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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키아벨리Macchiavelli의 사상과 문학
    이.탈.리.아 문화/문 학 lettere 2020. 2. 4. 14:21

     

     

     마키아벨리만큼 분분한 논란을 일으킨 사람은 일찌기 아무도 없었다. 정치적으로는 격동의 회오리바람이 거세게 일고, 문화적으로는 문예 부흥의 화려한 꽃이 피어오르는 일종의 모순과 갈등에 처해있던 시기에 그는 피렌체에서 태어났다(1469). 그가 정치 생활을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물 아홉이 되었을 때 2등 서기국에 발탁되면서부터였다. 인문주의 교육의 바탕에다 현실주의적인 역사 사회관에 입각하여 자신의 사상을 실현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비록 내무와 병무를 주관하는 부서의 서기였지만 그의 해박한 지식은 그로 하여금 외교 문제를 담당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리하여 그는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피렌체와 이웃하고 있는 주변 국가들을 자주 왕래하면서 그의 지식을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프랑스 견문기>, <영국 견문기>, 나아가서 <로마사론> 등은 이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를 가리켜 근대 정치학의 시조라 말한다. 이러한 평가는 시대를 거듭할수록 그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는데, 연구를 하다 보면 단순히 근대 정치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것 보다는 참다운 근대 정신이 그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중세의 도그마에서 이성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새로운 시대의 출현을 암시했던 페트라르카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키고 시민 정신을 일깨워 시민 사회의 자아 의식을 고취시킨 업적은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마키아벨리의 시대는 격동적인 변화를 치르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그가 정치학의 (근대적인)시조가 됐다는 것은 그가 정치학이라는 학문을 창설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치를 새로운 차원에서 다루었다는 뜻이다. 즉 정치를 윤리와 결부시키는 종래의 태도를 버리고, 윤리와 분리된 독립적인 영역으로 정치학을 다룬 것이다. 윤리적 삶을 지배하는 법률과 정치적 삶을 통치하는 법률은 별개의 것이라는 이론을 마키아벨리가 제일 먼저 터득했으며 발전시켰다. 윤리적 삶을 지배하는 법률은 윤리와 종교에 기반을 두고, 정치적 삶을 통치하는 법률이란 힘과 유용성에 바탕을 둔다고 보았다. 

     역사학자 페데리코 샤보는 <르네상스와 마키아벨리> 라는 책에서 시민 정신의 발로라는 문제를 특히 강조하면서 그를 르네상스의 완성자적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르네상스는 그 개념을 우리가 제4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실상 자연과 인간을 다룸에 있어서 신학상의 모든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현실을 준엄한 칼날의 치수로써 재는 데 그 의의와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니 만큼, 마키아벨리가 당대의 역사가 구잇치아르디니와 같이 현실주의에 입각한 사상을 중하게 여기고, 정치적 삶의 현실을 어떤 현상이나 상상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직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는 그의 역사학적인 저술은 물론 문학적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군주론>에서도 실재적인 요소들만을 다루고 있다. <군주론>의 헌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군주의 은총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나 혹은 군주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찾아 가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이나 무구, 금박이 비단이나 값진 보석, 또 그 분의 존엄함에 합당하는 장신구들이 그분께 헌정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저로서도 전하에 대한 충정의 징표를 드리고자 하는 데, 제가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 근래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오랜 경험과 고대에 관한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터득한 위대한 인간의 행적에 관한 지식보다 소중하고 값진 것은 없기에 본인이 장구한 시간을 들여 연구한 지식을 이 작은 책으로 정리하여 각하에게 올리고자 합니다.  

