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르네상스의 예술시장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4. 19. 00:34

     

    초기 르네상스이 미술가들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소시민적인 상공인들과 동렬에 서있었다. 그들의 형편은 비록 찬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불안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귀족같은 삶을 누릴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예술가 프로레타리아트라고 불릴만큼 비참한 삶을 영위하지도 않았다. 화가들은 그들의 세금신고서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빈약한 재산 상황에 대해 불평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기록들이 신빙성있는 역사적 자료는 되지 못한다. 마사치오는 도제들에게 월급도 지불할 수 없을 정도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는 죽을 당시에 매우 가난했고 빚에 쪼들린 것이 사실이다. 바사리의 말에 의하면 필리포 리피는 양말 한 켤레도 살 수 없었다고 하며, 파올로 우첼로는 노령에 이르러 가진 재산도 없고 일도 할 수 없으며 병든 아내까지 있다고 탄식했다. 그래도 형편이 나았던 것은 궁정이나 패트런 밑에서 일하는 예술가들이었다. 예를 들어 프라 안젤리코는 교황청으로부터 매달 15두카토를 받았는데, 당시 로마보다 생활비가 적게 들긴 하지만 피렌체에서는 일년에 300두카토만 있으면 귀족처럼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하나의 특색은 예술가들의 보수가 일반적으로 중간 수준 정도에 머물렀고, 유명한 예술가들이 펑범한 예술가나 상위 그룹의 장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보수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도나텔로와 같은 명망있는 예술가들은 좀더 높은 보수를 받았으나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인기작가의 엄청난 보수'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는 <동방박사의 경배>를 그린 대가로 150굴덴(금화, 플로린이라고도 부름)을, 베노초 고촐리는 제단화 한 점에 60굴덴을, 필리포 리피는 마돈나상 대금으로 40굴덴을 받았는데, 보티첼리는 마돈나상 값으로 이미 75굴덴까지 받기도 했다. 기베르티는 피렌체 세례당의 문을 만드는 동안 매년 200굴덴의 일정한 봉급을 받았는데, 그 당시 도시국가의 시집정관 대표의 봉급은 연봉 600굴덴이었다(이 600굴덴 중에 서기 네 사람의 봉급을 지불해야 한다는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 그 당시 원고를 베껴쓰는 유능한 필사의 보수는 연간 30굴덴에 일체의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당시 예술가들의 보수가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지만, 반면에 때로는 연봉 500~2000굴덴까지 받은 당대의 유명한 문인이나 학자에 비하면 떨어지는 것이었다. 예술시장은 아직도 비교적 소규모였고 미술가들은 일하는 동안에 전도금을 받아야 했으며 발주자들도 재료비를 여러번에 나누어 지불했다. 왕후, 군주 들도 현금이 없어서 쩔쩔맸고, 다 빈치는 그의 패트런인 루도비코 모로에게 보수를 다 받지 못했다고 여러 번 불평했다. 이에 못지않게 당시 예술작업의 수공업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은 예술가와 발주자의 관계가 완전히 물주와 농동자의 관계, 즉 노사관계였다는 사실이다. 좀 규모가 큰 예술사업에는 재료비나 임금, 때로는 조수와 도제의 식비에 이르기까지 현금으로 지불해야 할 일체의 비용을 발주자가 직접 관장하였고, 대표격 예술가까지도 원칙적으로는 그가 일한 시간에 준해서 보수를 받았다. 이와같은 임금제에 의한 회화작업은 15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원칙으로 통용되었다. 이러한 지불방법이 순수한 수공업적 일들, 예컨대 보수작업이나 복사작업에만 국한해서 적용되도록 바뀐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예술가 직업이 수공업적 성격을 탈피하는 데에 비례해서 작품계약에 명시된 일체의 조건들도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1485년에 체결된 한 계약을 보면 길란다이오는 작품에 쓰이는 물감 비용까지 청구하고 있는데, 1487년에 필리피노 리피가 체결한 어느 계약에는 재료비를 자기가 부담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계약을 1498년 미켈란젤로도 맺고 있다. 

    물론 우리가 엄격한 경계선을 그을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15세기 말경에 오면 하나의 전환이 이루어지는데, 이 역시 미켈란젤로라는 인물을 통해 가장 뚜렷이 부각된다. 콰트로첸토(1400년대)에는 예술가와 계약을 체결할 때 발주자는 아직도 계약의 완수를 보증하는 보증인을 요구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보증이 단지 하나의 형식이 되고 만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계약서를 만드는 대서인 자신이 쌍방의 보증인을 겸한 일도 있다. 예술가측의 다른 의무들도 그렇게 엄격하고 세밀하게 정해지지 않는 방향으로 차츰 바뀌어갔다. 이미 1524년의 계약에서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는 성자상만이 아니라 아무 그림이나 마음에 드는 소재로 그려주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고, 동일한 수집가는 또 1531년에 미켈란젤로와도 계약을 맺으면서 회화든 조각이든 그가 마음내키는 대로 한 점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했던 것이다. 

