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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운 형식의 출현 - 프랑스의 인문주의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15. 19:42

     요한 호이징가(하위징아)Johan Huiginga 1872-1945

     

    새로 탄생하는 인문주의humanisme와 중세 조락기간의 관계는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인문주의를 중세에 대립시키는 데 익숙해 있는 우리는 이성고 고대적 아름다움에의 열망과 닳아빠진 낡은 사고 체계와 중세적 표현의 포기를 마치 돌연한 계시처럼 갑작스러운 산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알레고리들과 플랑보아양flamboyant 양식에 식상한 정신들은 돌연 그것을 거부했을 것이고, 고전의 조화로움이 그들에게는 구원의 메시지인 양 제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길을 발견한 사람들의 열정으로 고대에 매달렸으리라는 것이다. 

     

    Flamboyant clothes
    Flamboyant Gothic Ceiling at the Cluny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고전주의는 정반대로 중세적 사고의 뜰안 무성한 식물들 사이에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났다. 처음에 그것은 하나의 형식일 뿐이었다. 그리고 보다 나중에야 그것은 하나의 영감이 되었다. 우리가 시대에 뒤진 낡은 것, 중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는 정신과 표현 방식들은 당장에 죽지는 않는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에서의 르네상스보다는 프랑스에서의 르네상스, 중세의 산물이 가장 강력하고 아름답게 발전했던 프랑스에서의 르네상스의 도래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이탈리아의 꽈트로첸또(15세기)를 생각할 때 받는 인상은 대체로 조화와 자유와 음향과 희열 등이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아직도 중세적인 형태들이 우세할 때에 이탈리아인은 유독 개화가 빨랐고, 따라서 사람들은 그것을 중세적 형태에 대척되는 반대 명제 즉 르네상스의 신호로 본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15세기 이탈리아에서조차 아직은 문화의 진정한 기반이 순전히 중세적인 반면 르네상스 정신 속에서도 중세적 특성들이 생각보다 훨씬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는 것을 망각하게 된다. 우리가 그리는 관념 속에서는 르네상스의 색조가 지배적이다. 반대로 우리가 15세기 프랑코-부르귀뇽 세계를 한눈에 조망해보면 우리는 언뜻 다음과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우수어린 근엄함과 야만스런 사치의 과시, 기이하고 지나치게 꾸민 형식과 닳아빠진 상상력, 중세 정신의 온갖 퇴락의 특성 등, 이번에도 우리는 여기서도 르네상스가 도래하고 있음을 망각한다. 그것은 아직 지배적이지는 않고 아직 근본적인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특기할 만한 것은 르네상스가 우선은 새로운 정신이 되기 이전에 하나의 외적 형식이었다는 점이다.

     문학에 있어서 고전적 형식들은 정신 자체의 변화 없이 그대로 도입된다. 그 중 일군의 문인, 지식인들이 라틴 문체의 순화와 고전적 구문에 약간 더 신경을 쓰고, 거기에서 바로 인문주의가 태어난다. 이들 문인들 그룹은 1400년 경 프랑스에서 꽃피고 그것은 몇몇 교회 지도자들과 행정관들을 포함하기에 이른다. 릴의 참사원이요 왕의 비서인 쟝 드 몽트뢰이으 와 교회의 폐단을 고발한 클레망쥬,  그리고 피에르와 공티에 콜 형제, 밀라노인 성 앙브로시우스 드 밀리스 그리고 왕의 비서관들 등 그들이 교환한 우아하고 진지한 서한들은 사고의 애매모호함으로도, 사뭇 중대하다는 듯한 태도로도, 지나치게 배배꼰 부자연스러운 문장으로도 쓸데없이 박학한 척 하는 객담으로도 후세대 인문주의자들의 서한문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우리는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에게서 근대적인 요소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지 않을까? 우리가 그들을 혁신자들로 생각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최초의 인문주의자들이 자기 세계와의 일치감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이다. 그들의 전작품은 그것에 생기를 주는 쇄신의 입김에도 불구하고, 14세기 문명에 속한다. 게다가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가 중세 발기에 이탈리아의 외부에서 명성을 떨친 것은 그들의 속어로 쓴 글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라틴어로 된 작품들이다. 동시대인들이 보는 페트라르카, 그는 일종의 설익은 에라스무스이며 보편적 정신이요 윤리 논문들의 우아한 저자이며, 서한집의 저자요 고대를 소재로 한 소설가였다. 그가 다룬 주제들은 중세기의 것들로 <세상에 대한 경멸에 관하여><종교적 평온에 관하여> 등이다.  단지 형식과 어조가 다르고 세련되었을 뿐이다. 고대의 미덕에 대한 그의 찬양은 아홉 용사들에의 숭배와 다소 일치한다. 

