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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가의 전설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4. 29. 09:38

     

    이처럼 회화를 중세적, 수공업적 관점보다 높이 평가하는 태도는 이미 인문주의 최초의 선구자들에게서 나타난다. 단테는 그의 <신곡> 연옥편 제 11장에서 치마부에와 지오토 두 거장을 위한 불멸의 기념비를 세웠고, 이들 화가들을 구이도 구이니첼리, 구이도 카발칸티 같은 시인들과 비교하고 있다. 페트라르카도 그의 소네트에서 화가 시모네 마르티니를 높이 칭찬하고 있으며, 필리포 빌라니도 피렌체를 찬미하는 글에서 도시의 이름있는 명사를 열거하면서 몇몇 화가들을 포함시키고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소설, 그중에서도 특히 보카치오와 사케티의 소설에는 미술가에 대한 일화가 많이 들어 있다. 비록 얘기 속에서 예술 자체는 별다른 역할을 못하고 있지만, 이러한 소설에서 특기할 점은 예술가들을 이름없는 평범한 장인들의 존재와 분리해서 부각시키고 개성을 지닌 인물로 취급할 만큼 예술가들이 작가의 흥미를 끌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1400년대 전반부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형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가 전기가 씌어지기 시작한다. 한 조형예술가의 전기가 동시대인에 의해 씌어지기로는 브루넬레스키의 경우가 처음이다. 이러한 영예는 그전에는 다만 군주나 영웅, 아니면 성자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미술가의 손으로 씌어진 최초의 자서전은 기베르티의 자서전이다. 브루넬레스키의 명성을 기리기 위하여 자치도시는 대성당에 그의 기념묘비를 세웠고, 로렌조 메디치는 스폴레토에 묻혀 있는 필리포 리피의 유해를 고향으로 옮겨와 성대한 장례식을 올리려고 희망했지만, 스폴레토 시가 피렌체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위대한 인물이 모자라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그의 희망을 들어줄 수 없다는 정중한 회답을 이 도시로부터 받았다. 이 모든 일화에서 우리는 이제 사람들의 관심이 미술작품에서 미술가 자신으로 옮겨지고 있음을 명백히 느낄 수 있다. 창조적 개인이라는 현대적 개념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기 시작하고 예술가들의 자존심이 커져가는 징후는 날이 갈수록 두드러진다. 1400년대의 중요한 화가들 거의 대부분은 자신의 그림에 서명을 했고 필라레테 같은 사람은 모든 화가들이 자기 작품에 서명하기를 요구하기까지 했다. 서명하는 관습보다 더 특징적인 것은 화가들이 거의 예외없이 자화상 - 비록 그것이 반드시 자시 자신만을 그린 독자적인 자화상은 아니었지만 - 을 남겨놓았다는 사실이다. 예술가들은 자기 자신과 때로는 자기 식구들을 그림의 보조적 인물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헌납자, 후원가, 마돈나, 성자상 옆에 나란히 그려넣기도 했다.

     

    Filippino Lippi – Self Portrait detail  

     

    이런 식으로 길란다이오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벽화에 헌납자와 헌납자의 부인 맞은편에 자기 친척을 그렸고, 페루지아 시는 심지어 페루지노에게 그가 캄비오에 그린 벽화에 그의 자화상을 그려넣으라고 특별히 주문하기까지 했다. 예술가들을 공적으로 표창하는 일도 날이 갈수록 더 잦아졌다.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는 베네치아 도시공화국으로부터 도시 귀족의 장의 toga를 받았고, 볼로냐 시는 프란체스코 프란치아를 도시장관으로 선출했으며, 피렌체는 미켈로초에게 도시참사회 회원이라는 높은 직위까지 수여했다. 

