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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사치오 Masaccio
    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0. 3. 9. 01:02

     

    Tommaso di ser Giovanni di Mone Cassai (1401  1428) 이탈리아 화가

     

    사초는 원근법을 사용해 그림을 그린 최초의 화가로, 비잔틴 미술에서 르네상스 미술로 나아가는 길을 닦았다고 여겨진다. 그는 실질적인 관찰을 토대로 대상을 입체감 있게 표현하고, 원근법을 바탕으로 공간을 묘사했으며, 자연광을 이용한 빛의 효과를 도입했다. 또한 인물의 감정에 비장미를 부여하는 등 기존의 장식적이고 우아한 비잔틴 양식에서 탈피해 이탈리아 회화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고 평가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조토 이후 마사초가 등장할 때까지 미술은 쇠퇴일로를 걸었다. 마사초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거장의 진정한 스승은 자연이며, 그 외에 다른 방식을 추구하는 작가들의 작품은 덧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라고 말했다.1

     

    The Holy Trinity, with the Virgin and Saint John and donors, c.1426-1428

     

    피렌체 르네상스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으로, 당시의 장식적이고 인공적인 고딕 회화 양식을 거부하고 진지하고 엄격한 회화로의 개혁을 추구했던 화가이다. 지오토의 볼륨감,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을 통한 공간구성, 도나텔로의 조형감이 살아있는 «생동감 넘치는 형상과 잘 준비된 재능으로 실물에 근접» (Vasari) 한 건축물과 풍경을 명암법을 이용하여 표현해냈다.  

     

    출생

    그는 의지와 영혼이 오로지 예술에 사로잡힌, 추상적이고 비계획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의 차림새조차 관심이 없었던 그를 사람들은 마사치오(덩치 크고 거동이 둔한 사람)라 불렀다. -  Giorgio Vasari

    마사치오라고 불리우던 토마소는 1401년 카스텔 산 지오반니 발다르노(현재의 산 지오반니 발다르노)에서 공증인이었던 아버지Giovanni di Mone Cassai와 어머니 Jacopa di Martinozzo 사이에서 태어났다. 카싸이라는 성은 <나무 상자를 제조하는 수공업자>로 크게 성공한 할아버지 시모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토마소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공증인이 되기 위해 라틴어와 법률 등을 교육받았고 20세가 되자 공증인 사무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406년 아버지가 스물일곱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을 때 어머니는 둘째 지오반니를 임신 중이었다. 이로부터 몇 년 후 어머니가 재혼하였는데 1417년 양아버지가 사망하자 마사치오가 가장이 되었다.  

    우고 파로카치는 마사치오의 어머니가 산 니콜로의 Piera de' Bardi에 몇년간 임대료를 지불한 문서를 발견했는데, 마사치오가 머물었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그 외에도 마사치오의 성장기에 대한 여러 가설들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모두 공식적인 자료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Masaccio가 피렌체에 도착한 것은 도시가 경제, 사회 및 문화적 번영을 구가하던 1418년 경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만약 브루넬레스키의 건축, 도나텔로와 기베르티의 조각 작품 등이 고대의 재발견에서 회화를 앞지른 것이 사실이라면, 1300년대 말 지오또 또한 존재했고, 같은 시기 피렌체에서 Starnina, Mariotto di Nardo, soprattutto Lorenzo Monaco 등의 화가들이 고딕 인터내셔널의 영향이 분명한 의미있는 작품들을 생산한 것 또한 사실이다. 다른 화가들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에 비해 스타르니나는 카르미네 성당의 <산 제롤라모 이야기>로 토스카나 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국에서 명성을 얻었다고 바사리Vasari는 전하고 있다. 

     

     

    Gherardo Starnina, St Benedict, Santa Maria del Carmine

     

    이런 프레스코화들이 20여년 후에 카펠라 브란카치Cappella Brancacci에서 작업한 마사치오와 마솔리노Masolino에게 얼마만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측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쨌든 마사치오만이 르네상스라는 혁명적 스타일의 새로운 회화에 뚜렷한 발자욱을 남긴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사치오가 마솔리노의 견습공으로 일했다는 1568년 바사리의 가설은 두 화가의 공동작업 이전에 완성된 작품들이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는 이유로 후세 평론가들에 의해 거부되었고, 1423~1424년 카르미네 성당의 Sant'Anna Metterza는 화가들의 단순한 공동작업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The Annunciation, Masolino, 1423-24

     

    Masaccio, Trittico di San Giovenale  (1422)

     

    1421년 동생인 지오반니가 마사치오를 따라 피렌체에서 거주하면서 당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비치 디 로렌조 공방에 등록했고, 항간에는 마사치오 역시 비치 디 로렌조 밑에서 작업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그 가설 역시 거부되었다.

