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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화국 II : 피렌체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13. 12:25

     

     피렌체는 여러 가지 정치 형태와 그에 따른 명암들을 겪었을 뿐 아니라,  서양의 다른 자유국가들 보다 훨씬 더 많이 그에 관한 답변들을 내놓았다. 그것은 변하기 쉬운 보편성에 대한 인간 계층 및 개인들의 태도를 완전히 반영한다. 프루아싸르가 보여주는 프랑스와 플랑드르 지역의 위대한 시민 계급 선동가들의 모습과 14세기 도이치 연대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정말 중요한 것들이다. 다만 정신적인 완전성과 사건에 대한 다양한 근거 제시라는 측면에서 피렌체 사람들은 그들 모두를 훨씬 능가한다. 귀족 지배, 전제군주, 중간 계급과 무산자 간의 싸움, 완전한, 절반의, 겉보기만의 민주주의, 한 가문의 우선권, 신정 정치(사보나롤라 의), 그리고 메디치 가문의 전제정치를 예비하는 혼합 형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여기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의 내적 동기를 분명하게 드러내어 서술한다. 

     

    Florence: Capital of the Italian Renaissance and home of Machiavelli (Image: Bas van Hout/Public domain)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역사를 쓰면서(1492까지) 자신의 고향도시를 완전히 살아 있는 존재로서, 그 발전 과정을 자연적이고 개별적인 과정으로 서술했다. 그는 현대인 중에서 처음으로 이것을 할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카스트루치오 카스트라카네 의 생애를 묘사하면서 - 그가 임의로 꾸며낸 전제군주 유형 - 했던 것처럼. 그가 정말로 자기 마음대로 서술했는지, 어떤 점에서 그렇게 했는지를 탐구하는 것은 우리 영역 밖의 일이다. 그의 <피렌체사>에 대해 책의 구절마다 어떤 비난거리를 찾아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고귀하고 유일한 가치는 여전히 남는다. 그의 동시대 사람들이며 후계자이기도 한 야코포 피티, 귀차이르디니, 세니, 바르키, 베토리 등은 - 얼마나 고귀한 이름들인가! 그리고 이 대가들이 묘사하는 것은 또 얼마나 대단한 역사인가! - 피렌체 공화국의 마지막 몇 십 년, 잊을 수 없도록 위대한 그 장관을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국가의 몰락에 관한 이 대규모의 역사 서술 전통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악마적인 기쁨을 느끼면서 고귀하고 숭고한 것의 파산을 확인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사태를 위대한 재판 과정으로 다룰 테지만, 어쨌든 그것은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사려깊은 관찰의 대상으로 남게 될 것이다. 

     사태를 언제나 다시금 어둡게 만든 기본적인 불행은 피렌체가 피사처럼 자기들이 이미 정복한 옛날 적들을 통치하였다는 점이다. 그것이 계속해서 폭력 상태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사보나롤라만이 성취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것도 특별히 다행스러운 상황의 도움을 받아서만 가능한 일이었을 테지만, 대단히 영웅적인 유일한 방책은 토스카나를 제때에 해체해서 자유도시들의 연방으로 만드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때늦은 열병으로 나타났다가 애국적인 루카 사람 하나를 단두대로 데려갔던 생각이었다(1548). 모든 일은 이런 불운, 그리고 외국 영주를 향한 피렌체 사람들의 불행한 교황당파적 사고 방식, 또한 외국의 간섭에 익숙해진 것 등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앞선 시대가 오로지 복수와 제거밖에는 가르쳐준 것이 없는데도, 성스러운 수도사의 지휘 아래 계속 목소리를 높여서 이탈리아 최초로, 패배한 적을 보호하는 예를 보여준 이 국민들을 보고 경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곳에서 애국주의와 도덕적, 종교적 방향 전환을 녹여서 하나의 전제로 만들어낸 광채는 멀리서 보면 마치 꺼진 것처럼 보였다.

     

    Statue of Girolamo Savonarola in Ferrara

     

     그러나 그 가장 좋은 결과들은 기억할 만한 1529~1530년의 포위 상태 속에서 다시 피어올랐다. 당시 귀치아르디니가 썼듯이 이런 태풍을 피렌체 위로 불러들인 사람들은 정말 '바보'였지만, 그러나 그들은 믿기 어려운 일을 이루어냈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들 같으면 불운을 피했을 것이라고 그가 말했다면 이것은 다름 아니라 피렌체가 완전히 수치스럽게 소리도 없이 적의 손아귀에 떨어졌어야 했다는 뜻이다. 그랬더라면 도시의 화려한 교외지역과 정원, 그리고 수많은 시민들의 목숨과 안녕을 지켰을 것이고 그 대신 인류의 가장 위대한 기억 하나가 없어졌을 것이다. 

