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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적인 명성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28. 09:25

     

    지금까지 서술한 개인의 발전과 잘 어울리는, 새로운 종류의 인정받는 방식이 생겨났으니 곧 현대적인 명성이다.

     

    14세기 명성 개념

    이탈리아 바깥에서는 여러 계급들이 각기 자기 계급에 어울리는 중세적인 계급 명예심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음유시인과 연가시인으로서의 명성은 오로지 기사 계급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그에 반해서 이탈리아에서는 전제군주 아래서나 아니면 민주주의 체계에서 각 계급이 평등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은 이탈리아 문학과 라틴어 문학에 기반을 둔 보편적인 사회의 첫 흔적들이다. 이러한 토양에서 비로소 저 새로운 삶의 요소인 명성이 싹틀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열심히 탐구하였던 로마시대의 시인들이, 명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고, 거기 탐닉하였다는 점과 그 내용이 - 로마의 세계 지배 - 이탈리아라는 존재에 지속적인 비교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덧붙여진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모든 의지와 성취는 서양의 다른 지역에서는 알지도 못하는 도덕적인 전제 조건에 지배되었다. 다른 모든 본질적인 질문들의 경우에도 그렇듯이 우선 단테의 말부터 들어보기로 하자. 그는 영혼의 모든 힘을 대해서 시인의 월계관을 추구하였다. 출판자와 문필가로서 그는 자신의 업적이 새로운 것이며, 이 분야에서 최초의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했다. 그러나 산문 작품들에서 그는 높은 명성의 불편함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유명한 인물인 자신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으면서 불만스러워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 때로는 사람들의 유치한 환상이 때로는 질투심이 그리고 때로는 당사자 자신의 불순함이 이유가 된다고 분석했다. 그의 위대한 시 작품은 명성의 무상함에 대한 통찰을 완전하게 포착하고 있다. 비록 그 자신의 마음이 명성을 향한 동경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지만 말이다. 그러나 대단히 주목할 만한 일이지만 지옥에 있는 가련한 영혼들은 단테에게 그가 지상에서 자기들에 대한 기억과 자기들의 명성을 새롭게 일깨워주기를 부탁하고 있다. 그에 반해 연옥에 있는 사람들은 소청기도만을 부탁하고 있다. 그 유명한 구절에서 명성을 향한 정열 - 빼어남을 향한 큰 소망 gran disio dell'eccenlenza - 은 정신적인 명성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에 종속되는 것이며 상황에 따라서 더욱 위대한 후계자에게 추월당하고 빛이 흐려진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비난을 받고 있다. 단테의 뒤를 이어 나타나는 시인, 철학자들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명성을 누렸다. 그들 자신이 직접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정받는 유명인사가 되었고, 동시에 시인이자 역사 서술가로서 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명성을 조정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종류의 명성의 극단적인 상징으로는 특히 계관시인 대관식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 언급될 것이다. 

     

    Giorgio Vasari, Portrait of six Tuscan poets, olio su tela, 1544

     

    단테와 동시대 사람이었던 알베르티누스 무사투스Musattus 혹은 무싸투스Mussatus는 파도바의 주교이자 대학교 학장이었고 계관시인이었다. 그는 거의 우상화라고 할 만한 명성을 누렸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날이면 대학교와 교구의 박사들과 학자들이 악대를 동반하고 화려한 행렬을 이루어 나타나서 그의 집 앞에 촛불을 밝히곤 하였다. 그에게 인사를 드리고 선물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 장엄한 행사는 그가 전제군주였던 카라라 가문의 노여움을 살 때까지 계속되었다. 

    페트라르카(1304~1374) 역시 오직 영웅과 성자들만이 누리던 찬미를 누렸는데 말년에는 이런 찬미가 허무하고도 부담스러운 동반자로 여겨질 정도였다. <후세에 보내는 편지>는 대중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야 하는 이 유명한 노인의 답변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은 후세인들 사이에서는 명성을 누리고 싶지만 동시대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것을 거절하고 싶다고 쓰고 있다. 행복과 불행에 대한 대화에서 그는 명성의 항목에 이르러 명성의 허무함을 증명하는 반대의 목소리에 더 강세를 두고 있다. 그렇지만 자기 작품들을 통해서 카를 4세가 자신을 잘 알고 있듯이 비잔틴의 동로마 황제도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페트라르카가 기쁘게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그것을 엄하게 판단해야 할 것인가? 사실상 그의 명성은 생전에 이미 이탈리아 경계선을 훨씬 넘어섰다. 그가 고향인 아레쪼를 찾아갔을 때 친구들이 그를 자신의 생가로 이끌고 가서 아레쪼시는 이 집에 있는 그 무엇도 변하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감동을 받지 않았겠는가! 그 전까지는 위대한 성인들의 집, 예를 들면 나폴리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방, 아씨지의 성 프란체스코의 포르티운쿨라 교회 같은 곳만 소중하게 보관되었다.

