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은 전투를 직접 지휘하던 호전적인 교황의 다음으로 뮤즈에 온전히 헌신하는 교황을 기대하게 된 것이다. 아름다운 라틴어 산문과 시문들을 즐기는 것은 레오의 인생 프로그램에 들어있는 일이었다. 그런만큼 그의 문학 후원도 어울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그가 후원한 라틴어 시인들은 수많은 비가 송가, 잠언시, 담화 등에서 레오 시대의 저 즐겁고도 빛나는 정신을 조형적인 방식으로 드러내 보여 주었다...대략 1520년 이후로 이탈리아 인문주의가 유럽에 미친 작용은 어느 정도 레오에게서 나온 추진력에 힘입은 것이다. 그는 새로 얻은 타키투스를 위한 인쇄 특허를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자격이 있는 교황이었다. "위대한 작가들은 삶의 규범이요, 불행에서의 위안이다. 학자들을 격려하고 훌륭한 책들을 얻는 일을 나는 이전부터 최고의 목표로 여겨왔다. 그리고 이제 나는 이 책을 후원함으로써 인류의 이익을 촉진시킬 수 있게 된 것을 하늘에 감사드린다"

     

    Pope Leo X, 1475-1521

     

    15세기의 세속 군주들 가운데 나폴리 왕이었던 아라곤의 알폰소는 고대에 대해서 가장 열렬한 열광을 보여주었다. 그는 아주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탈리아에 도착한 이후로 접하게 된 기념물과 책들 속에 있는 고대 세계로부터 아주 압도적인 인상을 방아 그것을 모방하여 살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쉽게, 반항적인 아라곤과 부속 영토를 동생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오로지 새로운 땅에만 헌시하였다. 그는 게오르기우스 트라페쭌티우스, 크리솔로라스, 로렌조 발라, 바르톨로메오 파지오, 안토니오 파노르미타 등을 차례로 혹은 동시에 고용하였다. 그들은 그의 궁정 역사가들이 되었다. 안토니오 파노르미타는 그와 그의 신하들을 위해서 매일 리비우스를 설명해주어야 했다. 전쟁 중 진영에서도 그랬다. 이사람들을 부양하는 데 왕은 연 금화 2만 굴덴 이상을 소비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장소는 나폴리성의 도서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전망이 아름다운 창가에 앉아 현자들이 삼위일체설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듣곤 했다. 

     

    ALFONSO V, EL MAGNÁNIMO 위대한 알폰소

     

    우르비노의 페데리고는 알폰소와는 비할 수 없이 학구적이엇다. 그는 그리스 책 번역과 상당수의 중요한 주석, 개정 작업 등은 그 자신과 니콜라우스 5세를 위해 행해진 것이었다. 우르비노에는 시인 궁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영주 자신이 가장 학문을 많이 쌓은 사람이었다. 완벽한 영주, 지휘관, 인간으로서 그는 당시 학문의 대부분을 통달하였고, 그것도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학문 자체를 익혔다. 시인이 아니라 역사가들을 "그는 언제나 읽었고, 낭독을 들었다"

    스포르짜 가문 사람들도 어느 정도 학자였고, 예술가를 후원했다. 프란체스코 공작은 자식 교육을 하면서 정치적인 이유만 보더라도 인문주의 교육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영주가 가장 교양이 높은 사람들과 동급 차원에서 교류할 수 있다면 이로운 일이라고 여겼다. 그 자신이 탁월한 라틴어 문인이었던 로도비코 일 모로는 고대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 모든 정신적인 일에 관심을 보였다. 

    군소 영주들도 비슷한 이점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학자들과의 교류, 고대에 대한 관심, 우아한 라틴어 서간문에 대한 욕구 등은 당시 영주 계급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로마냐의 가장 작은 전제군주들도 한두 명의 인문주의자 없이는 궁정살림을 꾸려갈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뻔뻔스러운 이교도에, 용병대장이었던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1417~1468)까지도 상당수의 문헌학자들을 주변에 드었고 넉넉한 보상을 해주었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야후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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