     보다 제한된 영역에서이기는 하지만 보카치오도 페트라르카와 비슷한 영향력을 미쳤다. 사람들은 그를 찬양하되 데카메론의 저자로서가 아니라 "상대편에 대해 인내심을 보이는 박식가"로서, 또 <뛰어난 영웅들의 몰락에 관하여>와 <빛나는 여인들에 관하여>의 저자로서 찬양하였다. 운명의 변덕스러움에 대한 그의 기이한 집필들로 인해 'messire Jehan Boccace' 는 일종의 운명의 지배인 impresario으로 통했다. 샤틀랭이 그를 생각하고 모방한 것도 그 같은 관점에서이다...보카치오가 매우 중세적인 정신을 가진 15세기의 브르고뉴가 사람들엑 의해서 잘못 이해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은 보카치오에게서 우리로서는 잊어버릴 위험이 있는 매우 두드러진 중세적인 면을 이해했다. 

     프랑스의 인문주의와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의 차이는 어조나 경향의 차이보다는 박학함과 능란함의 차이이다. 고대적 모델들을 모방함에 있어서 프랑스인들은 토스카나의 하늘 밑이나 콜로세움의 그늘 밑에서 태어난 사람들에 비해 많은 장애물들을 극복해야 했다. 프랑스에서는 신부들은 라틴어로 글을 쓰면서 일찍 서한체의 탁월함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세속적인 작가들은 여전히 신화와 역사의 정묘함에 입문하지 못하고 있었다...쟝 반 아이크가 그의 중세적 풍경속에 고전적 건축학 형태들을 도입했듯이, 작가들은 고대적 모델들을 추구하되 여전히 형식적인 방식으로 단지 장식만을 변형시킨다. 그들이 고전적 방식에 성공을 거두지 못할수록 그것이 우리에게 더 중세에서 르네상스로의 이행을 이해하게 해준다. 

    고대의 비전은 기이하게 남는다...그토록 찬탄을 자아낸 고대인들의 완벽성을 사람들은 인위적인 형태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시대 시인들은 감동적인 것들을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다. 다만 그들이 위대한 아름다움을 목표로 할 때, 그들은 신화의 도움을 빌고 멋부린 과장된 라틴어법을 사용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스스로를 '수사학자rhethoricien'라고 느낀다. 이는 아직 대단치는 않지만 우스꽝스러운 라틴화의 시작이며... 이 참을 수 없는 방식은 작가들이 빼어나려고 노력할 때 마다 나타난다...이처럼 지나치게 기교를 부린 수사학은 단순히 하나의 문체적 이상은 아니다. 그것은 특히 문학적인 대화의 이상을 나타낸다. 인문주의는 그 전체로서 하나의 사회적 유희이며, 사화적 관계들의 형식, 삶의 형태를 보다 고상하게 만들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러한 관계 하에서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비해 불리하다. 이탈리아에서는 사고와 언어가 순수 라틴주의에 훨씬 가까왔고 사회적 상황도 정신 자세도 인문주의의 제 경향에 훨씬 적합했다. 인문주의자들 그룹의 정신은 사회적인 풍습에 일치했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는 사회적 유형으로서, 말하자면 이탈리아의 자치 도시들의 도시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왔다. 브르고뉴 지방에서는 반대로 사회 생활의 정신과 형식이 여전히 중세에 속해 있어서, 보다 새로운 표현으로의 지향이 수사학파들이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중세의 조합들의 연장일 뿐이었고, 그것들이 나타내는 정신도 표면적으로밖에는  쇄신되지 않았다. 이 지방에서 근대 문화를 예고한 것은 에라스무스의 성서적 인문주의l'humanisme biblique 이다.

    ....

     삶의 가락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15세기의 영혼들은 아직도 비관적이고 우울한 채 남아있다. 르네상스의 조화는 새로운 세대가 고대의 형식을 사용하면서 그 정신에 스스로를 적응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다. 우선은 언어의 순화와 표현의 정확성, 그 다음은 사고의 확대, 인간과 삶을 향한 직접적이고도 생생한 관심 등. 가장 마음을 사로잡는 문제는 이 시대적 전환기에 세계를 새롭게 하는 데 고대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물론 고대를 르네상스의 유일하고 독특한 동력으로 간주하는 사람도, 또 르네상스를 잉태한 원칙으로 보는 사람도 없다. 그 새로운 시대는 중세적인 혼에서 나왔으므로 고대는 그 새 시대의 도래에 있어서 필록테테스의 화살- 다행스러우면서 불행한 - 같은 역할밖에는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1. 플랑보아양 양식 https://en.wikipedia.org/wiki/Flamboyant

    인물소개:

    요한 하위징아 https://ko.wikipedia.org/wiki/요한_하위징아

     

    출처> 중세의 가을 / 요한 하위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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