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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메디치가의 지배와 자본주의의 발전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3. 1. 09:50

     

    메디치가의 지배

    이러한 민중정부가 진압되고 난 뒤의 피렌체는 치옴피 반란 이전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야 할 입장에 서게 되었다. 다시 지배권을 장악한 것은 이른바 포폴로 그라쏘popolo grasso(대시민)들이었다. 종전과 비교해서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정치권력을 전체 시민계급이 아니라 몇몇 부유한 집안이 행사하고 또한 그들이 장악한 권력이 더이상 심각하게 위협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한 세기 동안은 이들 부호집단은 그들이 위험하다고 느끼고 혁명적 운동이라고 간주되는 일체의 정치적 운동은 지체없이, 그것도 크게 힘들이지 않고 진압하였다.  알베르티가, 카포니가, 우자노가, 알비찌가와 이들 가문의 추종자들이 비교적 단기간에 걸친 지배가 끝난 후에 드디어 권력을 잡은 것이 메디치가였다. 메디치 지배하에서는 중산층의 일부가 아직도 적극적인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경제적 특권을 누리며 정부권력의 주축을 형성해서 적어도 시민계급의 테두리 안에서는 어느 정도 사회정의를 실현하였으며 대체로 나무랄 데 없는 수단으로 정치를 하기는 했지만, 종전과 같은 의미의 민주주의라는 말은 이제 떳떳하게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부터 매우 제한되어 있던 민주주의는 메디치가의 지배하에서는 그 내용이 더욱더 엉성하고 빈약해져서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제 기본법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서도 변동되는 일이 없이 오히려 악용되었으며 투표함은 조작되고 관리들은 매수되거나 공갈, 협박을 받아서 길드 프리오르들은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꼭두각시 신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문벌사회의 우두머리가 지배하는 일종의 비공식적 독재에 지나지 않았고, 이 가문의 우두머리는 밖으로는 단순히 한 사람의 시민으로 자처했으나 실제로는 비개인적, 형식적 공화국이라는 가짜 간판 뒤에 본래의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1433년 코시모 메디치는 정적들에게 추방되어 피렌체 역사에서 너무나 잘 알려진 사건인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다음해 망명에서 돌아와서 그후부터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다시 절대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그전에 이미 두 번이나 역임했던 도시장관직에 자신을 또다시 선출되도록 해서 2개월 동안 그 직에 머물렀다. 그래서 총 6개월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막후에서 자신의 부하들을 내세워 통치하면서 특별한 공식적 칭호나 직위 또는 권위도 없이 순전히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피렌체를 지배했다. 15세기에 이르러 피렌체에서는 과두정치에 뒤이어 드디어 위장된 형태의 군주정치가 생겨났는데 그후부터 곧 실질적인 군주정치가 아무런 마찰도 없이 순조럽게 등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메디치가가 그들의 정적과의 투쟁에서 소시민 계층과 손을 맞잡았다고 해서 그들의 위치에 본질적인 변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메디치가의 지배는 비록 겉으로는 가부장적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그 본질에서는 종전의 과두정치보다도 오히려 더 파당적이고 전횡적이었다. 국가는 단순히 특정 개인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가 코시모의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단순히 자기 대신 남을 앞에 내세워 통치하게 하고, 이 목적을 위해서 젊고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했다는 뜻일 뿐이다. 

    자본주의의 발전

    비록 주민들 대부분에게는 강요된 평화와 안정이었지만 15세기 초반부터 이러한 평화와 안정 속에서 피렌체는 새로운 번영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 번영은 코시모 재임중에슨 이렇다 할 위기 없이 그런대로 순조롭게 지속되었다.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노동자 파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규모가 크지도 않았고, 오래가지도 않았다. 이때 피렌체는 경제적 잠재력이 최대한도로 개발되어 경제번영의 정점에 도달한다. 

     

    Detail of <The  Temptations of Christ>, fresco,  Sandro Botticelli , executed in 1480–1482.

     