     오로지 역사적인 실재 사실만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다룬다는 의미로 해석 할 수 있는 내용이다. 우리는 앞에서 시민 의식의 발로라는 점을 상기시킨 바가 있는데, 이 헌사를 대하면서 일단은 회의감을 버릴 수가 없다. 그것은 마키아벨리를 어느 편에서 바라보는 것이 합당한가 하는 문제와 맥락을 같이 한다. 부르크하르트 같은 학자는 군주의 면에서 바라보고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에서 그는 일단 마키아벨리의 애국적 사상을 인정은 하면서도 '그는 대중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고 위정자나 군주를 위해 혹은 친구들을 위해 펜을 들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점은 그와 정반대이다. 뒤에서 다시 밝히겠지만, 표면상의 이유로 완전히 메디치 가문의 로렌쪼 대제를 위한 것으로만 해석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군주보다는 민중의 편에서 그의 사상은 더 큰 환영을 받아 마땅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키아벨리 시대의 이탈리아가 분열의 고뇌를 감수하고 있었다는 것은 익히 아는 바이다. 온 국토가 도시 국가들로 나뉘어 뿔뿔이 통치되었기에 도시 국가 상호간에 극심한 알력과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피렌체는 그 중에서도 대표적이었다. 내적으로는 정파간의 피비린내 나는 대결에 시달렸고 외적으로는 피사, 시에나, 에밀리아 등 주변의 도시국가들과의 충돌로 인해 항상 어지러운 처지였다.

     

    Paolo Ucello's Battle of San Romano

     

     

     그러나 금융과 무역의 활성화로 인해 피렌체는 다른 어느 도시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하게 되었고, 아울러 지도 세력의 변화를 가져왔다. 혈통적 의미로만 규정되던 지배 계급이 이제는 신흥 부유층의 폭이 차츰 두터워짐에 따라 경제적 의미로 탈바꿈되고 있었다.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자들도 결국엔 이들 신흥 부자들과 밀접하게 결탁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직접 정치 일선에 나서기도 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그들의 사이에서 정치적 희생을 겪어야 했던 지극히 불행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강력한 통치자가 출현하여 분열을 막고 조국을 수호해 주길 간절히 열망했다. 유토피아적인 입장에서 조국의 통일을 주장했던 단테와는 달리 실재적이며 현실주의적인 태도로 전이탈리아의 통일을 꿈꾼 것이다. 특이한 사실주의 문학관을 정립시켜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 사상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데 상티스가 마키아벨리를 가리켜 이탈리아의 통일 사상을 제일 먼저 체계적으로 전개한 인물로 평가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의 공통적인 리얼리즘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마키아벨리는 상상에 의한 가공적인 어떤 실체들을 떠나서 '과거에 실재로 있었던 공화국들이며 군주국들을 연구대상으로 하여 실재 사건들을 현실감각에 의해 해석함으로써(사페뇨의 평) 어지러운 동시대의 고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러면 그의 특징적인 이론은 어떤가? 작품에 바탕을 두어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첫째로는 정치와 윤리와의 관계이다. 아니, 정치뿐 아니라 사회 생활 전반과 윤리와의 관계라 함이 보다 합당할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명제이기 때문에 윤리나 종교는 항상 관심권 밖으로 밀려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정치와 윤리는 따로 독립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에 의하면 정치란 더러운 것이다. 악적인 요소와 야합하려는 성향이 농후하고 특권계층의 전유물처럼 되어 버린 정치, 그것이 파생하는 제문제를 그는 역사의 실체에서 가려내 폭로하는데, 이것은 그의 시민 혹은 민중 의식의 발로에서 연유한다. 루소가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겉으로 보기엔 군주에게 자문을 주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지만, 사실은 민중에게 교훈을 준 위대한 공화주의의 지침서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민중을 보호하는, 그래서 민중과 공존을 꾀하는 정치 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이는 곧 민중 정신이 존중되는 정치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는 역설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민중에게 정치의 참상을 깨우치게 하려는 의도적인 암수를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법률의 문제다. 이것은 첫째 문제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윤리와 정치의 구분이라는 전제를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에 의하면 정치적인 법률은 윤리적인 법률을 무시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정치가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윤리적인 법률에선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가 모두 중요하지만 정치적인 법률에선 오로지 결과만이 중요하다는 것을 내세운다. 정치란 전쟁과 같이 승리적인 결과만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것이 곧 정의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째는 군대의 문제다. 마키아벨리는 군대가 반드시 시민 병제의 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군주가 용병에 의해 군대를 형성한다면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피렌체와 피사와의 싸움에서 생생하게 목격했던 것이다. 군대란 국가의 안보가 직결되어 있는 것이기에 다른 무엇보다도 큰 비중을 두어야 함을 역설하면서 그는 <군주론> 제 12 장에서 군대의 유형을 자국군, 용병군, 외국 원군, 혼성군 등으로 나눈 다음 각 유형의 군대가 지니고 있는 특성을 소상히 분석하고 아울러 당시의 군대 조직인 용병제에 대해서 힐난한 비판을 가한다. 군대란 돈을 주고 사서는 부패하기 마련이라고 갈파하며 그런 군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어느 군주든간에 용병군을 국가의 기초로 한다면 안정된 장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 그 이유인즉 용병제는 통제가 없고 야심적인 면이 있으며 규율도 없고 충성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료들 사이에는 용감하고 과감하지만 적들과 맞부닥치면 겁장이가 된다. 신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지니지 아니하고 이웃들에 대해선 신의를 지키지 않는다. 용병이란 평화시에는 군주에게 충성하고 있으나 일단 외국군이 쳐들어올 경우에는 그들의 거짓 충성심은 본색을 드러내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가 왜 이런 이론을 전개했을까? 이는 군주국이라는 정체를 부인하자는 데에 그 저의가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군주국엔 군주 스스로가 대장의 역할을 하지만 공화국에서는 시민을 대장으로 하기 때문이다. <전략론>을 비롯하여 <로마사론>에서도 그가 공화제를 이상적인 정치 제도로 내세우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이유이다.

