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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화국 I : 베네치아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12. 18:36

     

     한동안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도시를 국가로 만드는 힘을 최대한도로 발휘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도시들은 거대한 연방을 결성하기만 하면 되었다. 때로는 이런 형식, 때로는 저런 형식의 옷을 입고 나타나기는 했지만 이것은 이탈리아에서 되풀이해서 시도되었다. 12세기와 13세기의 싸움에서 실제로 크고 전투력이 강한 도시 연방들이 생겼다. 시스몬디는 롬바르디아 연방이 바르바로싸에 맞서 마지막으로 무장했던 시기(1168년 이후) 가 아마도 이탈리아 연방이 형성될 수 있었을 적기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강력한 도시들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특성들을 발전시킨 이후였다. 그들은 무역 경쟁국으로서 상호간에 극단적인 수단까지 사용하였고 힘이 약한 이웃 도시들에 압력을 가해 무조건적인 종속으로 끌어들였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각각 개별적으로 견디어낼 수 있으며 전체가 필요치 않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면서 각기 다른 폭력 통치를 위한 기반을 준비하였다. 귀족 당파들이 자기들끼리의 분쟁과 시민과의 분쟁을 계속하면서 강력한 정부에 대한 욕구가 생겨나고, 이미 존재하던 용병부대가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일방적 당파 정부가 전체적인 시민 동원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데 이미 오래 전에 익숙해진 다음에 전제정치가 실제로 이루어졌다. 전제군주제는 대부분 도시의 자유를 빼앗았다. 여기저기서 전제정치를 추방하였으나 절반뿐이거나 일시적이었다. 전제정치는 언제나 되돌아왔다. 그를 위한 내적 조건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에 맞설 힘들이 모두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독립을 지킨 도시들 가운데는 인류 역사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두 도시가 있다. 끊임없는 격동의 도시 피렌체, 우리에게 개인과 전체의 온갖 생각과 의도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 주었고, 3백년 동안 이 운동에 동참했던 도시 피렌체가 그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겉보기에는 정체되어 있고, 정치적으로 침묵을 지키는 도시 베네치아였다. 이들은 생각해낼 수 있는 한 가장 극단적인 반대 현상이었고, 이들 두 도시는 세상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것이었다.

     

     

    베네치아

    베네치아는 스스로를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피조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 안에 인간의 지혜보다 더 높은 힘이 예전부터 작용해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도시에는 화려한 건국 신화가 있다. 413년 3월 25일 정오에 파도바에서 온 이주민들이 리알토에 도시의 초석을 놓았고, 그와 더불어 야만족들에게 찢긴 이탈리아에서 공격할 수 없는, 성스러운 자유의 장소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들 창설자들의 영혼 안에 미래의 위대함에 대한 예감이 있었다고 덧붙힌다. 이 사건을 화려하게 흐르는 6운각 시문으로 찬양한 안토니오 사벨리코Antonio Sabellico (1436-1506)는 도시의 축성식을 거행한 신부로 하여금 하늘을 행해 다음과 같이 외치게 하고 있다. "우리가 언젠가 위대함을 기도하거든 우리에게 번영을 주소서! 지금 우리는 보잘것없는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있지만 우리의 맹세가 헛된 것이 아니라면 오 하느님, 언젠가는 이곳에서 대리석과 황금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사원들이 당신을 향해 올라갈 것입니다!" 15세기 말에는 이 섬 도시 자체가 당시 세계의 보석 상자였다. 사벨리코는 이 도시를 오래된 둥근 지붕 교회들, 경사진 탑들, 대리석을 붙힌 건물 정면들 가진 보석 상자라고 묘사하였다. 그리고 천장을 금으로 장식하고 구석구석이 서로서로 임대 계약을 맺은, 아주 좁은 화려함도 묘사했다. 그는 우리를 안내해서 북적거리는 리알토의 성 자코메토 광장으로 데려간다. 

     

    Antonio Sabellico 의 베네치아 역사

     

