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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 공화정의 대두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0. 6. 28. 12:06



    공화정은 기원전 500년경(전승에 의하면 기원전 509년)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이 시작된 시점인 기원전 27년 까지였다. 
    공화정res publica라는 용어는 반드시 민주적이지만은 않지만 본질상 왕이나 황제 치하에 존재하는 정치체제와는 다른 정치형태를 뜻한다. 


    로마의 뛰어난 정치가이며 웅변가였던 키케로



    공화정 초기사 전승의 구조 전체가 기초를 두어야 하는 곳은 파스티Fasti의 견고함이다.




    Fasti




    (파스티: 고대 국가들의 역년歷年은 연대기적 순서로 계산되지 않고, 일년 임기의 고위 정무관의 이름으로 계산된었다. 이러한 체계는 사업과 법률적, 행정적 목적상
    목록을 쉽게 만들어 놓지 않을 경우 엄청난 기억력에 의존해야 했다. 로마 공화정기 4-5세기 동안에는 관리와 사제와 일반 개인에게 그러한 목록들이 아주 유용했을 것이다.
    로마 정무관의 기록들 중에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목록은 공화정 초기부터 사제들이 보관한 목록이었을 것이다. 대사제는 매년 초 흰 서판을 집무실에 갖다 놓았다.







    서판 맨 위에는 콘술들과 중요한 정무관들 사제들의 이름을 적고, 다음에는 제일들과 휴일, 사업을 하거나 재판을 할 수 있는 평일들(fasti)의 목록을 적었다.

    매일 매일의 여백에는 일식, 지진, 전염병, 불가사의한 사건, 신전봉헌, 전쟁과 승전 등의 특기할 사건을 적어 한 해가 끝날때면 서판을 공문서 보관서에 보관했다.
    이 정보들은 사제들이 기원전 130년에 연단위 기록표 작성을 중단한 뒤에 출판되었고, [대연대기Annals Maximi]로 알려지게 된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이행은 로마사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문제중의 하나이다.
    문헌 자료도 신빙성이 떨어지고 고고학 자료도 희소하기 때문이다.
    고대 전승에 따르면 오만왕 타르퀴니우스가 전제적인 통치를 했고, 아들의 부도덕한 행실로 인해 타르퀴니우스를 타도했다고 하는데,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 전승으로는 정권교체를 일으킨 혁명이 어떤 성격이었는지, 혁명의 시점은 언제였는지 왕권을 대체한 집행권력의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지
    하는 문제들이 풀리지 않는다.
    많은 학자들이 왕정이 갑자기 전복되었다는 전승보다는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한 최종단계가 궁극적 결과에 있어서만 혁명적인 더딘 발전 과정의 절정이었다는 견해가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하고있다.
    전승에서 배격해야 할 또 다른 점은 왕들을 대체할 정도로 충분히 발달한 행정체제의 갑작스러운 출현이다. 동등한 권력 분점, 협력, 그리고 거부권을 지닌 콘솔직은
    오랜 기간의 실험과 발전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정착되었을 것이다.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왕정 몰락의 원인이 아마 몇 차례에 걸친 군사적 패배로 절정에 달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쇠퇴에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쟁점이 되는 것은 그 절정의 시기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전히 파스티의 전통적 연대(기원전 509-507)을 받아들인다. 몇몇 학자들은 고고학적 증거에 기초하여 훨씬 뒤의 연대(기원전 484-450)룰 주장했지만,
    증거 자체의 해석에 어려운 점이 있고, 반드시 전승의 연대를 부정하지만은 않는다는 약점이 있다.









    내용발췌> 로마사 - 세드릭 A. 요, 프리츠 M. 하이켈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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