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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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쓰라림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3. 15. 23:28
세계가 지금보다 5세기 가량 더 젊었을 때(중세의 가을 -1919년 작), 삶에 일어난 많은 일들은 지금과 현저히 다른 모습과 윤곽을 띠고 있었다. 불행에서 행복까지의 거리도 훨씬 멀었고, 모든 경험은 기쁨과 고통이 어린 아이의 정신 속에서 갖는 것 같은 그런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강도를 띠었다. 매 행동과 매 사건들은 언제나 일정한 의미를 갖는 형식에 둘러싸여졌고, 또 그 형식들은 거의 의식의 높이에까지 올려졌다. 탄생과 결혼과 죽음 등의 주요 사건들은 성례를 통해 신비의 후광을 띠었고, 대단치 않은 사건들 조차도 의례니 서식 따위를 동반하였다. 재난과 빈곤 같은 것도 그것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그것은 훨씬 더 무섭고 잔혹했던 것이다. 질병과 건강은 훨씬 더 뚜렷한 대조를 보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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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말기의 사회배경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2. 29. 11:21
꽈뜨로첸또(1400년대)의 시민적 예술과 궁정적 예술의 감상자층 르네상스의 예술감상자층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도시의 시민계급과 왕후들이 살던 궁정사회이다. 이 두 그룹이 대표하는 예술적 취향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긴 하지만, 많은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한편으로는 고딕의 궁정적 요소들이 부르즈와 예술에 아직도 계속 영향을 마치고 있고, 신분이 낮은 계급에게도 그 매력을 전적으로 상실한 적이 없던 기사적 생활양식이 다시 부활하게 되자 시민계급은 궁정 취향을 가진 예술형식을 새로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궁정의 귀족들도 시민계급의 사실주의와 합리주의에 담을 쌓을 수는 없었으므로, 그들 역시 도시생활에 근원을 두고 발전하기 시작하는 새로운 세계관과 예술관을 정립하는 데 하나의 역할을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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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정치의 반대자들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2. 4. 11:22
전제군주에 대한 증오 이렇게 집중된 영주의 권력에 맞선 저항은 국가 안에서는 전혀 성과가 없었다. 도시 공화국 성립을 위한 요소들은 영원히 사라졌고 모든 것은 권력과 폭력을 지향하였다. 귀족 계급은 봉건 토지를 가진 경우에도 정치적인 권력은 없이 자신과 암살자들을 교황당Guelfi 과 황제당 Ghibellini 으로 나누고 베레모자에 깃털을 꽂든가 아니면 바지를 볼록하게 하거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 옷을 입는 것이 고작이었다. 사색가들, 예를 들면 마키아벨리(Macchiavelli 1469~1527)같은 사람들은 밀라노나 나폴리 같은 나라가 공화정을 하기에는 너무 부패했다 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폭력의 그늘에 두 줄로 늘어선 가문 간의 원한에 지나지 않는, 이미 오래 전에 낡아버린 저 두 당파들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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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통치자 가문들 - 페라라의 에스테 가문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2. 3. 09:11
페라라, 모데나, 레지오를 지배한 에스테 Este 가문의 통치는 특이하게도 폭정과 인기의 중간에 위치한다. 궁정 안에서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다. 어떤 영주 부인은 의붓아들과 간통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목이 잘렸다(1425). 정식 결혼이나 서자로 태어난 왕자들은 궁정에서 도망치고 외국가지 뒤쫓아온 암살자들의 위협을 받았다. 외부의 음모도 끊이지 않았다. 어떤 서자의 서자는 유일하게 적법한 상속자(에르콜레 1세)에게서 통치권을 빼앗으려 했다. 후에 에르콜레 1세Ercole I d'Este(1431 ~ 1505)는 아내가 그녀의 오빠인 나폴리왕 페란테의 사주를 받고 자기를 독살하려 했다는 말을 듣고 아내에게 독을 먹였다고 전해진다(1493). 통치중인 공장 알폰소 1세와 추기경 이폴리토에 맞서 두 병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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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통치자 가문들 - 우르비노의 몬테펠트로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2. 1. 14:03