     

    길드로부터의 예술가의 해방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예술가들은 다른 유럽국가의 예술가들보다 처음부터 좋은 처지에 있었다. 그것은 이탈리아에서 도시생활이 더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탈리아의 군주나 독재자들이 다른 유럽국가의 지배자들보다 예술적 재능을 더 높게 평가하고 더 유효적절하게 활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예술가들이 길드와의 관계에서 비교적 더 큰 독립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 그들의 유리한 위치도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 무엇보다도 그들이 여러 궁정에서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북쪽 나라들에서는 완전한 장인이 된 예술가는 한 도시에만 묶여 있어야 했던 반면, 이탈리아에서는 이 궁정에서 저 궁정으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갈 수 있었고, 바로 이런 방랑생활이 동시에 지역적 상황에 제약되어 있고, 또 지역적 테두리 안에서만 지켜질 수 있었던 길드의 규정을 완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탈리아의 군주들은 일반적으로 유능한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곳 사정에 익숙하지 못한 특수한 예술가들을 자기 궁정으로 끌어들이는 데 큰 가치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길드의 제약에서 해방되어야만 했다. 그들이 주문받은 일을 해내는 과정에서 현지의 길드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거나, 길드 당국에 가서 노동허가를 신청하라거나 아니면 몇 사람 정도의 조수나 도제를 고용할 수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고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한 발주자의 일이 끝나면 자기가 거느리고 있던 사람들과 함께 다른 발주자에게 가서 그의 보호를 받으면서 거기서도 전과 같은 예외적 대접을 받을 수가 았었다. 이러한 궁정화가들은 처음부터 길드의 권한 밖에 있었다. 그러나 궁정에서 얻어낸 예술가들의 이러한 특권은 도시에서의 예술가에 대한 대우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런 사정은 당시의 예술가들이 이 도시 저 도시에서 동시에 기용되었고, 그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여로 도시들이 경쟁적으로 보조를 맞추어야만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따라서 예술가들이 길드에서 독립하게 된 것은 그들의 높아진 자존심 때문이라거나 시인이나 학자들과 동렬에 서겠다는 그들의 주장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그들의 봉사를 필요로 했고 또 확보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당시 예술가의 자존심이란 다름아닌 그들이 지닌 시장가치의 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예술가들의 신분상승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보수에서 잘 나타난다. 15세기의 마지막 4분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피렌체에서는 벽화를 그리는 데 비교적 비싼 보수를 지불하기 시작했다. 지오반니 토르나부오니는 1485년 길란다이오와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가족예배당 벽화 제작을 계약하면서 1100굴덴의 보수를 책정했다. 필리피노 리피는 로마에 있는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의 벽화를 그려주는 대가로 총 2000 금 두카토를 받았으며,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려주고 무려 3000두카토를 받았다. 15세기 말경에 이르면 많은 예술가들이 돈을 모으기까지 하는데, 그중에서 필리피노 리피는 상당한 재산을 모았으며, 페루지노는 몇 채의 집을 가지고 있었고, 베네데토 다 마이아노는 대저택을 소유했다. 

     

    Filippino Lippi, Self-Portrait. 1471-1472. Fresco. Brancacci Chapel, 

     

     

    The Carafa Chapel, in the Dominican church of  Santa Maria sopra Minerva by Filippino Lippi  (1488-93)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밀라노에서 연봉 2000두카토를, 프랑스에서는 매년 35,000프랑을 받았다. 친퀘첸토의 두 거장 라파엘로와 티치아노 역시 거액의 수입을 올렸고 귀족과 같은 생활을 했다. 미켈란젤로는 검소한 생활을 한 것이 사실이나 수입은 매우 많았고, 산 피에트로 성당 일의 대가를 받기를 거절했을 때는 이미 큰 재산가가 된 후였다. 예술가의 보수가 오른 것은 예술품의 수요가 증가하고, 물가가 일반적으로 올랐다는 사실도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15세기 말경에서 16세기초반에 이르는 사이 로마 교황청이 미술시장의 전면에서 피렌체의 예술수요자와 날카로운 경합을 벌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련의 예술가들은 이때부터 주거지를 아예 피렌체에서 훨씬 스케일이 큰 로마로 옮겼다. 로마에 안 가고 남은 예술가들도 자연히 교황청이 지불한 높은 보수의 이득을 보았다. 물론 그것은 사람들이 붙잡아두려고 했던 비교적 유명한 예술가들에 한정된 일이었다. 그밖의 예술가들의 보수는 예술시장의 일급 시세와 상당한 격차를 두고 천천히 올라갔으며, 사실상 이때부터 예술가들의 보수는 현격하게 차이나기 시작했다.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