     네째로는 군주의 자질에 관한 문제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도시 분권으로 고난을 겪고 있는 이탈리아를 구하고 통일하려면 냉혹한 현실을 극복하고 교활할 줄도 알며 대담하고, 또 목적을 위해서는 무자비 할 줄도 아는 강력한 군주가 출현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교황청에 대한 화살일지 모른다고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눈에는 교황청이 외국 군대를 불러들여 번영을 누리고 탐욕을 일삼던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아뭏든 군주론 후반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제 1 부인 1 장에서 11 장까지는 군주국의 여러 종류를 분석하고 비판한 반면, 제 2 부 12 장에서 14 장 까지는 군대의 종류를 다루고 있으며, 15 장 부터 24 장에 이르는 제 3 부에서는 군주가 지녀야 할 도덕적인 힘이 논의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 작품의 절반에 해당되는 이 3 부가 가장 핵심적인 사상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제 4 부에 해당되는 마지막 두 장은 그의 운명론을 다루고 있다.

     거듭 말하는 바이지만 군주의 자질이 논의되고 있는 제 3 부는 다른 어느 부분보다도 중요한데, 마키아벨리는 이 부분에서 충성심, 너그러움, 자율성 등의 덕성과 불충, 인색, 탐욕, 잔학성 등의 악성을 차례로 분석하면서 과연 군주가 지녀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를 종합해 볼 때 마키아벨리의 결론은 산소네가 평하듯이 정치적인 덕성은 도덕적인 덕성과 일치하는 것보다는 반대의 입장을 취하기가 십상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낙인을 찍어 악평하거나 도외시하던 풍조가 계몽주의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거세게 일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즘을 내세워 마키아벨리를 공박했던 자들은 그의 사상 속에서 도덕적인 빛을 발견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그를 악의 신봉자로 간주하는 과오를 범한 셈이다. 앞에서 밝힌 바와 마찬가지로 마키아벨리는 정치의 냉혹한 현실과 비리를 폭로하여 민중으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고 깨우치게 하려는 데 주안점을 두었던고로 그들은 마키아벨리의 참 사상을 터득하지 못한 것이다. 마키아벨리즘이란 마키아벨리적인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때는 군주론을 금서 목록에 넣었던 바티칸에서도 나중에는 그것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으니, 이 작품의 진가가 드디어 인정받게 된 하나의 용례가 된 셈이다. 르네상스의 핵심 사상인 인간 존엄성과 현실감이 박진감 있게 다루어져 정치학은 물론 인문 과학의 영역에도 마키아벨리의 영향이 미쳤다. 