     여기서는 말이나 외침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여러 목소리들이 한데 어울려 웅웅거리는 소리로 한 세계의 사업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광장을 둘러싼 회랑과 거기 연결된 좁은 골목들에는 환전상들과 수많은 금세공사들이 자리잡고, 그들의 머리 위로 끝도 없이 가게들과 창고들이 이어진다. 사벨리코는 다리 건너편에 있는 독일 사람들의 거대한 상관을 묘사한다. 그 홀 안에는 그들의 상품과 사람들이 북적이고 이 건물 앞 운하에는 배들이 줄지어 서있다. 그곳으로부터 위쪽으로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실은 배들이 계속 이어지고, 짐꾼들이 득실거리는 강변을 따라 무역상들의 상품 창고가 평행으로 이어진다. 리알토에서 성 마르코 광장까지는 향수 가게와 객주집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와 같이 그는 독자 들을 이 도시의 한 구역 한 구역 다 구경시키고, 마지막에는 두 개의 병원까지 안내한다. 오직 이곳 베네치아에서만 볼 수 있는 공공 목적을 가진 기관이다. 전시와 평화시에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베네치아 정부의 특징이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부상자와 적군의 부상자들까지도 간호해주는 것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공공기관은 무엇이든 베네치아에서 그 모범을 찾아볼 수 있다. 연금 제도도 체계적으로 운영되었다. 유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베네치아에서 부유함, 정치 안정, 세계에 대한 지식 등은 충분히 성숙해서 그런 문제들을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 조용하고 신중한 걸음걸이와 사려깊은 말솜씨, 금발에 날씬한 베네치아 사람들은 의상이나 거동으로는 서로 잘 구별되지 않았다. 그들은 부인과 소녀들에게 장신구, 특히 진주를 걸어주었다. 당시 터키 사람들에게 엄청난 손실을 입었어도 베네치아의 전체적인 번영은 빛나는 것이었다. 축적된 에너지와 유럽의 전체적인 선입견은 대단한 것이어서 뒷날까지도 베네치아는 동인도로 가는 뱃길의 발견,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붕괴, 캉브레 동맹전쟁 등 가장 힘든 타격들을 견디고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1348 - Venezia

     

     티볼리 태생으로 당시 문헌학자들의 솔직한 말솜씨에 익숙한 사벨리코는 또 다른 곳에서 자신의 아침 강의를 듣던 젊은 귀족들이 정치 논쟁에 말려들려 하지 않는다는 점을 놀라워했다. "이탈리아의 이런저런 움직임에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말하고 기대하는가를 내가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자기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국가의 엄격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일부 귀족 계급에 대한 보고도 있다. 15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에는 최고 관청에도 배신자들이 있었다. 교황과 이탈리아 영주들이 각각 자신들의 밀고자를 두었고, 심지어는 2급 용병대장들도 밀고자들을 거느렸다. '10인 위원회'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소식들은 원로원에 알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들은 적어도 밀라노의 로도비코 일 모로가 원로원 의원들을 상당수 매수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귀족들의 가난이 배신의 주요 원인이었다. 그것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1492년 두 사람의 귀족이 국가가 관직이 없는 가난한 귀족들을 구제하기 위해 해마다 7만 두카토를 내놓아야 한다는 제안을 하였지만 10인 위원회가 개입해서 두 사람을 키프로스로 종신 추방하였다. 일부 부유한 귀족들이 개인적으로 집을 짓고 가난한 사람들을 그 안에서 무료로 살게 해주었다는 사정이 이해가 된다. 베네치아의 적들이 이런 종류의 내부사정에 희망을 걸었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활발한 무역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도 넉넉한 노동의 이익을 확보해주었고, 동지중해에 있는 식민지들이 위험세력을 정치에서 다른 쪽으로 유인해냈으리라는 점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제노바가 비슷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가장 폭풍우같은 정치 역사를 가졌던 것을 보면 베네치아가 굳건하게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오히려 다른 어느 곳과도 달리 여러 사정들이 함께 작용했다는 데 있었다. 난공불락의 도시로 베네치아는 외부의 상황을 냉정하고 사려깊게 받아들였고, 나머지 이탈리아 지역의 파벌 싸움에 초연하였으며 오로지 일시적인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가능하면 높은 대가를 받고 동맹을 맺었다. 그래서 베네치아의 기본적 기질은 오만하고 거의 경멸감마저 품은 고립주의와 국내적으로 더욱 강한 유대감이었고, 그 결과 나머지 이탈리아 전지역의 증오를 받았다. 도시의 모든 주민들은 식민지와 본토의 땅을 차지하는 일에 각별한 공통 관심을 가졌다. 특히 본토의 베네치아 식민지(이를테면 베르가모에 이르기까지의 도시들) 주민들은 오직 베네치아에서만 토지를 사고 팔 수 있었다. 이렇게 인위적인 이점들은 오직 내부의 평화와 일치단결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잘 느끼고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이곳은 모반자가 생기기 힘든 토양이었다.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을 귀족과 시민 계급으로 나누어서 서로간에 접근이 극히 어렵게 만들었다. 귀족 계급 안에서 위험성이 있는 사람들, 즉 부자들은 대규모 무역과 여행에 종사하고, 항상 되풀이된 터키와의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모든 모반의 근원인 무료함을 없앴다. 전쟁에서 지휘관들은 이들 부자들을 때로는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방식으로 보호하였다. 그래서 베네치아판 카토는 서로에게 고통을 주는 귀족들의 소심증이 공정함을 희생시키면서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베네치아는 몰락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넓은 천지에서 크게 활동하는 일은 베네치아의 귀족 계층에게 전체적으로 건전한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10인 위원회는 해마다 통치계급 전원, 즉 대의회에서 새로 선출되었고, 따라서 대의회를 가장 직접적으로 대표하는 기관이었다. 이 선출 과정에 엄청난 음모가 개입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짧은 임기와 뒷날의 책임으로 인해 이 직책은 그다지 탐낼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의회와 다른 관청들의 활동이 지하에 숨겨져 있고 폭력적인 것이었다고 해도 진짜 베네치아 사람은 관청을 피해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나서곤 하였다. 공화국의 영향이 멀리까지 미치기 때문이라거나 혹은 자기 대신 가족을 고문할지도 모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대개의 경우 유혈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태의 원인에 따라 일이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도 외국에 있는 국민에게 이보다 더 큰 도덕적인 힘을 행사한 경우는 없었다. 예를 들면 원로원에 배신자들이 있었지만, 이것은 외국에 나가 있는 베네치아 사람은 누구나 정부를 위한 자발적인 첩자라는 사실을 통해서 보상되었다. 로마에 있는 베네치아 출신 추기경들은 교황청의 비밀 회의에서 내린 결정을 고국에 알리는 것을 극히 당연한 일로 여겼다. 

