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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브루넬레스키 Brunelleschi
    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0. 3. 13. 10:30

     

    Filippo Brunelleschi 1377 - 1446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건축가, 엔지니어, 조각가, 수학자, 무대미술가

     

    현대 이탈리아 건축의 첫 <설계자이자 엔지니어>로 불리우는 브루넬레스키는 도나텔로, 마사치오와 함께 피렌체 르네상스의 세 거장 중에 한 사람이었다. 가장 연장자였던 브루넬레스키는 원근법과 조형미술에서의 소실점을 발명함으로써 다른 두 사람의 기준이 되어주었다. 보석세공 도제 생활을 거친 후 피렌체에서 조각가, 건축가로 경력을 쌓았다. 피렌체의 많은 기념비적인 건물들을 설계했지만 역시나 그의 인생작은 엔지니어링의 승리로 일컬어지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의 쿠폴라였다. 

     

     

    그의 건축의 특징은 꼭 필요한 장식만 엄격하게 사용함으로써 얻게되는 형태의 순수성에 있다.  

    초기 생애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1377년 피렌체에서 아버지 ser Brunellesco di Filippo Lapi 와 어머니 Giuliana di Giovanni Spinelli 사이에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아버지는 충성스럽고 존경받는 전문가로서 외교 임무를 띠고 자주 외국으로 파견되었다. 필리포는 어려서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Abaco(주판처럼 손으로 계산하는 기구:아래 이미지 참조)학습을 통해 당시 상인들이 익히던 수학적 개념과 실용 기하학, 직접 측정이 어려운 거리 등을 측정하는 원근법을 습득했다고 한다. 

     

    The Algorists against the Abacists,  Gregor Reisch (1503)

     

    수학과 독서, 인문학자 니콜로 니콜리, 정치가 그레고리오 다티 등의 지식인 들과의 빈번한 교류로 풍부한 교양을 갖추게 된 브루넬레스키는 이 즈음에 회화와 드로잉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법률 공부를 고집하지 않고, 아들의 선택을 존중해서 보석 세공 공방에 들어가는 것에 동의해주었다. 아마도 베닌카사 로티로 추정되는 인물에게서 필리포는 금속 주조, 끌 사용법, 부조 세공, 상감기법, 보석을 고정하는 홈이나 틀 제작, 장식적 부조 등을 익혔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모든 예술 분야의 기초가 되는 디자인을 익혔다. 브루넬레스키의 첫 자서전을 쓴 제자 안토니오 디 투치오 마네티는 브루넬레스키가 이 기간 동안에 만든 기계식 시계와 자명종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1300년대와 함께 브루넬레스키의 견습생 시절도 끝이 났다. 1400과 1401년 사이에 그는 피스토이아의 루나르도 디 마제오와 피에로 디 지오반니 다 피스토이아의 공방에서 은으로 제작하는 산 야코포 제단 작업에 참여한다. 1399년의 계약에 의하면 부르넬레스키는 피포 다 피렌체 라는 이름으로 산 아고스티노와 사도 좌상(산 지오반니)과 선지자 예레미아, 이사야의 반신상을 조각한다. 

     

    Filippo Brunelleschi (attr.), sant'agostino, 1400-01

     

    Filippo Brunelleschi, Profeta Geremia nell'altare d'argento di San Jacopo

     

    대중에게 공개된 첫 작품으로 알려진 이 작품들에서 이미 웅변적인 제스처와 신체의 비틀림을 통해 주변 공간과 소통하는 특유의 감각과 세련된 디테일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1401년 피렌체 세례당의 청동문 제작을 위해 <이삭의 희생>을 주제로 한 콩쿨이 열렸는데, 많은 재능있는 예술가들이 참여했던 이 콩쿨은 르네상스 예술 혁명의 기초가 될 몇 가지의 스타일이 등장하면서 전통적 고딕 양식의 파괴가 시작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화제가 된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의 경쟁에서 심사위원들은 좀 더 대중 친화력이 있는 기베르티의 작품을 선정했고, 부르넬레스키에게는 보조 작업자 역할을 맡겼으나, 모두의 예상과 달리 부르넬레스키는 이 작업을 거부하고 로마로 떠나버렸다.

     

    Ghiberti's panel for the Baptistery contest
    Brunelleschi's panel for the Baptistery contest

     

    로마 여행(1402-1404)

    브루넬레스키는 1402년, 스무살의 도나텔로와 함께 고대작품들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향한다. 이 로마 체류기간은 두 사람의 예술 세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곳에서 그들은 풍부한 고대 유물을 관찰하고, 복제하고, 영감을 받기 위한 연구를 거듭할 수 있었다.  바사리는 두 사람이 한적한 도시를 떠돌면서 " 건물의 기둥, 장식, 기초, 파편" 들을 연구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1404년 도나텔로는 세례당 청동문 제작을 하고 있는 기베르티와 공동 작업을 하기 위해 피렌체로 돌아왔고 필리포는 로마에 남았다. 이 무렵에 그의 관심은 조각에서 건축으로 옮겨갔는데, 마네티에 의하면 로마 건축물의 감춰진 비밀과 구조의 세부사항을 이해하는 데 전념했다고 한다. 브루넬레스키는 특히 고대 건축물의 비례와 기술에 집중했다.

