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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기 로마의 사회 구조 l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0. 6. 20. 20:56




    로마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인의 인간관계와 사회관계의 성격과, 그 관계를 지탱하게 하는 종교적, 윤리적 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중심에는 로마인의 가정이 있다. 가정은 초기 국가의 근원이었고, 그것은 가족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되고 가족들의 수장인
    파트레스 patres(가부장) 에 의해 통제되던 공동체였다.
    하나의 집단으로서 가족들에 관련된 것이 국가, 즉 레스 푸블리카 res publica(common wealth 혹은 공동의 부)였다.
    국가가 가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국가에 해당하는 라틴어 파트리아patria로 확증된다(이 단어는 '아버지에게 속한 patrius'이라는 형용사에서 파생했다)








    가족을 국가보다 중시하는 의식은 로마사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적이 없다.
    시민들이 국가에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는 것은 국가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 입신양명을 하려는 것이었다.



    로마 가족의 역사적 발달


    초기 로마의 가족은 일차적으로 혈통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오히려 혈족, 입양된 식구, 노예, 피해방인 등 동거인들의 집단과 가족에 속한 재산 모두를 의미했다.
    파밀리아familia라는 단어의 기원이 그 점을 설명하는데, 이 단어는 처음에는 주거지, 혹은 가옥을 뜻하다가 나중에는 가옥 공동체를 뜻하게 된 듯하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법적인 의미에서 가산을 뜻하게 되었다. 사람과 재산이 파테르 파밀리아스라고 불리는 가부장의 뜻에 따라 처리 되었고,
    그의 절대권에 종속되었다.

    가부장의 지도와 통제, 관리하에 로마의 가족은 노동과 재산의 공동체이자 국방과 법률까지 담당하는 국가의 축소판이기도 했다.
    최초의 로마 법은 가족을 자급자족적이고 독립적인 집단, 당시 시행되던 경제 체계라는 더 큰 틀 안에서 자치로써 기능하고
    국가의 간섭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경제단위로 인정했다.

    초기 로마에서는 조야한 연장으로 척박한 땅을 경작하고, 노예수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대가족을 이루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경제와 인구가 불어나면서 가족은 한 집에서 살 수 없을만큼 규모가 커져 형제들과 아들들이 분가하여 새로운 가구를 세웠다.
    하지만 그들의 파테르 파밀리아스가 생존해있는 동안은 모두가 단일 가부장 아래 한 가족의 일원으로 남아 있었다.




    아피아 대로


    씨족 gens : 대개 공동의 가명과 한 사람의 남자 조상(신, 인간, 혹은 동물)에게서 같은 핏줄을 물려받았다는 믿음을 가진 일단의  가족

    초기 로마인들은 모두 두가지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개인 이름praenomen이었고, 하나는 씨족의 이름 nomen이었다.
    씨족의 규모가 커지고 가족으로 분화되면서 세번 째 이름, 즉 가문명cognomen이 덧붙여졌다.
    예를 들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가이우스가 개인명이고 율리우스는 씨족명이고 카이사르는 가문명이었다.

    현대 저자들 중의 일부는 로마 일대에는 원래 세 종족 - 로마 전승에 나오는 티티에스Tities,  람네스Ramnes, 루케레스Ruceres - 이 정착해서 살았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에 일리가 있다.
    이 종족들이 분산되면서 이들이 정착했던 지역도 파기pagi(pagus의 복수)로 알려진 작은 농촌 행정단위로 세분되었다.
    파구스 하나마다 씨족 하나가 살았다.
    씨족은 구성원들에게 사법권과 견책권을 행사했고 파구스 안에서의 연대감과 상부상조를 촉진시켰다.

    도시 국가가 형성되자 씨족은 자신들의 지도자를 왕의 자문회의인 원로원에 보냈다.




    원로원Senatus


    초창기 씨족은 자체 군대를 보유했는데, 기원전 1세기까지 잔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군대가 적국에게서 쟁취한 영토는 개별적인 가문에 할당되지 않고, 공동영토로 선포된 뒤 씨족들이 차지하도록 남겨졌다.
    정복된 영토의 주민들은 크리엔테스clientes(cliens의 복수로 피호인)라 불리우는 종속민으로 전락했다.

    기원전 5세기 국가가 국방, 치안, 법 집행의 기능을 떠맡으며 씨족은 진정한 정치. 경제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나 가족(가문)은 가장 중요한 집단으로 남았다.

    기원전 5세기 중반에는 세가지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1) 씨족이 정체/경제 조직의 기능을 상실
    2) 가문들이 여러 가구들(households)로 확대
    3) 토지가 개인소유가 되고 강력한 파테르 파밀리아스에 집중되는 경향







    파테르 파밀리아스 : 파테르 파밀리아스는 혈육상의 아버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한 가구의 장을 뜻한다.

    가족 내에서 그의 권한은 국가나 다른 어떤 사회기관에 의해 제한을 받지 않고 다만 일시적으로 시행된 도덕적, 경제적 조건에만 종속되었다.
    따라서 가족 안에서 그는 법의 원천이었으며 사회도 그의 명령이 법적인 구속력을 가진 것으로 인정했다.
    가족 구성원의 재산권 박탈, 생사여탈권까지도 외부의 권위가 제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부장의 절대권patria potestas이 압제적이거나 포악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는 가족의 다른 식구들, 특히 성인 남자들과 상의할 의무가 있었다. 그의 기능은 가족의 복리를 향상시키는 데 있지 남용하여 파산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로마인의 조상숭배에서 필수적인 요소는 살아있는 파테르 파밀리아스의 수호신genius 숭배였다.
    그는 매일 가정의 노상에서 죽은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렸다. 노상에서 꺼지지 않는 불은 가족의 통일과 영속을 상징했다.








    결혼을 통해 낳은 자녀들과 입양을 통해 얻은 자녀들이 모두 그들의 연령과 지위에 상관없이 그의 뜻에 종속되었다.
    그러나 파테르 파밀리아스의 이러한 권위도 시민으로서, 트리부스 명부에 기재된 투표인으로서, 군인으로서 그의 권리와 의무에 우선하지는 않았다.

    법이 관습의 뒷받침을 받고 국가기관에 의해서 강제를 받지 않던 사회에서 파테르 파밀리아스가 행사한 권력은 이런 것이었다.
    종교 계율에 힘입어 전승을 존중하고 그것에 복종하는 태도가 대개 그의 권위 행사를 힘의 과시로 만들지 않고, '도덕적 명령'이 국가에 의해 '법적 명령'으로
    대체될 때까지 유일한 정의의 집행자로 공인받을 수 있게 했다.


    국가는 로마 가족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적 성격에서 혜택을 입었다.
    공공 생활 차원에서 왕과 훗날 공화정 정무관들은 파테르 파밀리아스와 비슷한 권위를 가졌다.
    그들은 가족 안에서 파테르 파밀리아스가 수행했던 것과 똑같은 의무들을 서로 다른 가족들의 구성원 사이에서 행사했다. 그들은 하급자들로부터 똑같은 복종을
    기대할 수 있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그러므로 로마 가족에 의해서 길러진 권위에 대한 복종이 국가 안에서 가족의 이익을 추구하느라 발생했던 지방 분권적 세력들을 억제하는 데
    이바지했다.








    내용발췌> 로마사 - 세드릭 A. 요, 프리츠 M. 하이켈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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