    1422년 1월, 마사치오는 산 니콜로의 주민으로 Arte dei Medici e Speziali (약사와 전문가 조합)에 화가로 가입한다. 이 조합에 등록한다는 것은 꽤 많은 조합비를 정기적으로 지불할 역량이 있다는 증명이었고, 이 때문에 많은 미술가들이 가입을 최대한 미루었는데, 마사치오 보다 20년 가까이 연장자인 마솔리노조차 1423년에 가입했다. 

    Boskovits 는 1420년에서 1440년 사이에 많은 피렌체 화가들이 고딕양식의 장식성에서 해방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가 "지오토의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피렌체 시민의 자부심으로 다시 태어난 이 새로운 경향은 마사치오를 비롯한 대표적 인물들에게 공유되고 있었다. 마사치오의 경우 지오토의 재해석은 자신과는 다른 교육을 받고 다른 환경에 익숙하던 작가들과의 접목으로 더욱 자율적이고 엄격한 양식으로 발전했다. 그중에 가장 좋은 사례로는 필리네 발다르노의 산타 마리아 콜레지오 제단화, 산 조반니 발다르노의 산 로렌조 교회에 그려진 지오반니 델 비온도의 <성모의 대관식>을 들 수 있다.  

    생애의 마지막 기간

    1426년 피사 카톨릭 수도회가 마사치오에게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교회의 벽화 작업을 의뢰한다. 의뢰인의 세심한 기록 덕분에 마사치오의 경력 중에 가장 명확한 부분이 되었으나, 작품은 몇 개의 판넬로 해체되어 여러 박물관으로 흩어졌다. 

    그는 1426년 2월 19일 작업을 시작했는데, 금색 바탕 위에 생생한 색상과 하이라이트를 사용한 강력한 명암법으로 그려진 인물들을 순서와 구획으로 나누어 배치한 중세적 구조였다.

     

    The Virgin and Child from the Pisa Altarpiece, 1426

     

    마사치오는 윤곽선보다는 빛으로 인물을 표현하여 조각같은 입체감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모든 판넬이 하나의 소실점으로 수렴하는 것으로 전체 구성의 통일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 다폭화들은 18세기, 11조각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5개의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San Paolo,Pisa Altarpiece,1426
    sant'andrea,Pisa Altarpiece, 1426

     

    Santo carmelitano barbuto&Santo carmelitano imberbe, Pisa Altarpiece 1426

     

    St. Jerome and St. Augustine ( Pisa Altarpiece), 1426

     

    Predella panel from the Pisa Altarpiece,1426

     

    Adoration of the Magi (from the Pisa Altarpiece), 1426

     

    Stories of St Julian and St. Nicholas(from the Pisa Altarpiece). 1426

     

    1427년 1월 23일, 마사치오는 한 공증 서류에 증인으로 등장함으로써 그 때까지 피사에 체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에는 어머니, 동생과 함께 피렌체 산타 크로체 구역의 임대주택에서 살았고, 피아짜 산 피렌체의 공방을 위해 연 2피오리니를 지불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마사치오는 재정에 무관심한 습관 때문에 주변에 빚을 진 기록들도 남아 있는데, 가족은 어머니의 재혼에서 받은 유산으로 카스텔 산 지오반니에 집과 작은 포도원을 소유하고 있었다.  

    마솔리노와 바사리 등의 오래된 출처에 의하면 마사치오는 로마의 바실리카 디 산 클레멘테basilica di San Clemente의 카펠라 디 산타 카테리나cappella di Santa Caterina 벽화작업에 참여했는데, 평론가들은 사실상 그 작업에서 마사치오가 제외되었거나, 측면의 기사들을 그린 것이 최대한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1427년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Trinity (삼위일체)를 완성한 그의 1428년 로마에서의 마지막 체류는 마솔리노와 함께 작업한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 다폭화 Polittico di Santa Maria Maggiore 혹은 팔라 콜론나 Pala Colonna에 바쳐졌다. 

     

     

    Saint Jerome and John the Baptist' by Masaccio

     

     

    마사치오는 1428년 여름 스물일곱살의 나이로 로마에서 사망한다. 아마도 6월이었으리라고 추측한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직도 원인이 불분명한데 혹자는 가족내력이 있는 편도선염 때문이었다고 하고 혹자는 강도들의 짓이었다고도 하고, 무관심하던 재정문제 때문이었다는 전기작가의 추정도 있었다.

    그에 비해 바사리는 그의 재능을 질투하던 사람들에 의한 독살 의혹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브루넬레스키는 마사치오의 죽음을 전해 듣자 " 우리는 마사치오를 잃었다 " 고 크게 한탄했다. 

     

     

    Autoportrait ( 1420 )

     

     

    바사리에 의하면 마사치오가 묘지도 없이 카르미네 교회에 안장된 것은 1443년의 일이다. 

     

     

     

    출처>  위키백과 이탈리아 - 마사치오

               1[Daum백과] 마사초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 김영은, 청아출판사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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