     

    The guardian의 기사<Have we got Machiavelli all wrong?> 의 삽화 

     

     오늘의 이탈리아 소설계를 주도하고 있고 그 자신 마키아벨리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모라비아는 긍정적인 현실보다는 부정적인 현실을 문학적인 소재로 택하기를 즐긴다. 방황하는 지성인이라든가 섹스의 노예가 된 현대인, 그리고 폭력에 시달리는 사회 등등 그가 문학화하는 세계는 한 마디로 비참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윤리적인 작가로 규정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냉혹하고 잔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린다는 것은 악의 추종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 역설적으로 취한 방법이 될 수도 있으며, 모라비아 또한 이런 태도로 읽어야 할 작가라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도 마찬가지다. 전제 군주의 편에서 그에서 아첨을 떠는 것으로 평가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군주의 자질이란 이렇고 또 군주의 통치 방식이란 이렇다 하는 것을 민중에게 깨우치게 하려는 것이다. 단테나 보카치오가 독자들에게 위안감과 행복감을 느끼게 하려고 작품을 썼다면 마키아벨리는 그들을 개도하기 위해 모든 작품을 썼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가 어디에 있든지간에 그의 작품은 읽는 자에 따라 선적인 것도 될 수 있고 악적인 것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작품에서 악적인 요소를 끌어 내 그것을 실제 행동에 이식했던 역사적 인물들도 프리드리히, 히틀러, 무솔리니 등 허다했고 선적인 점들을 거울삼아 인류 역사에 크게 공헌한 인물들도 베이컨, 루소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문제는 작품을 어떤 각도에서 수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과 함께 몇 가지 괄목할만한 저서를 우리에게 남겨 놓았다. 정치학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첫 10권에 대한 논고>(간단히 로마사론이라고 한다), 역사학적인 작품으로 <피렌체사>, 문학적인 <만드라골라>, 그리고 전쟁에 관한 <전략론>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소품들이 있다. 편의상 정치, 역사 등으로 구분한 것이지 사실 모든 저술은 사회의 제반 문제를 두루 취급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로마사론은 1513 년에서 1521 년 사이에 집필된 일종의 정치학 해설서이다. 로마 시대의 역사 학자 티투스 리비우스가 저술했던 로마의 역사 전반부 열 권을 해설하면서 하나의 국가가 어떻게 형성되고 조직되며, 또 정복을 통해 어떻게 확장해 나가고 변형되며 멸망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실증적 예를 들어 논술하고 있다. 마키아벨리가 이 저술에서 특히 강조했던 것은 몇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는 하나의 국가를 세우는 데에는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해서는 안되고 오로지 한 사람의 업적에 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그 국가를 유지시키는 데 있어서는 여러 사람의 협동심이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세째로는 공화제의 옹호라 할 수 있다. 온 국민의 합심된 의지와 협력에 바탕을 두어 현명한virtuosi 자들이 위임받아 통치하는 공화제만이 참다운 정치제도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로마사론에 취급된 정치제도가 공화제에 국한 된 것이 아니다. 군주국도 공화제 못지않게 깊이 다루어져 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이상적으로 간주한 것은 공화제인데, 만일 공화제가 불가능할 경우에는 차선으로 군주제를 택해야 하되 이 군주제는 차차 공화제로 발전되어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개인의 전제적 정권에 매달려 있는 군주제보다는 전국민의 컨센서스를 바탕으로 둔 공화제에서 그가 염원했던 것은 국가의 존속과 비폭력적 통치, 그리고 자유로운 의견 일치를 통해 자유로운 인간들과 선량한 인간들로 구성된 이상적인 사회의 건설이었다. 마키아벨리는 폴리비우스의 정치 제도 순환 이론을 자신의 이론과 결부시켜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1. 선출된 의롭고 현명한 군주, 2. 세습 군주(이들은 폭군도 될 수 있음). 3. 보편적 선으로 통치하는 귀족, 4. 타락해 가는 집정자, 5. 잘 통치되는 공화국, 6. 타락해 가는 공화국, 정치 제도란 이상의 것들이 계속해서 순환되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러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 모두가 갖고 있는 장점들을 혼합해 놓은 하나의 완전한 공화제가 요청된다고 하였다. 