    통계의 고향 베네치아

    기반이 그토록 복잡하고 활동과 관심사가 그토록 광법위한 영역으로 확대된 나라가, 전체에 대한 조망 없이, 여러 가지 힘들과 부담, 증가와 감소에 대한 지속적인 결산 없이 유지되기란 불가능하다. 베네치아는 현대적인 통계의 탄생지라는 칭호를 들을 만하다. 베네치아와 나란히 피렌체와 그 밖의 발전된 이탈리아 영주국가들에서 통계가 발전하였다. 중세 봉건국가는 고작해야 영주의 권리와 이익(토지대장)의 총목록을 작성했을 뿐이다. 여기서 수익은 고정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토지 수익을 뜻할 때는 그런대로 맞았지만 도시들은 상공업에 근거한 수익이라 극히 유동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에 따른 처리 방안을 찾았다. 배, 군대, 정치적 압력과 영향력 등이 상업 장부의 차변과 대변 항목 아래 적혀 있었다. 유럽 국가 중에는 이탈리아 국가들에서 처음으로 정치의식, 회교도식 행정부의 모범, 아주 오래된 생산과 무역 경영 등의 결과들이 하나로 합쳐져 진정한 통계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프리드리히 2세 치하의 남부 이탈리아 전제국가는 오직 사느냐 죽느냐의 싸움을 위해서만 권력의 집중화를 이루었다. 그에 반해 베네치아에서 최종적인 목적은 권력과 삶을 누리는 것.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계속 유지하는 것. 이익이 큰 산업을 끌어들이는 것, 새로운 판매 시장을 개척하는 것 등이었다. 

    이 도시의 주민이 1422년에 19만명에 이르렀다. 화덕, 싸울 수 있는 사람, 두 발로 서서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아니라 영혼의 숫자를 세고, 그것이 다른 모든 통계를 위한 가장 중립적인 근거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은 아마도 이탈리아가 처음이었다. 같은 시기에 피렌체 사람들이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에 대항하기 위해 베네치아에 동맹을 요구했을 때 베네치아는 한동안 거부했다. 밀라노와 베네치아, 즉 구매자와 판매자간에 전쟁을 벌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정확히 상업적 계산에 근거한 명백한 신념에서였다. 비스콘티 공작이 군대를 늘리기만 해도 밀라노는 곧장 세금을 올려야 하는 탓에 베네치아 입장에서는 나쁜 소비자가 된다. 

    베네치아는 계산과 실용적인 태도를 통해 현대국가의 중요한 측면을 가장 일찍 완전하게 드러내보였던 반면,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고 평가되던 문화에서 어느 정도 뒤쳐져 있었다. 이곳에는 일반적인 이탈리아식 충동, 특히 고대 그리스 로마에 대한 열광이 없었다. 사벨리코의 말로는 베네치아 사람들에게서 철학과 능변의 재능은 무역과 국가 체제의 재능과 같았다. 1459년 게오르기우스 프라페쭌티우스 가 플라톤 법률서의 라틴어 번역을 총독에게 바치고 연간 150두카토를 받는 조건으로 철학 선생으로 고용되었다. 그러나 프란체스코 산소비노가 자신의 유명한 책에 덧붙인 베네치아 문헌사를 읽어보면, 14세기 베네치아에서는 역사서 말고는 거의 신학, 법학, 의학 전문서적들만 있었으며, 15세기에도 국가의 중요성에 비추어볼 때, 에르몰라오 바르바로와 알도 마누치를 빼고는 탁월한 인문주의자가 거의 없었다. 추기경 베싸리온이 국가에 기증한 도서관의 책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파괴되는 것조차 막지 못했다. 

    오랫동안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문학에 대한 기여도도 보잘 것 없었다. 그러다가 16세기 초기에 그동안 소홀히 한 것을 한 번에 따라잡았다. 르네상스의 미술 정신마저도 베네치아는 외부에서 받아들였으며 15세기 말에야 비로소 완전히 독자적인 힘으로 꾸려가게 되었다. 베네치아에서는 아주 특이한 지적인 뒤처짐을 볼 수 있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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