위대한 페데리고Federico da Montefeltro는 그가 진짜 몬테펠트로이든 아니든 간에 우르비노Urbino를 대표하는 가장 탁월한 군주였다. 용병대장으로서 그는 용병대장다운 정치적 도덕성을 가졌다. 그 점에 대해서 용병대장들은 오직 절반의 책임만 있다. 작은 나라의 영주로서 그는 자기가 밖에서 벌어들인 용병 급료를 나라 안에서 소비하고 가능하면 세금도 적게 거두는 정책을 폈다. 그 자신과 그의 두 후계자인 귀도발도와 프란체스코 마리아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진다. " 그들은 건물을 세우고 농사를 장려하고 현장에서 살고 수많은 사람에게 급료를 주었다. 국민은 그들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국가만이 잘 계산되고 조직된 예술품인 것은 아니다. 궁정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의미에서 그렇다. 페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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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통치자 가문들 - 만토바의 곤짜가 가문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1. 31. 12:01
15세기 후반, 유능한 군주들이 대표하는 잘 정돈된 두 통치자 가문이 있었으니 바로 만토바의 곤자가 가문과 우르비노의 몬테펠트로 가문이었다. 곤짜가 가문 사람들은 가족끼리도 상당히 의가 좋았다. 오래 전부터 이 집안에는 암살 사건이 없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프란체스코 곤자가Francesco Gonzaga 후작과 그의 아내 이사벨라 데스테 Isabella d'este 는 때로 느슨하기도 하지만 아주 기품있고 서로 의견이 잘 맞는 부부였다. 그들은 작지만 매우 중요한 이 나라가 극단적인 위험에 자주 노출되곤 하던 시대에 자신의 아들들을 중요하고도 행복한 사람들로 키웠다. 프란체스코가 군주로서나 용병대장으로서 특별히 반듯하고 정직한 정책을 취해야 한다고는 당시의 황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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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통치자 가문들 -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과 스포르짜 가문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1. 30. 09:00
밀라노 공작 집안의 영주들은 15세기 이탈리아 사람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통치는 잔갈레아쪼 이래 절대군주제를 확립했다. 비스콘티 가문 최후의 통치자인 필리포 마리아Filippo Maria Visconti(재위 1412~1447)는 특별히 주목할 만하고, 다행스럽게도 잘 기록되어 남겨진 인물이다. 지위가 높고 중요한 소질을 가진 한 인간을 두려움이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에게서 거의 수학적일 정도로 정교하게 나타난다. 국가의 모든 재원과 목적은 단 하나, 영주의 안전에 집중되었다. 그래도 그의 이기주의는 피에 굶주린 잔인성으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훌륭한 정원들과 나무 그늘 길, 놀이 구역 등으로 둘러싸인 밀라노성 안에 틀어박혀 그는 여러 해 동안이나 밀라노시에 한 발도 들여놓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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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통치자 가문들 - 나폴리의 아라곤이.탈.리.아 역사/중세역사 medioevo 2020. 1. 29. 08:35
나폴리의 아라곤 가문 아라곤 왕조는 그보다 중요한 다른 왕조들과 분리해서 관찰해야 한다. 노르만 시대 이후 이탈리아에서 남작들의 장원 지배 형태로 지속되어온 봉건제도는 이 나라를 독특한 색깔로 물들였다. 남쪽의 교황국과 그 밖의 극소수 지역을 뺀 나머지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더 단순한 토지소유제가 통용되었고, 어떠한 세습 권한도 허용되지 않았다. 1435년 이후로 나폴리를 장악한 위대한 알폰소는 자신의 실질적인 혹은 이름뿐인 후손과는 다른 종류의 인물이었다. 전체적으로 빛나는 모습이었으나 국민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사람을 사귀는 것을 대단히 좋아했고, 심지어 나이가 든 뒤 루크레찌아 달라냐를 향한 정열을 놓고도 욕을 먹기는커녕 경탄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낭비하는 악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