     

    피렌체로의 귀향

    1440년까지도 브루넬레스키의 주요활동은 조각이었다. 규모가 크고 유명한 건축물을 완성하고 난 뒤에도 때때로 조각 작품 의뢰를 받았다. 젊은 시절 조각으로는 1471년 화재로 소실된 산토 스피리토의 마리아 막달레나, 1410-1415년 작업인 십자가상이 남아있다.

     

    Brunelleschi's Crucifix (1410-1415)

     

    1412년 브루넬레스키는 프라토 두오모의 정면 설계 컨설팅을 맡았고, 1415년에는 피사의 폰테 아 마레를 재건축했다.

     

    선형 원근법의 발명(1416년 경)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을 특징 짓는 전형적 원소 중에 하나인 원근법과 소실점의 발명자인 브루넬레스키는 아마도 청년기에 원근법을 포함하는 광학 개념을 익혔을 것으로 보고 있다. 수학자이자 지도 제작자 파올로 달 포쪼 토스카넬리와의 우정 덕분에 브루넬레스키는 이런 자신의 지식을 확장하여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중앙투시적 선형 원근법의 규칙을 만들었다.

    서유럽 예술에 결정적인 흔적을 남긴 이 중요한 이정표를 입증하기 위해 브루넬레스키는 1416년,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에 의해 언급되고 있는(Elena Capretti, Brunelleschi, p. 28) 두 개의 그림을 제작, 시연했다고 한다. 하나는 피렌체 세례당의 모습이고, 하나는 피아짜 시뇨리아의 풍경으로,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이 작품에서 브루넬레스키는 공간에 위치한 형상들의 합리적 구성으로 통합 선형 원근법을 모두에게 이해시켰다.

    다른 예술가들도 즉시 이 기법을 채택했는데, 이는 특히 원근법이 인간을 척도로 하여 측량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고, 인간의 시점이 모든 사물의 중심이 되는, 르네상스 시대의 새로운 비전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원근법을 가장 먼저 응용한 예술 작품 중의 하나가 도나텔로의 <공주를 구출하는 산 지오르지오>이다. 

     

    St George Freeing the Princess, Donatello, 1416 or 1417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의 두오모 경선(1418)

    브루넬레스키는 15세기 초부터 피렌체 공화국으로부터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과 관련하여 부분적으로 건설하거나 재건설하는 임무를 받아 수행했다. 이 성당은 1296년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에 따라 기공한 후 설계 변경과 공사 중단이 반복되다가 1369년, 돔을 제외한 구조물이 완성되었다. 수십년째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돔은 로마 판테온 시절부터 지금껏 제작되어 본 적이 없는 거대한 쿠폴라로 덮어야 하는데, 비계와 목재 보강제를 사용하는 전통적인 기법으로는 여하한 방법을 강구해보아도 불가능하게만 보였다. 

    1418년 8월 19일, 200 피오리니 금화를 걸고 설계안을 공모한다. 기법과 엔지니어링의 문제 이외에도 쿠폴라는 성당 전체와 조화롭게 어울려야한다는 조건이었다. 17명의 참가자가 2차 경선까지 올라갔는데, 여기에는 목조 모형을 제출한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가 들어 있었다. 브루넬레스키는 보강재 없는 쿠폴라가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변경, 조정, 추가 등의 작업을 거쳐 이 목조 모형을 완성했다. 

     

    Wood model for the dome

     

    1419년 말, 도나텔로와 난니 디 방코의 조력으로 브루넬레스키는 두오모 광장에서 벽돌과 석회만으로 보강제 없는 쿠폴라를 실현해보인다. 이 시연은 두오모의 노동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고, 45 피오리니 금화를 받았다. 

    1420년 3월 27일, 최종 협의가 진행되어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가 쿠폴라 공급자로 최종 지명되었다. 

    두오모 건설 (1420년 시작됨)

    두오모 작업은 1420년 8월 7일에 시작되었는데, 브루넬레스키의 설계안을 따라야 한다고 명시되었다. 쿠폴라의 건축 과정은 마네티의 자서전과 바사리의 기록, 1800년대에 출판된 보관 문서, 1978년에 시작한 복원작업시 직접 관찰한 구조에 힘입어 놀라운 정확도로 재건되어 남아있다.