    예술가들의 새로운 자기의식과 독자적인 창작활동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말해주는 가장 중요한 징표 중의 하나는, 그들이 이제 직접적인 주문에서 해방되기 시작하고 주문받은 일들을 종전처럼 그렇게 충실하게 수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예술적인 과제의 해결을 일체의 주문 없이 자발적으로 해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필리포 리피는 이미 수공업적 작업을 하듯이 그렇게 지속적이고 일정한 템포로 일을 하지 않고 때로는 하고 있던 일을 밀쳐놓고 갑자기 다른 일에 착수했다고 한다. 이와같은 자기 기분대로의 작업 방법은 이후 더욱 흔해지는데, 페루지노는 발주자에게 오히려 배짱을 내미는 일종의 오만한 '스타' 예술가였다. 그는 피렌체의 팔라초 베키오에서나 베네치아의 총독 궁전에서나 자기가 맡은 일을 완수하지 않았을뿐더러, 오르비에토 시에서는 대성당의 마리아 예배당을 위한 그림을 그려준다고 약속하고서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기 때문에 드디어 시청은 시뇨렐리에게 그 일을 대신 마치도록 위임했던 것이다. 미술가의 지위가 점차 상승한 것을 가장 잘 반영해주는 것은 다 빈치의 생애인데, 그는 피렌체에서도 의심할 나위 없이 인정받았지만 그렇게 일거리가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가 밀라노에 가서야 비로소 루도비코 모로의 궁정화가로서 총애를 받았고 그후 체사레 보르지아의 수석병기 기술자가 되었으며, 마지막에는 프랑스 왕의 총애하는 화가이자 측근으로 여생을 마쳤다.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은 1500년대 초기부터이다. 이때부터 유명한 거장들은 더이상 패트런의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귀족계급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된다. 바사리에 의하면 라파엘로는 한 사람의 화가가 아니라 대귀족과 같은 생활을 영위했다고 한다. 그는 로마에 개인 궁정을 갖고 있었고, 군주나 추기경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교제했으며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와 아고스티노 키지(당시의 유명한 귀족이며 예술후원가)는 그의 친구였고 빕비에나 추기경의 질녀는 그의 아내였다. 티치아노는 라파엘로보다 더 출세했다면 출세한 경우이다. 당대의 가장 인기있는 거장으로서 그가 누렸던 명망과 호화로운 생활방식, 그의 지위와 칭호는 그를 사회의 최상류층으로 올려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황제 카를 5세는 그를 라테라노궁의 백작으로 임명하고, 자기 궁정에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했으며 그를 황금 박차를 가진 기사로 만들었고, 심지어는 세습귀족의 권한과 같은 일련의 특권을 부여했다. 왕후, 귀족들은 서로 앞다투어 그로부터 초상화를 얻으려고 노력했으나 초상화 한 점 얻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피에트로 아레티노가 말한대로 그는 왕후와 맞먹을 정도의 수입을 갖고 있었다. 황제는 그가 자신의 그림을 그려줄 때마다 값비싼 선물을 했고, 그의 딸이 결혼할 때는 막대한 지참금까지 주었다. 앙리 3세는 노령에 접어든 이 거장을 몸소 방문했고, 티치아노가 1576년 페스트에 희생되었을 때도 페스트로 죽은 사람은 절대로 성당에 매장해서는 안된다는 당시의 엄격한 관례를 파격적으로 깨트리고 최대한의 모든 예를 갖추어 프라리 성당에 그를 안장했던 것이다.

     

    Portrait of Federico II Gonzaga, Tiziano, c. 1529

     

    미켈란젤로는 드디어 그전의 예술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사회적 명성에 도달하게 된다. 그의 예술가로서의 위대성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어서 그는 공적인 명예나 칭호, 표창 따위는 아예 사절했다. 그는 군주와 교황들과의 교제를 우습게 생각했다. 그는 그들의 반대자가 될 수조차 있는 입장이었다. 그는 백작도 추밀원 고문관도 교황청의 감독관도 아니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신과 같은 사람'으로 불렸다. 그는 자신에게 오는 편지에 화가나 조각가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단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이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귀족 출신의 젊은이들을 제자로 두기를 원했는데, 이를 단순히 속물근성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그림은 '손으로 colla mano' 그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col cervello' 그리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단순히 자기 비전의 마력에 의해 대리석 덩어리로부터 온갖 형상들을 창조해내기를 원했다. 그것은 예술가의 자부심이라든가 장인이나 엉터리 예술가, 시정배들보다 자신이 높은 존재라는 의식만이 아니고 평범한 일상적인 현실과 접하는 데 대한 일종의 불안감마저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자신 속의 어떤 마력적인 힘에 쫓기는 고독한 근대적 예술가, 즉 자신의 재능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자신의 예술가적 사명 위에 어떤 높은 힘이 군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를 대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예술가는 더없이 높은 지위를 달성하는데, 이에 비하면 지금까지의 예술적 자유라는 일체의 개념은 유명무실한 것이 된다. 이때 비로소 예술가의 완전한 해방이 이루어지고, 예술가는 르네상스 이래로 우리가 알고 있는 '천재'가 된다. 이제 예술가의 사회적 상승에서 마지막 전환이 이루어지는데, 예술작품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이 바로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고 유행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예술가들이 세상의 영예를 기려야 했다면 이제는 정반대로 세상이 예술가들의 영예를 기린다. 지금까지의 예술가가 개인적, 종교적 숭배를 위한 도구 노릇을 해왔다면 이제는 예술가 자신이 직접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신의 축복도 이제는 그의 패트런과 보호자로부터 그 자신에게로 옮겨졌다. 물론 영웅과 영웅을 찬양하는 사람, 즉 패트런과 예술가 사이에 주고받는 예찬은 그전부터도 어느정도 상호 의존관계에 있었다. 즉 찬양하는 예술가의 명예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에 의해 찬양받는 영예의 가치도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관계가 극도로 승화된 끝에, 패트런이 예술가로부터 칭찬을 받는 대신 자신보다 예술가를 높이고 칭찬함으로써 자신의 위치가 올라가게 되었다. 칼 5세는 티치아노가 떨어트린 붓을 허리를 굽혀 주우면서 티치아노와 같은 거장이 황제의 시중을 받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느냐고 말한다. 이쯤 되면 예술가의 전설은 극치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일종의 교태 비슷한 것도 들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예술가를 위한 휘황찬란한 조명 속에서 헤엄치게 한 것은 거기서 반사되는 불빛 속에서 그들 자신이 빛나고자 함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와같은 인정과 칭찬의 상호 의존적 관계, 봉사에 대한 서로간의 평가와 보답, 그리고 상호이익의 보호와 유지 등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인가? 아마 기껏해야 그것은 좀더 눈에 덜 띄는 형태로 진행될 뿐일 것이다. 

     

     

    출처>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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