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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황국과 그 위기 I
    이.탈.리.아 역사/르네상스 rinascimento 2020. 2. 18. 22:28

     

    교황국

     아주 예외적인 존재로서 교황 제도와 교황국은 이탈리아 국가들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서 지금까지는 오직 부수적인 관심만을 끌었다. 보통 이탈리아 국가들을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 즉 권력 수단을 의식적으로 강화하고 집중화하는 일이 교황국에서는 극히 드물게 나타났다. 종교적인 힘이 세속적 힘의 부족을 끊임없이 감싸고 보충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성되어 있던 국가가 14세기와 15세기 초에 얼마나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했던가. 교황이 남프랑스 국가에 붙들려 가자 (교황의 아비뇽 유폐 1309~1377)처음에는 모든 것이 해체되었다. 그러나 아비뇽은 돈과 군대를 가졌고, 교황국을 다시 완전히 굴복시킨 위대한 정치가이자 전사를 가졌다. 바로 에스파냐 사람 알보르노즈Albornoz 1310~1367 였다. 교회의 분열이 나타나고 로마의 교황도 이비뇽의 교황도, 다시 잃어버린 국가를 되찾기에 충분한 돈을 갖지 못했을 때 최종적인 소멸의 위험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우선 교회의 통합이 성취된 다음 마르티누스 5세 아래서 국가를 다시 되찾았고, 에우게니우스 4세 때 또다시 분열의 위험이 있었으나 그래도 교황국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만 교황국은 이탈리아 나라들 사이에서 완전히 변칙적인 국가로 남았다. 로마와 그 주변에서는 위대한 귀족 집안인 콜론나, 사벨리, 오르시니, 안귈라라 등이 교황국에 반발하였다. 움브리아와 변경지대, 로마냐 등지에는 도시공화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독자적인 힘으로 서 있는 특수한 왕국들로 각자 특별한 이해관계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교황국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15세기 중반 이후 주목할 만한 새로운 위기와 위험들이 이 나라를 덮쳤다. 이탈리아의 정치 정신이 여러 방향에서 이 나라를 장악하고 이성理性의 길로 교황국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여러 위험들 중에 가장 큰 위험은 교황들의 품성이었다. 

     

    교황국에 맞선 모반들

     외부의 도움을 받을 전망이 거의 없었는데도 가장 큰 위험은 교황국 내부에서 생겨났다. 교황국이 본질적으로 세속적인 이탈리아 군주국의 정신으로 행동함으로써 교황국은 그토록 절망적인 순간들을 맞게 된다. 교황국 특유의 본성이 전혀 다른 그림자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우선 로마시에 대해 살펴보면, 교황국은 로마시의 소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국민의 소요를 통해 쫓겨났던 몇몇 교황이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고 로마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교황청이 존재하기를 바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는 이따금 반교황적인 과격주의를 발전시켰다. 거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외부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교황 피우스 2세는 카틸리나 무리와 싸워야 했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이 사제 통치의 붕괴라는 사실을 감추지도 않았다. 부유한 성직자들의 궁전에 어떠한 약탈물이 있었던가를 생각해보면 거의 경비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 도시에서 그런 시도들이 더 자주,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진다. 피우스 2세가 로마 이외의 다른 곳에 머물기를 좋아했던 것이 우연만은 아니었다. 교황은 언젠가는 그런 습격에 굴복하든가 아니면 귀족 패거리들을 제압해야만 했다. 이들 패거리의 보호 아래서 '도둑떼'가 자라나고 있었다. 

     

    성직 매매와 친척 등용

    식스투스 4세(재위 1471~1484)는 교황국을 수호하는 의무를 자신에게 부과하였다. 그는 우선 완전히 폭력을 써서 로마와 그 주변을 차지 했고, 특히 콜론나 일파를 박해한 이후로 교황국이나 이탈리아 정치 사건들에서 대담한 고집으로 일처리를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서양 전체의 고발과 공의외희 위협을 못들은 척 했다. 필요한 돈은 성직 매매를 갑작스럽게 무제한 늘려서 얻을 수 있었다. 

     

    Pope Sixtus IV seated with his four standing nephews, Melozzo da Forli, Vatican Library in Rome, 1480-82, 

     

     그것은 추기경 임명에서부터 지극히 하찮은 은사와 허락까지 모든 것을 다 포함하였다. 식스투스 자신도 어느 정도 매수를 통해 교황의 직위를 얻었다. 이런 매매 행위는 로마 교황국에 나쁜 운명을 불러들였지만 아직은 먼 훗날의 일이었다. 그러나 친척 등용의 경우는 달랐다. 식스투스 4세의 조카 피에트로 리아리오와 밀라노 갈레아쪼 마리아 공작이 교황을 세습제로 바꾸고, 결과적으로 교황국의 세속화를 초래 할수 있었던 계획은 리아리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두 번째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는 세속의 지위에 머물면서 교황국에 관여하지 않았으나 지롤라모 이후로 교황의 친척들은 거대한 영주권을 추구함으로써 이탈리아의 혼란을 더욱 부추겼다... 살아있는 교황도 언제까지 아들이나 조카를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의 친척을 통해 전임자의 친척을 몰아내려는 유혹이 생길 것도 분명했다. 이런 사정이 교황국에 미치는 반작용은 심각했다. 종교적인 강제 수단이 전혀 거리낌 없이 극히 이중적인 목표를 위하여 이용되었다. 사도 베드로의 자리, 곧 교황 직위의 다른 목표들이 모두 이 목표에 종속되었다. 

     식스투스가 죽었을 때 지롤라모는 필사적인 노력과 스포르짜 가문의 보호를 통해서만(아내가 스포르짜 가문) 자신이 사취한 포를리와 이몰라 영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뒤이은 교황 선출 회의에서(1484) - 여기서 인노켄티우스 8세가 뽑혔다 - 교황제도를 외적으로 보증해주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새로이 나타났다. 영주 집안 왕자 출신인 두 명의 추기경이 뻔뻔스러운 방식으로 돈과 직위를 받고 협조를 약속하였다. 나폴리 페란테왕의 아들인 아라곤의 조반니와 밀라노 로도비코 일 모로의 형제인 아스카니오 스포르짜였다. 

     로렌조 일 마니피코 역시 메디치 가문이 아무것도 얻지 않고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딸 마달레나를 교황의 아들과 결혼시키고, 아들인 조반니 추기경(미래의 레오 10세)와 사위의 출세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식스투스가 은총과 직위를 팔아 돈을 모았다면, 인노켄티우스와 그 아들은 세속적인 은총을 파는 회사를 설립하였다. 그곳에서는 요금에 따라 살인도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인노켄티우스 마지막 몇년 동안 로마에는 교황의 보호를 받는 살인자들과 받지 못하는 살인자들로 들끓었다. 

     

     

    인물소개 :

    식스투스(식스토) 4세 https://ko.wikipedia.org/wiki/교황_식스토_4세

    인노켄티우스(인노첸시오) 8세 https://ko.wikipedia.org/wiki/교황_인노첸시오_8세

     

    출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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