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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기 로마 - 왕들의 업적 Vl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0. 6. 10. 17:02



    제 6 대 왕 Servius Tullius (Ital : Servio Tullio )
    재위기간 : 578 a.C. - 539 a.C.







    세르비오Servio/세르비우스 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출신은 미천했다; 전쟁 중 감옥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시종으로 일하게 된다.
    왕비이던 타나퀼의 예지력이 그의 미래를 바꾸어 놓았는데, 세르비오를 사위로 삼고 왕이 불시에 사망하자 로마의 왕으로 추대시켰다.
    타르퀴니우스는 안쿠스 마르키우스의 아들들에 의해 살해 되었는데 타나퀼은 로마시민들에게 왕의 서거를 숨기고 세르비오를 차기 왕으로 지명한다.
    3일 후 사태가 진정되자 왕의 서거가 공표되고 세르비오는 자연스럽게 왕위를 이어받는다[1].



    세르비우스와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기원전 6세기에, 그러니까 에트루리아 왕들의 시대에 경제, 사회, 군사, 정치 분야에서 변화의 조짐이 발생했는데, 이것은 기원전 6세기말의 왕조의 몰락과

    공화정의 탄생보다도 더 혁명적인 변화였다. 이를테면 로마가 도로의 요충지이자 교역의 전초기지로 발달한 점, 로마의 면적과 인구와 부가 증가했다는 점,

    사유재산과 가족이 대두한 점, 씨족이 정치적, 군사적 단위로서 지녀온 가치가 퇴색한 점, 그 모든 원시 조직들이 단일 도시국가로 통합된 점이 그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발전들이 군사전략과 구성에서 급진적인 변화를 일으켰다[2]


    전승傳承은 전체 군사 개혁의 공로를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에게 돌리는데, 비록 그 모든 변화가 한 왕에 의해 시작된 것은 아니고, 적어도 기원전 6세기 후반에

    점차 발전했겠지만 기록에 남은 기본적인 개요를 그대로 받아들일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 세르비우스의 재편이 로마로 하여금 점증하는 군사 활동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더 큰 규모의 부대를 증원하기 위해서는 유일하게 입대자격이 부여된 시민들이 더욱 많이 필요했다. 공교롭게도 에트루리아 왕 치하의 로마는 시민권을 얻기위해

    군복무를 감수할 의지가 있는 이민들로 가득 찼다. 그들에게 시민권을 주기 위해서는 시민권의 자격을 종족과 씨족이라는 혈연 집단에서 벗겨내어 그것에 시민적

    기반을 부여해야 했다.

    이른바 세르비우스의 재편이 비록 군사적 필요에서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것은 단순한 군사개혁의 차원을 넘어섰다.

    왜냐하면 그것을 국가도 변형시켰고, 비록 그중 많은 내용은 기원전 5~4세기에야 비로소 제대로 작동되었지만 그래도 혁명적인 정치적 함의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 결과는 더 이상 고대의 씨족에 근거하지 않고 공동체와 군대 모두의 구성원인 시민들에 근거한 도시국가였다[2]


    시민의 수를 증가시키기 위해 평민계급 plebei (단수 plebeo,, 라틴어plebs, plebis) 을 포함시키는 정책은 

    귀족계급patrizi (단수 patrizio, 라틴어patricius) 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그러는 도중에도 에트루리아 도시 베이오Veio, 체레 Cere, 타르퀴니아 Tarquinia를 정복하고, 북쪽으로 로마의 영토 확장은 계속되었다.


    세르비우스는 로마 씨족의 전통을 바꾸어 더 이상 가문의 기원에 따르는 것이 아닌 거주지로 범주를 결정했는데, 이렇게 Suburana, Palatina, Esquilina, Collina의

    네 개의 도시 트리부스로 나누어졌다.[1]

    전승에 따르면 세르비우스는 군사목적상 피해방인들을 지역에 의거한 새로운 트리부스들로 할당했는데, 네개의 트리부스는 도시로, 열여섯개의 트리부스는 농촌으로

    할당했고, 거주의 원칙을 엄격히 지키도록 했다. 새 트리부스들은 세금과 병력 차출에 목적을 둔 시민 등록과 그들의 재산평가를 위한 센서스 구역 역할을 했다[2]

    이 방식은 로마 시민들을 균질화하는 기능을 했을 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로마에 귀속감을 느끼게 하여 세금을 내고, 권리와 의무를 다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1]



    세르비우스는 아벤티노 언덕에 다이아나의 신전을 건립했다.




    떼르미니 역 주변에 남아있는 세르비우스 시대의 성벽











    [1] 위키백과 이탈리아
    [2] 로마사 - 프리츠 M. 하이켈하임, 세드릭 A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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