    매년 1만 6천 필의 천이 베네치아로 수출되었고, 피렌체의 수출업자들은 이 목적을 위하여 그들이 정복한 피사 항구와 1421년 이후 10만 굴덴을 주고 사들인 리보르노 항구를 이용하였다. 피렌체가 온통 승리감에 들뜨고, 사업으로 치부한 지배층이 왕년의 아테네에서의 시민계급처럼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려고 했던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로렌조 기베르티는 1425년 이래 피렌체 세례당의 화려한 동쪽 현관문을 만들었고,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가 리보르노 항구를 사들인 해에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계획해서 완수하도록 위촉 받았다. 피렌체 시민들은 그들의 도시를 제2의 아테네로 만들려고 하였다. 피렌체 상인들은 점차 오만불손해져서 이제는 외국과의 의존관계에서 완전 탈피하여 자급자족적인 경제체제, 즉 증가하는 생산에 맞게 국내 수요를 확대하는 경제정책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13세기와 14세기를 경과하면서 자본주의의 근본 구조가 본질적인 변화를 겪었다. 원시적인 영리추구 대신에 합목적성, 계획성, 타산성이 더 지배적으로 되었고 처음부터 영리경제의 근간을 이루었던 합리주의 정신은 이제 철저한 합리주의로 변하고 말았다. 선구자적이었던 기업가 정신은 초기의 낭만적, 모험가적, 약탈자적 성격을 탈피하여 한때의 정복자가 이제는 조직가 겸 계산가, 즉 조심스럽게 계산하고 신중하게 사업을 계획하는 상인이 되었다. 르네상스 경제의 새로운 점은 합목적성 그 자체라든가 한층 더 목적에 부합되는 더 나은 생산방법이 알려지는 즉시 재래적인 생산벙법을 포기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재래의 전통까지도 주저없이 희생시키는 그 철저함과 일체의 경제생활의 요인을 수적으로 계량화해서 장부에 기입하는 비정할 정도의 객관성에 있다. 상품유통의 증대로 생겨난 경제상의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철저한 합리화 과정 덕분이었다. 생산의 향상을 위해서 노동력의 한층 집약적인 이용과, 분업의 발전 및 노동방법의 점진적인 기계화가 요구되었다. 여기서 기계화라 함은 기계의 도입만이 아니라 인간노동의 비인격화, 노동자를 그가 이루어 놓은 성과에 의해서만 평가하는 면까지도 말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시대의 경제사상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바로 이런 비정한 물질주의적 사고방식인데 이 사고방식은 인간을 그의 성과로, 그의 성과를 화폐가치(임금)로 환산해서 이 양자를 동일시 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노동자를 단순히 투자와 수익성, 이익 가능성과 손실 가능성, 그리고 차변과 대변이라는 복잡한 체계속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합리주의를 가장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종전의 도시경제의 본질을 이루었던 수공업적 성격이 이제는 완전히 상업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업화 과정의 본질은 기업가의 활동에서 점차 손으로 하는 일이 적어지고 그 대신 계산적이고 추론적인 요소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는 사실뿐 아니라, 기업가가 새로운 가치를 만드기 위해 반드시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자본주의 경제원칙을 인식하고 있다는 데 있다. 당시의 새로운 경제정신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변하는 시장 가치라는 허구적 존재양식에 대한 기업가들의 이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한 상품의 가치가 전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복이 있으며 상품의 가치가 오르내리는 것은 상인의 주관적인 선의나 악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정한 객관적인 상황정세에 따른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공정한 가격'이라는 개념과 이자에 대한 그들의 회의에서 볼 수 있듯, 중세인들은 가치를 하나의 실제적이고 언제나 고정되어 있으며 상품에 이미 내재된 성질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경제의 상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르네상스인들은 비로소 상품가치의 실제적인 기준과 그 상대성, 그리고 도덕과 상관없는 가치의 성격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의 자본주의적 정신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영리추구를 위한 노력과 이른바 '중산층의 미덕' 그리고 영리욕과 근면, 절약성과 정직성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새로운 미덕체계도 사실은 보편적인 합리화 과정의 또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부르주아 미덕의 특징으로 꼽히는 사회적 신용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이 합리적인 공리성을 고려한 데에서 나온 것이고, 존경할 만한 인격이라는 것도 상거래의 연대책임과 신용으로 이해했으며, 성실이란 다름아닌 바로 신용능력을 뜻하는 것이었다. 140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합리적인 생활태도의 원칙이 금리생활자의 이상으로 바뀌어가는데, 이때부터 시민계급의 생활은 봉건귀족의 생활방식과 비슷한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이러한 발전은 세 단계를 거쳐 이루어진다. '자본주의의 영웅시대'에 나타나는 기업가는 호전적인 정복자 유형인데 이들은 비교적 안정되었던 중세의 경제적 테두리에 안주하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모험에 나서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유형의 시민계급은 그들과 적대관계에 있는 귀족이나 라이벌 관계에 있는 자치도시, 아니면 그들에게 비우호적인 항구도시에 대항해서 실제로 무기를 들고 직접 싸웠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이 어느정도 소강상태로 들어가고 상품유통이 확실한 경로를 통하여 원활하게 이루어짐으로써 생산의 체계화와 향상이 가능해지고 또 필요하게 되자 초기의 낭만적 특성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들의 생활도 철저히 합리적인 생활계획에 의해 제어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경제적으로 안정되었다고 느끼게 되자 초기의 시민적 도덕질서는 해이해지고 드디어는 날이 갈수록 향락적인 여가와 아름다운 삶의 이상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와같이 시민계급이 점점 비합리적인 생활양식을 취하게 되는 바로 그 무렵에 봉건영주들은 점차 견실하고 신용있는 상인의 경영원칙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궁정사회와 시민사회가 길의 중간에서 서로 만나게 된 셈이다. 영주들은 점점 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 반면에 시민계급은 점점 더 보수적이 되어 중세의 궁정적, 기사적 이상이나 중세의 고딕적, 정신주의적 이상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민적 예술의 발전 속에서도 결코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던 그 이상들이 다시 전면에 드러나도록 후원, 장려하게 된 것이다. 

     

     

    출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아르놀트 하우저

    이미지 출처> 야후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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