    건설 기간 동안 브루넬레스키는 보강재 없는 쿠폴라를 만드는 것에 대한 두오모 노동자들의 망설임, 비판, 불확신 등과 싸워야 했는데, 끊임없이 설명하고 모형을 만들어도 부족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 야코포 소프라르노의 리돌피에 실제로 보강재 없는 쿠폴라를 실현해보였다. 마침내 노동자들이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나, 신중하게 지켜보면서 14 braccia( 1 braccia는 약 29cm) 높이까지만 브루넬레스키 안에 따라 작업하겠다고 하는 등 갈등이 끝나지 않았다. 공동 작업자인 기베르티는 또 다른 방해물이었다: 결국 브루넬레스키는 작업을 둘로 나누자고 주장하는데 기베르티가 또 다시 실수를 하자 마침내 브루넬레스키가 두오모 건설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사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브루넬레스키의 뛰어난 능력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수학에 뛰어났고 기계를 만드는 데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엄청난 양의 벽돌을 위로 실어나르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는데 하루는 그가 며칠 작업한 기계를 성당에 설치했다. 그리고 말 한마디를 기계에 묶어두고 기계 주위를 계속 돌도록 했다. 레버를 당기자 많은 벽돌이 순식간에 위로 올라갔다. 일종의 화물 엘리베이터였다. 사람들은 난공사 구간마다 필요한 장치들을 스스로 만들어 공사를 진척시키는 브루넬레스키를 신뢰하게 되었다. 1)

     

     

    브루넬레스키는 <웅장하고 부풀어 오른> 돔 형태를 사용했는데, 이는 미학적, 현실적인 요구를 동시에 만족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뚫려있는 구멍의 지름이 너무 커서 반원형의 돔을 덮어 씌우는 것이 공학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직으로 여덟 칸으로 나눈 두 겹의 쿠폴라를 만들어 안팎으로 겹치는 형태의 돔을 만들었다.

    "돔의 큐폴라를 두꺼운 안쪽 쉘과 얇은 바깥쪽 쉘로 나눠 돔의 경량화에 성공했다. 바깥 쉘은 바람과 비를 막는다. 이 때 두 쉘 사이에 생긴 공간에 계단실을 넣어 검사·보수 등이 쉽게 진행되도록 했다. 덕분에 최근에는 이 계단으로 관광객이 돔의 꼭대기까지 쉽게 올라갈 수 있다." 1)

    제작에 필요한 건설기계도 브루넬레스키가 발명했다. 소가 돌리는 동력으로 움직이는 기중기를 나무로 제작해 무거운 돌을 플랫폼까지 올리고, 회전하는 크레인을 만들어 옮겨진 돌을 지정된 위치에 설치했다. 돔 꼭대기의 랜턴을 제작하기 위해 만든 크레인은 롤러 위에서 회전하는 방식이었다. 기계 장치뿐만 아니라 새로운 건설관리 방식도 도입했다. 돔이 올라갈수록 인부들이 오르내리는 일이 불편해지자 브루넬레스키는 돔 안에 와인 주점과 식당을 만들어 인부가 한번 올라가면 저녁까지 내려올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1) 

    두오모 축성식 (1436)

    1436년 3월 25일, 작업을 시작한지 16년만에 마침내 두오모 건설이 끝나고, 교황 에우제니오 4세까지 참석한 대대적인 축성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브루넬레스키는 그 동안 사용하던 기계 설비와 가벽등을 모두 치워버리고, 제단 주변에 목조 합창단과 열두 사도의 동상을 배치했다.

    실제적인 완성은 같은 해 8월에서야 이루어졌다. 피에솔레의 추기경 베노조 페데리기와 지오반니 마리아 비텔레스키가 두오모의 꼭대기에 마지막 벽돌을 올려 놓음으로서 드디어 이 거대한 건축 작업의 대장정이 마무리 되었던 것이다. 피렌체의 모든 교회에서 종이 울려 온 시민의 축제를 알렸던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 누구도 지을 수 없다고 했던 거대한 돔 구조물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축성식이 열린 일요일은 브루넬레스키의 날이었다. 브루넬레스키가 타고 갈 가마를 자기가 메겠다고 사람들이 밀고 밀치는 일이 벌어졌다. 연도의 시민들은 브루넬레스키에게 꽃을 던졌다. 

    황제도 이랬을까. 수십 년 동안 피렌체 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르던 일을 해결한 사람이 그 동네에서 자란 브루넬레스키였다. 그는 이제 최고의 건축가로 화려하게 날아올랐다. 피렌체에서 지어지는 대형 건물은 모두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그가 창안한 르네상스 양식은 이후 건축의 기본으로 자리하면서 전 유럽으로 퍼져 수 백 년 동안 서양 건축사에 영향을 미쳤다. 

    브루넬레스키는 1446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후 피렌체 시민들은 그의 무덤을 어디로 할지를 정했다. 논란이 있었지만 그가 만든 쿠폴라의 바로 아래 성당 바닥으로 정했다. 이는 교황도 누리지 못한 영예였다. 또한 피렌체 시민들은 부르넬레스키의 조각상을 어디에 둘지 고민했고 자리를 정했다. 두오모 성당 바로 옆, 쿠폴라가 가장 웅장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뷰포인트, 그곳에 브루넬레스키의 조각을 두었다 1)

     

     

     

    내용 출처> 위키백과 이탈리아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 시연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iki1004538&logNo=42969776

             1) http://cafe.daum.net/hookwangne/LWwk/1538?q=브루넬레스키%20두오모%20돔%20건축%20과정

    이미지 출처> 야후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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