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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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숙명의 적 - 카르타고 Carthage IV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5. 2. 14. 00:14
로마인들은 막대한 인력과 자원 덕분에 한니발을 저지할 수 있었고, 배반했던 도시들을 재정복할 수 있었다.한니발은 카르타고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지 않는 한 이탈리아의 동맹국들과 자신의 군대를 보호할 길이 없었다.그는 로마가 자신의 새로운 동맹국들을 하나씩 재정복하는 상황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211년에 카푸아가 함락됨으로써 캄파니아 전역이 로마의 수중으로 되돌아갔다. Sacking of Capua Capua 카푸아가 함락되기 1년 전에 시라쿠사이가 유명한 로마장군 마르켈루스의 포위공격에 함락되었다. 카르타고는 시라쿠사이에 해군을 지원하는 미미한 시도 이외에 효과적인 지원을 해주지 못했다. 시라쿠사이는 함락된 뒤 약탈당하여 영원히 독립을 상실했다. 기원전 210년 아그리젠툼이 함락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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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숙명의 적 - 카르타고 Carthage III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5. 2. 11. 16:56
지연자 Cunctator 파비우스 막시무스(기원전 217) 트라시메네의 패배, 포위에 대한 두려움, 매일 열리는 원로원 회의, 시민들의 우상 플라미니우스의 전사 그의 파벌의 몰락, 보수파 원로원 의원들의 재기, 이 모든 상황이 30년간 사장되어있던 독재관 직의 부활과 이상하고 수수께끼같은 극단적 보수주의자 파비우스 막시무스Fabius Maximus라는 인물의 등장을 야기시켰다. 파비우스는 독창적이긴 했지만 다소 소극적인 전략을 채택한다. 로마 기병대가 한니발의 기병대에 비해 열세라는 판단하에 가급적 전투를 피하고 상대의 소모와 고갈에 입각한 일종의 심리전이었다. Quintus Fabius Maximus Cunctator gaat te voet zijn zoon tegemoet, David Vinckb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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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숙명의 적 - 카르타고 Carthage II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5. 2. 7. 23:19
제 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201) 제 2 차 포에니 전쟁 전의 로마와 카르타고 점령지 제 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와 카르타고 어느쪽에서도 적극적으로 도발하지 않았다. 기원전 238년부터 219년 까지 카르타고와 로마인들은 제1차 포에니 전쟁을 끝내면서 하스드루발이 체결한 조약과 이베르 조약을 충실하게 지켰다. 그러나 여러가지 요인들이 양국으로 하여금 서로 두려워하고 오해하게 만들어 서로를 궁지에 몰아넣고, 관계가 파국에 직면했을 때 상호간에 전쟁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사군툼(Saguntum) 사군툼은 경쟁도시인 마르실리아의 사주를 받아 한니발이 이베르 강에 이르는 모든 영토를 장악하려 한다는 불평을 로마 원로원에 끊임없이 제기했다. 원로원은 실태를 파악할 사절들을 파견했고, 한니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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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위대한 敵, 한니발 바르카 Hannibal Barca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5. 1. 25. 19:25
한니발(Hannibal,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83년)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러 명의 누이와 2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형제의 이름은 하스드루발과 마고였다. 매형으로는 카르타고의 집정관을 지낸 보밀카르, 공정한 하스드루발과 누미디아의 왕자인 나라바스가 있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패배하자, 하밀카르 바르카는 가족과 카르타고의 미래를 위해 카르타고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한다. (출처 - 위키백과) 한니발의 성품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다. 폴리비오스는 하밀카르가 아홉살 난 한니발에게 만약 제단으로 가서 절대로 로마의 친구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면 히스파니아로 데려가 주겠다고 하는 공상적인, 그러나 사실일 가능성도 큰 이야기를 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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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해전 - 카르타고와 로마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5. 1. 5. 04:19
Trireme 기원전 311년 20척의 트리레미스Trireme를 건조한 것이 해군을 창설하려는 로마인들의 최초 시도였다. 이마저도 유명무실하게 되어 기원전 264년 로마는 해군을 전혀 보유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이탈리아의 동맹국들에게 의존했지만 그 나라들도 삼단 노 선박 이상의 수준은 되지 못했다. 헬레니즘 세계의 해군들은 이미 오래전에 큰 바다에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무거운선박을 도입하고 있었다. 카르타고 해군이 자부하던 것은 퀸퀘레미스 quinquereme 였다. Quinquereme 이 배는 50-60개의 노가 장착된 한 개의 층으로 된 배로서, 노 하나에 다섯 명quinque의 수병이 배치되는 전함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트리레미스에 비해 무겁고 느렸지만 항해에 적합했고, 함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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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숙명의 적 - 카르타고 Carthage l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4. 4. 2. 21:56
페니키아어로는 Kart-Hadasht(새로운 도시).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에서 튀니스 만으로 돌출한 본 곶(Cape Bon)에 자리잡은 도시로서, 그리스인들보다 훨씬 오래전에 무역업자와 상인으로 유명했던 페키니아인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카르타고의 건국은 로마의 건국과 마찬가지로 전설로 싸여있다.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장편서사시 아이네이스에 카르타고를 건설한 주인공으로 나오는 디도DIdo 공주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디도 - 윌리엄 터너 그러나 고고학 발굴 결과들은 기원전 750년 경에 건설되었음을 보여준다. 지형적으로 지중해가 가장 좁아지고 따라서 양쪽 대륙으로 쉽게 접근할 수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아 제해권을 장악하기 이상적인 도시였던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의 중간에 위치한 몰타섬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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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 전성기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4. 2. 15. 20:37
기원전 264~133년은 로마 공화정의 전성기였다. 기원전 264년 내부 불안정의 원인이 되었던 신분투쟁이 막을 내렸는데, 주변의 적국에 대항하여 통일을 유지하기 위해 귀족들이 사회적, 정치적 권력을 동등하게 요구하던 부유한 평민들의 요구를 점진적으로 수용하고 이웃 종족을 정복한 전리품가 영토가 평민들의 곤궁을 덜어주는 데 이바지했던 덕분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정치체제는 원로원에 모인 귀족 - 평민의 신귀족 지배하에 기본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게 된다. 제 1차 포에니 전쟁과 함께 시작한 이 시기는 로마공화국이 지중해권 제국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을 지켜본 시기였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쟁을 치루었고, 모든 계층의 시민들이 전쟁이 가져다 주는 이익에 익숙해졌고, 지도자들은 군사적 영광을 동경하고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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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스 전쟁과 남 이탈리아 정복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1. 2. 15. 20:57
에트루리아는 기원전 282년 이후에도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고, 로마인들은 결국 그들에게 온건한 평화조약을 제시했다. 또 다른 위기가 닥쳤기 때문이었다. 중부 이탈리아에서 삼니움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자, 이제 남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그리스 도시 국가 타렌툼과 로마 사이에 첨예한 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Calabria, Tarentum. Diobol, about 250 bc 11-12mm 타렌툼인들도 자신들 쪽의 아펜니노 산맥에서 삼니움뿐 아니라 브루티아인들과 루카니아인들과 전쟁을 해서 그들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타렌툼인들은 아드리아 해를 건너 그리스의 여러 군사모험가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그 중 한 사람도 타렌툼을 강대국으로 만들거나 직접 제국을 창출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타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