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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기 로마의 사회 구조 ll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0. 6. 22. 14:21




    피호제도







    국가에 중대한 의미를 지녔던 또 다른 사회제도는 보호자patron와 피보호자client간의 관계인 피호제도였다.
    중세의 봉건영주와 봉신들 간의 관계와 비슷했지만, 초기 로마에서 피호인들은 개별 보호자나 단일 가문에 종속된 사람들이 아니고 씨족에 종속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피호인은 정복된 영토의 비로마계 주민, 자유인으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로마인, 피해방인, 로마 시민권을 취득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종속된 외국인 등이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결합은 씨족과 피호인 모두에게 이익이 되었다.
    그들은 토지 하사,정치, 재정적 지원, 법정에서의 보호, 씨족의 종교생활에 참여하는 특권에 대한 대가로 군역을 이행하고 노동력을 제공했다.


    씨족이 중요성을 잃어가면서 피호인들은 씨족이 아니라 부유하고 세도있는 가문에 예속되었다.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피호인들을 거느리는 것이 세도의 표지였다.


    보호자와 피호인의 관계는 종교적으로 재가된 피데스fides, 즉 의무를 이행하는 신실한 태도(신의)에 의해 강화되었다.
    한 번 상호관계를 맺은 뒤 의무를 소홀히 하는 측은 신에게 죄를 짓는 일이었다.
    이러한 사고는 로마 최초의 법전인 12표법에도 담겨있다: "자기 피호인에게 해를 끼치는 보호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보호자와 피호인의 관계에서 비롯된 태도가 로마와 타국 간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로마인들은 신의의 원칙에 따라 어떤 조약이든 성실히 지키고 상대국의 이익을 지켜줄 의무가 있었다.
    반면에 상대국들은 보호국인 로마에 성실한 피보호국이 되어야 했다.




    귀족patricians과 평민plebeians




    로마인들이 귀족과 평민이라는 뚜렷한 정치적, 사회적 구분이 생긴 시점이나 경위는 분명하지 않다.
    (두 신분간의 구분은 재산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대다수는 아닐지라도 적지않은 평민들이 귀족들만큼 부유했기 때문이다.
    출신도 특정 종족을 기반으로 하지 않았다. 두 신분 모두 라틴인, 사비니인, 에트루리아인의 혈통이 섞여 있었다.
    또한 평민이 오로지 피호인 출신인 것 같지도 않다.)

    두 신분 모두 시민으로서 기본권을 누렸으나 사회적, 정치적 특권면에서는 달랐다.

    귀족을은 원로원을 독점하고 사제단을 구성하고, 간왕interrex 같은 고위직을 차지했다.

    평민들은 시민으로서 상업적 계약을 체결하고, 부동산을 소유하고, 법정에서 소송을 하고, 민회에서 투표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이들은 원로원의 의원이 되거나 국가의 사제가 죄거나 관리가 되지는 못했으며 일반적으로 귀족과의 혼인이 불가능했다.
    이러한 구분은 기원전 6세기 말과 5세기 초에는 더욱 공식화 되었다.



    초기 로마의 종교








    종교는 로마의 개인 생활과 정치 생활 모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정과 농장과 목장의 종교였던 로마의 종교는 과거나 미래보다는 현재에 관심이 있었고,
    근면한 노동과 기율, 의무와 용기, 충성의 덕들을 심어 주었다.

    가정의 종교가 국가의 종교가 되자 그것은 단일사회로써 사람들을 공고히 뭉치게 하고, 국가가 지속될 내적인 힘과 응집력을 주었다.
    계층 갈등, 정부의 변화, 대외 전쟁 등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종교는 부자와 빈민, 귀족과 평민, 농민과 도시 거주자를 하나로 묶는
    띠 역할을 했고, 로마로 하여금 통일과 힘을 지니고 외부 세계에 대처할 수 있도록 했다.


    이탈리아의 여타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로마도 선사 시대 주민들; 인도유럽어권 이민들, 에트루리아인, 그리스 식민지 주민들로부터 다양한 종교 유산을 물려 받았다.
    그 결과 로마에는 토테미즘, 마술, 터부, 동력론, 애니미즘, 다신교, 신인동형론 등 거의 모든 종교적 경험의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술과 터부는 비록 국가 종교에서는 금지되었지만 평민들 사이에서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제식들 : 로마는 가교 도시이자 도로 중심지이자 교역 전초지가 된 후 라티움과 에트루리아 남부의 제식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면서 새로 대두된 필요를 가장 잘 채워주는 제식들을 자신들의 것으로 채택했다.
    그 중에서 가장 현저하고 널리 퍼진 것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숭배되고 라티움과 에트루리아 남부에서 인기가 있던 유노Juno의 제식이었다.
    로마에서 유노의 의식이 갈수록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은 그 도시가 테베레 강 양쪽에 펼쳐진 두 구역의 문화적 수도가 되어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Roman statue Juno Sospita




    에트루리아 출신 왕들이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세운 신전은 로마인들에게는 새로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 때까지 로마인들은 조야한 돌계단이나 흙에 잔디를 입힌 제단을 세웠을 뿐 그이상 정교하거나 내구성있는 제단을 세워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높은 곳에 자리한 신전의 위압감과 육중한 외양, 그리스-에트루리아 방식의 아름다운 장식은 로마의 가장 위대한 신에게 적합한 집을 제공했다.
    카피톨리누스 신전은 아벤티누스 언덕에 세워진 디아나와 미네르바의 두 신전과 함께 신전 건물을 로마 종교의 항구적인 특징으로 자리잡게 했고
    애니미즘에서 그리스의 신인동형론적 신 개념으로 옮겨가던 당시의 사조를 강력하게 뒷받침했다.






    로마는 국가 자체가 본질상 종교적 기관이었다.

    국가 종교는 가족, 씨족, 부족 같은 모든 유서깊고 규모가 작은 사회적, 종교적 공동체들을 포괄하고 통합했다.
    도시 로마를 에워 싼 포메리움pomerium은 신성한 영역이었다.
    로마가 인구가 증가하고 면적이 확대되면서 전체 사회를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공동의 종교생활을 제공하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었다.






    내용발췌> 로마사 - 세드릭 A. 요 프리츠 M. 하이켈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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