     

    Petrarca

     

    사후 명성으로서의 무덤과 묘비

    유명한 사람들의 무덤 숭배도 일종의 생가 숭배에 속한다. 페트라르카가 죽은 장소도 숭배의 장소가 되었다. 아프콰토Arquato는 파도바 사람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즐겨 찾아와 머무는 곳이 되었고 화려한 건물들로 단장되었다. 같은 시기 북방에서는 고전 작가의 장소라 할 만한 것이 없었고, 오로지 성화들과 성물을 향한 순례만 존재하던 때였다. 도시들은 자기 지역 출신이나, 다른 지역 출신 이나, 다른 지역 출신 유명인사의 유골을 간직하는 것을 명예로 여겼다. 14세기에 이미 피렌체 사람들이 자신들의 대성당을 판테온(명사들의 기념묘지)로 만들려고 얼마나 진지하게 애썼던가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코르소,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그리고 법학자 자노비 델라 스트라다 등의 묘지를 이 대성당에 안치하려 했던 것이다. 뒷날 15세기에도 로렌조 일 마니피코는 손수 나서서 화가 필리포 리피의 시신을 피렌체 대성당에 안치하도록 스폴레티움 사람들에게서 양도받으려 애썼지만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었다. 스폴레티움은 장식품이 넘쳐나는 편이 아니고 특히 유명인사들은 더더욱 부족하다. 그러나 부디 양해 하시라고. 그래서 피렌체는 기념비를 세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단테도 보카치오가 아주 신랄한 비난을 퍼부으며 고향 도시를 선동하면서 온갖 노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라벤나의 성 프란체스코 교회에 잠들었다...

    이제 이탈리아 도시들은 고대 로마 시대에 자기 지역의 거주민이었던 사람들도 기억하게 되었다. 나폴리는 베르길리우스의 무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이 이름에는 신화적인 개념이 결부되었기 때문이다. 파도바는 16세기에도 트로이아 영웅이었던 이 도시의 건설자 안테노르의 유골을 보관하고 있으며, 티투스 리비우스의 유골도 보관하고 있다고 전적으로 믿었다...14세기 만토바 사람들은 동전에 베르길리우스의 흉상을 새겼고, 그의 조각상을 도시에 세웠다. 당시 곤자가의 후견인인 카를로 말라테스타는 중세 귀족의 오만함으로 1392년에 이 조각상을 없애 버리라고 명령했으나 곧 그것을 다시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코모는 플리니우스 부자를 자기 것으로 삼았고, 15세기 말에는 화려한 천개를 씌운 좌상을 대성당에 세워 그들을 기렸다. 

    유명한 인물들

    역사 서술과 새로 생겨난 지방학은 더욱더 지역 출신들의 명사를 기록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북유럽 연대기들은 아직도 교황들, 황제들, 지진과 혜성들을 기록한 사이로 이따금씩, 이 시대는 이런저런 유명인사가 "피어났다" 고 기록하던 시대였다. 명성의 개념이 확실하게 드러난 가운데 탁월한 전기 서술이 발전하는 과정은 다른 기회에 관찰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자기 도시의 유명인사를 기록한 지방학자의 지역 애국주의에 국한해서 관찰해 보자.

    중세에 도시들은 각 지역 출신의 성자들과 교회 안에 이 성자들의 시신과 유품을 간직한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1450년경 파도바의 찬가 작가였던 미켈레 사보나롤라는 우선 성자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성자는 아니지만 탁월한 정신과 높은 힘으로 성자들의 반열에 들게된 유명한 사람들"을 꼽았다.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 신인神人의 경계에 섰던 것과 같은 이치다. 그 다음 이어지는 인물은 이 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프리아모스의 형제였던 안테노르는 한 떼의 트로이아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파도바를 세웠다는 인물이다. 다르다누스 왕은 유가네이 산에서 아틸라를 패퇴시킨 다음, 리미니에서 때려 죽였다. 다음은 대성당을 건립한 황제 하인리히 4세, 마르쿠스라는 왕, 다음으로는 성직, 신학교, 교회를 세운 몇몇 추기경과 고위 성직자들,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유명한 신학자 수도사 알베르토. 파올로 베네토와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피에트로 아바노로 시작되는 철학자 명단, 법학자 파올로 파도바노, 다음으로 리비우스와 시인 페트라르카, 무싸투스, 로바토. 전쟁 명사들의 항목에서 어느 정도 결핍이 느껴진 듯 저자는 학자들과, 훨씬 더 오래 지속되는 정신적인 명사들을 보충함으로써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 전쟁에서의 명성을 죽으면 바로 묻히는 것이고, 만약 그것이 지속될 경우는 어디까지나 학자들의 덕을 입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쨌든 유명한 외국의 전사들이 스스로 원해서 이 땅에 묻혔다면 그것도 도시의 명예가 되는 일이다. 그래서 파르마 출신 피에트로 드 로씨, 피아첸차 출신 필리포 아르첼리, 특히 나르니 출신의 가타멜라타 등의 명단이 나타난다. 가타멜라타의 청동 기마상은 "승리한 카이사르처럼" 산토 교회 앞에 세워졌다. 그런 다음 저자는 법학자와 의사들, 귀족들의 명단을 늘어놓는다...그 다음에는 유명한 기계공, 화가, 음악가 등의 명단이 나온다. 미켈레 로쪼라는 검투사가 맨 마지막에 나타난다. 그는 자기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여러 지역에서 초상화로 그려진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명성의 분배자인 인문주의자

