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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니에리즘과 바로크
    이.탈.리.아 역사/16c - 19c 2020. 8. 24. 13:27

     Mannerist  elements are already present in some of  Raphael's  later  paintings  done in Rome, notably the Transfiguration (1517–20).

     

     

    마니에리즘(매너리즘)을 일반적으로 묘사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통일된 개념으로 묶기에는 힘든 매우 상이한 특징들을 내포하고 있다. 개념 형성에서 특히 힘든 문제는 매너리즘이라는 개념이 결코 순수한 시대 개념이 아니라는 데 있다. 매너리즘은 1520년대부터 16세기 말 사이의 지배적 양식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양식만이 이 시기를 독자적으로 지배한 것은 아니며 특히 이 시기의 초기와 말기에는 바로크적인 경향과 혼합되어 있었다. 매너리즘과 바로크적인 경향은 이미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후기 작품에서 뒤섞여 있다. 바로크의 격정적인 표현주의적 예술 의지와 매너리즘의 주지주의적・'초현실주의적' 예술관이 서로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주의 이후의 이 두 예술 양식은 정신적 위기를 겪고 있던 16세기 초반 수십 년간에 거의 동시에 생겨났다. 매너리즘이 당시의 정신주의적 예술 방향과 육감적 예술 방향의 갈등의 한 표현으로 생겨났다면, 바로크는 자연발생적인 감정의 바탕 위에서 이와 같은 갈등의 잠정적인 해소를 뜻하는 것이었다. '로마 약탈' 잏 바로크적인 양식 경향은 점차 매너리즘에 의해 밀려나게 되었고, 그 후부터 60여 년간은 매너리즘이 예술발전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몇몇 연구가들은 매너리즘을 초기 바로크에 대한 반동으로, 그리고 전성기 바로크는 다시 이에 반발하여 매너리즘을 대체하는 운동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16세기의 예술사는 바로크와 매너리즘의 충돌사로서 처음에는 잠정적으로 매너리즘이 득세하다가 종국적으로는 바로크의 승리로 끝맺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아무런 명백한 근거도 없이 초기 바로크를 매너리즘보다 앞서게 하고, 매너리즘의 과도기적 성격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하나의 가공적 이론이다. 두 예술 양식의 대립은 실제로는 발전사적인 대립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학적인 대립이다. 매너리즘이 정신 귀족적이고 본질적으로 전 유럽적인 교양 계층의 예술 양식이었다면 초기 바로크는 좀 더 민중적이고 감정을 좀 더 중요시하며 나아가서는 좀 더 민족적 색채가 짙은 정신 경향의 표현이었다. 성숙한 바로크가 한층 더 섬세하고 한층 더 배타적이던 매너리즘에 대해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은 반종교개혁운동에 따라 교회의 프로파간다가 광범위한 영향력을 획득하게 되면서 카톨릭이 다시 민중적인 종교가 되는 것과 때를 같이한다. 17세기의 궁정예술은 바로크를 그들 특유의 요구에 알맞게 적응시켰다. 즉 한편으로는 바로크의 격정적인 특색을 장엄한 극적 양식으로 고양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크의 잠재적 고전주의를 엄격하고도 냉철한 권위주의적 원칙의 표현으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16세기에는 아직도 매너리즘이 가장 대표적인 궁정 양식이었다. 매너리즘은 모든 중요한 유럽 궁정에서 어떠한 다른 예술 양식보다도 더 보호・장려되었다. 피렌체의 메디치가, 퐁텐블뢰의 프랑스와 1세, 마드리드의 필리페 2세, 프라하의 루돌프 2세, 뮌헨의 알브레히트 5세 등의 궁정화가들은 모두 매너리즘 예술가였다.

    이탈리아 궁정에서 성공했던 여러 관습들과 함께 예술 보호라는 제도는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어 예컨대 퐁텐블뢰와 같은 몇몇 궁정에서는 한층 더 발전된 양상을 띠었다. 발르와가의 궁정은 그 규모가 매우 크고 위세가 당당했으며, 뒷날의 베르사유 궁정을 연상시키는 여러 특징을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 덜 화려하고 공개적이며 여러 면에서 매너리즘의 내향적・주지주의적 성향에 더 알맞은 것은 그보다 규모가 작은 궁정들의 환경이었다. 피렌체의 브론치노와 바사리, 프라하의 아드리안 드 브리스, 슈프랑어, 한스 폰 아헨과 요제프 하인츠, 뮌헨의 주스트리스와 칸디트 등은 그들 패트런의 후한 총애와 더불어 좀 더 겸허한 환경의 더욱 내밀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심지어 필리페 2세와 그의 예술가들 사이에도 이 침울한 왕의 성격에 비추어보면 놀라우리만큼 화기애애한 관계가 지배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화가 쿠알류Coelho는 그의 가장 가까운 측근의 하나였고, 왕은 자기 거실에서 궁정 아틀리에로 나가는 특별한 복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루돌프 2세는 황제에 즉위하자 프라하의 흐라친으로 옮겨와서는 점성술사나 연금술사 및 미술사들과 함께 외부 세계와는 완전히 절연한 상태에서 많은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데, 여기에 나타난 세련된 에로티시즘이나 매끈한 우아함은 한 광인의 고독하고 황량한 거처가 아니라 로코코적인 향락에 둘러싸인 환경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사촌지간인 두 황제, 필리페 2세와 루돌프 2세는 예술품을 사들이는 데는 언제나 돈을 아끼지 않았고 예술가나 미술가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시간을 할애하였다. 따라서 이들 황제에게 가까워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예술품을 통하는 길이었다. 이들 지배자의 예술 수집에는 질투심과 비밀주의가 엿보이는데, 바꿔 말하면 예술 보호를 통해 자기 선전과 자신들의 위용을 과시하려던 동기는 이제는 심미적 향락적 태도의 뒤로 거의 완전히 물러나고 있는 것이다.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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