     피렌체 사람들은 이탈리아 사람들과 현대 유럽인들에게 수많은 위대한 일들의 모범이자 최초의 표현이다. 어두운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단테는 정치 체제를 개선하는 피렌체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는 환자에 비교하였는데, 그럼으로써 그는 이 국가 생명체의 기본적인 특성을 지적한 것이다. 국가 체제를 만들고, 현존하는 힘과 방향들을 계산함으로써 새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위대한 현대의 오류는 격동하는 시기에 피렌체에서 언제나 다시 등장했다. 마키아벨리도 이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국가 예술가들은 권력의 인위적인 이동과 분배, 가장 잘 걸러진 선거 방식들, 위장 관청 등을 통해서 지속적인 상태의 기초를 만들어 내고, 그 상태를 어느 정도 만족시키거나 아니면 기만하려 하였다. 그들은 극히 단순하게 고대 그리스 로마를 참고로 삼고 마지막에는 아주 공식적으로 거기서 당 이름을 얻었다. 예를 들면 오티마티Ottimati니 아리스토크라치아Aristocrazia 같은 이름들이었다. 그 이후로 세계는 이런 표현들에 익숙해지고 거기에 전통적이고 유럽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 이전에 나온 당 이름들은 오로지 해당 국가에만 속하는 것이고 직접적으로 사태를 표현하거나 아니면 우연의 장난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름이란 사태를 얼마나 변색시키며 탈색시키기도 하는가!

     

     

    Palazzo Vecchio, Firenze - Busto di Nicolò Machiavelli 

     

    마키아벨리

     한 나라를 구성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마키아벨리는 단연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현존하는 힘들을 살아서 활동하는 힘으로 파악하였고, 그 대안책들을 올바르고 위대하게 제시하였으며, 자신이나 남을 기만하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서는 허영심의 흔적이나 아니면 장부를 속여 흑자로 만들려는 태도가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글을 쓸 때도 독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관청과 영주를 위해서나 아니면 친구들을 위해서 썼다. 그의 위험성이 거짓된 천재성에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개념들을 거짓으로 만들어내는 데 있었던 적도 없다. 그의 위험성은 그가 스스로 통제하기 힘들어했던 강렬한 상상력에 있었다. 그의 정치적 판단의 객관성은 극단적인 곤궁과 위험의 시대, 사람들이 정의를 쉽게 믿지 않고 공평함을 전제로 할 수 없던 시대에 나온 것이다. 자기 시대를 향한 그의 분노는 오늘날 우리 시대에 우익과 좌익 세력들이 활동하는 것을 본 우리에게는 특별한 인상을 주지 않는다. 그래도 마키아벨리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시대의 사건들을 논하였다. 그의 저술에는 직접적인 열광이 없고 피렌체 사람들마저도 마지막에는 그를 범죄자로 간주하였지만, 그는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애국자였다. 그도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말하고 행동했지만, 그래도 언제나 그의 생각은 국가의 치유에 있었다. 새로운 피렌체 국가 체제 건설에 대한 그의 가장 완벽한 프로그램은, 우르비노 공작인 젊은 로렌조 메디치기 죽은(1519) 다음에 레오 10세에게 보낸 건의서에 드러나 있다. 로렌조 메디치에게 그는 자신의 군주론을 헌정한 바 있다. 당시 사정은 이미 늦었고, 국가는 극단적으로 부패한 상태였고, 제안된 수단과 방법들 모두가 도덕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메디치 가문의 뒤를 이어 공화국이, 그것도 온건한 민주주의가 들어서기를 희망했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교황과 그 추종자들, 그리고 다양한 피렌체의 이해 관계를 향해 보낸 고백들 중에서 이보다 더 정교한 건축물은 생각할 수 없다. 시계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피렌체를 위한 수많은 다른 원칙들, 개별적인 언급들, 이와 상응하는 것들, 정치적 전망 등은 <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서 일급 내용만 밝히자면 다음과 같다. 예컨대 그는 공화국이 비록 간헐적이지만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발전의 법칙을 인정하였고, 국가 체계가 유동적이고 변화의 능력을 가질 것을 요구했다. 그래야만 갑작스러운 사형 선고와 추방들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유에서, 즉 개인적인 폭력 행위와 외국의 개입을("모든 자유의 죽음") 차단하려는 이유에서, 그는 미움을 산 시민들에 대해서 법적인 고발 제도Accusa를 도입할 것을 원했다. 이 점에서는 피렌체에는 옛날부터 비방외에는 달리 길이 없었다. 그는 여러 공화국에서 위기의 시대에 대단히 큰 역할을 했던 자발적이지 않고 때늦은 결정들을 대단히 훌륭하게 짚어냈다. 그 사이에서 그의 상상력과 시대의 압력은, 그 어떤 영주보다도 자기 사람들을 더 잘 선택하고 '설득'을 통해 잘못을 피한 국민을 무조건 찬양하도록 만들고 있다. 토스카나 지배에 대해서 그는 이 지역이 자기 도시에 속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특별한 논의에서) 피사를 다시 정복하는 일을 생과 사의 문제로 여겼다. 그는 1502년 아레초 지역의 반란 이후 그곳을 그대로 내버려둔 것을 탄식하였다. 심지어는 이탈리아의 공화국들이 스스로 공격받지 않고 안으로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밖을 향해서 활동을 하고 영토를 확장해나가야 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오직 피렌체만이 사태를 잘못 파악했고 피사, 시에나, 루카와 치명적인 적대 관계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에 반해서 '형제로 대우해준' 피스토이아는 자발적으로 종속을 해왔다. 

     

     

    인물소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https://ko.wikipedia.org/wiki/지롤라모_사보나롤라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년 9월 21일 ∼ 1498년 5월 23일)는 이탈리아의 도미니쿠스회 수도사·설교가·종교개혁가이다. 사보나롤라는 설교를 통해 피렌체 시를 개혁하고, 민주정치를 실시하려고 했다. 또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부도덕을 비난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이탈리아가 벌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사보나롤라는 페라라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1475년에 도미니쿠스 수도

    ko.wikipedia.org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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