    이러한 지역적인 명예의 전당들은 신화, 전설, 문학적으로 산출된 명성, 인기, 인기 있는 경탄 등이 함께 작용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들 말고도 시인, 문헌학자들은 세계적 명성이라는 보편적 판테온도 건설하였다. 그들은 인물을 모아놓은 책을 펴냈다. 유명한 남자들, 유명한 여자들을 모아 놓은 책. 때로는 코르넬리우스 네포스, 가짜 쉬토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플루타르크, 히에로니무스 등에서 직접 자료를 의존한 책들도 나왔다. 그들은 또한 승리 장면들을 눈에 보이듯이 묘사하고 이상적인 올림피아 모임을 시로 써냈다. 페트라르카는 Trionfo della fama>에서, 보카치오는 <사랑스러운 환상 Visione amorosa>에서 수백 명의 이름들을 불러내고 있다. 그들 중 적어도 4분의 3은 고대에, 나머지는 중세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이 새로운 그리고 비교적 현대적인 성분인 명성은 점점 더 강조되어 취급된다. 역사 서술자들은 인물 묘사를 작품에 도입했고, 유명한 동시대 사람들의 전기를 모은 책들도 나타났다...

    이탈리아가 영향을 주기 전까지 북부 유럽은 성자들의 전설, 개별적인 역사 서술, 그리고 아직도 전설에 가까운 영주와 성직자들에 관한 묘사들밖에는 모르고 있었다. 명성, 곧 개인적으로 만들어낸 유명함과는 전적으로 무관했다. 시인으로서의 명성은 특정 계층에만 한정된 것이었고, 북부 유럽의 예술가들의 이름은 기술자나 직공 조합에 소속된 경우에만 알려져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시인, 문헌학자는 자기가 명성, 즉 불멸성을 발급해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망각을 발급해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보카치오는 자기가 찬미한 미인에 대해서 탄식하고 있다. 그녀는 냉혹하기만 해서 언제까지나 자신의 찬미를 받고 그럼으로써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부터는 비난을 계속함으로써 그녀를 유명하게 만들어보겠노라고 암시한다. 산나자로는 두 개의 소네트에서, 프랑스왕 샤를 8세 앞에서 비겁하게 도망친 나폴리의 알폰소에게 영원한 망신을 주겠다고 위협하고, 안젤로 폴리지아노는 포르투갈 왕 후안에게 아프리카 발견과 관련해서 늦기전에 명성과 불멸성을 얻기 위해 애써야 하는 만큼 피렌체에 있는 자기에게 양식화할 자료를 보내 달라고 진지하게 경고하였다(1491). 그러지 않으면 왕은 "부서지기 쉬운 인간성이라는 거대한 쓰레기 더미에 감추어져 버린" 사람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고 했다...얼핏 보아 이런 요구들이 공허할 것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공허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런 내용들이 동시대와 후세에 전달되는 방식을 편집하는 것은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은 일은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의 서술 방식과 라틴어 문장들은 오랫동안 서양의 독서계를 지배하였고, 이탈리아 작가들은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다른 어떤 민족의 작가들보다 더 널리 읽혔다. 피렌체 출신인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세례명은 그가 쓴 여행기로 인해 네 번째 대륙의 이름이 되었다. 파올로 조비오는 덧없고도 우아한 제멋대로의 특성을 가졌으면서도 스스로에게 불멸의 명성을 약속하였는데, 그 점에서 완전히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명성을 보장해주는 이러한 방식들 이외에도 이곳저곳에서 휘장을 걷고 보면 그 대상 및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위대함을 향한 어마어마한 욕구와 갈증이 놀랄 만큼 진실한 표현을 얻은 것을 보게 된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역사 서문에서 쓴 것도 그런 표현의 하나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선배들이 도시의 파당 문제에 대해서 이것저것 지나치게 고려해서 침묵한다고 비난한다. "그들은 인간의 명예욕과 이름을 남기려는 욕구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찬양할 만한 일을 해서 남보다 두드러지기가 어려운 사람들 중 일부는 수치스러운 행동을 통해서라도 그것을 쟁취하려고 한다! 위의 저자들은 섭정과 통치 행위의 경우처럼 그 자체로 위대함을 지닌 행위들은 어떤 종류가 되었든 어떤 결말을 낳든 상관없이 질책보다는 명성을 가져오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 사려 깊은 역사 서술자들이 두드러지게 ㄴㄴ에 띄는 깜짝 놀랄 만한 시도들을 묘사하면서, 위대하고 기억할 만한 행위에 대한 불타는 욕구가 이런 행위의 동기라고 설명한 경우가 여러 번이나 있다. 여기서는 보편적ㅇ니 허영심이 악화된 형태가 아니라 정말로 악마적인 요소가 선을 보인다. 다시 말해서 극단적인 수단을 선택하고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명성 자체를 위해서) 그런 행위를 결심하는 경우이다. 마키아벨리는 스테파노 포르카리의 성격을 이런 식으로 파악하였다.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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