     사실 마키아벨리의 사상적 특질은 이상의 두 작품 속에 거의 다 투영되어 있으며, 다른 저술들은 그들의 보조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제부터 논하려는 다음의 저술들은 앞에서 살핀 두 작품들의 내용 중 어느 특정의 분야를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소간의 중복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전략론>을 보기로 한다. 원래의 제목이 Arte della guerra인 만큼 하나의 전쟁의 기술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1519 년에서 1521 년 사이에 집필된 이 저술은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 대화가 진행된 시기와 장소를 작가는 1516 년 피렌체로 상상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여기서 군대의 형성과 그 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군대는 반드시 시민 병제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군대에는 보병과 기병과 포병을 두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보병은 중추 신경으로 간주했고 기병은 그 보병의 부속 요소에 지나지 않았으며, 포병에는 중요성을 전혀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시민 민병제는 현실주의에 입각한 발상이었지만 당시의 현실을 무시한 처사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었다. 당시의 유럽 모든 국가들에서는 용병제를 채택하고 있던터라, 그의 이론이 환영받을 리가 없었고 군주제하의 봉건 영주들이 자신들의 사병처럼 부릴 수 있는 편의를 쉽사리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아울러 용병들 자신도 마키아벨리를 비난할 수밖에 없었다. 병역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되고 국가가 위난에 처할 땐 무기를 서둘러 들고 전쟁이 끝나면 자신들의 생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의견을 따를 때, 현존하는 용병들은 당장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역사가로서의 마키아벨리의 명성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지시켜 주고 있는 것은 두말 할 필요 없이 <피렌체사>에 의해서인데 이 저술은 그가 피렌체의 대학에서 위촉을 받아(1520) 4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한 작품이다. 그 때까지의 연대기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역사의 사실들을 서로서로 연관시켜 바라보는 연속성의 의식에서 그의 역사관은 혁신이었으며, 그의 뒤를 이은 귀치아르디니와 더불어 역사 기술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과거의 역사를 동시대의 제반 사실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하려는 그의 태도는 다분히 현실주의라는 자신의 철학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정치적 관심과 교육적인 목적 의식을 갖고 있었던만큼 작가의 주관적인 해석에 치우치는 면이 있어서 역사적 객관성을 소홀하게 취급하는 점도 없지 않았으나, 과거의 역사 기술서들에 비하면 객관적인 관점은 물론 체계면에서 단연 기념비적인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사 이외 역사에 관한 저술들로 루카의 영주 카스트라니의 삶이며, 체사레 보르지아의 치적 등을 다룬 작품들을 남기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순수 문학적인 작품들도 남기고 있다. 그 중에는 시도 있고 산문도 있지만 널리 인정 받고 있는 것은 <만드라골라> 라 할 수 있다.이 작품은 또 하나의 희곡 <클리치아>와 대화의 형식으로 쓰인 노벨라 <벨파고르>를 앞질로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만드라골라는 클리치아와 함께 산문체의 희곡이다.

     

     LA MADRAGOLA 의 공연 팜플렛  

     

     만드라골라Mandragola 는 5막으로 되어 있는 일종의 희극인데 골도니 이전까지의 이탈리아 희극 가운데 가장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서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현실주의와 비판적 운명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위선과 사기성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보며 마키아벨리는 이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곧 군주론에서 '모든 인간은 사악하고 변덕스러우며 위장적이고 위험에 직면해서는 겁장이가 되고 이익을 위해서는 탐욕스럽다' 고 본데서 벗어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만드라골라에 나타난 인간상을 볼 때 인간이란 악하고 신의를 나눌 수 없다는 비관론에 빠지게 된다. 

     

    2016 피렌체 테아뜨로 토스카나에서 공연 중인 만드라골라

     

     만드라골라는 특히 성격이나 관념에 있어서 로마의 희극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나의 광장이 있고, 3면에 집들이 있는 단순한 무대, 1. 프롤로그, 2. 24시간 이내의 사건, 3. 플롯을 주도하는 기생충적인 인물들의 등장 등 그 구조면에서 플라우투스와 테렌체의 성격을 이어받고 있다. 사랑의 개념 문제에 있어서도 마키아벨리는 로마의 희극과 상통하는 점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로마의 희극은 사랑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사랑은 섹스와 동일 개념으로 파악되었고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교도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다루었다기 보다는 대상을 어떻게 유혹하느냐에 편중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중세기의 문학에 와서야, 그것도 약간에 지나지 않지만, 사랑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 했는데, 그것도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서 인간의 육체란 불멸의 영혼을 거주케 하므로 인간의 육체에 경외감을 가져야 한다는 윤리관 때문이었다. 마키아벨리와 동시대인인 카스킬리오네에 의하면, 진정한 사랑이란 육체적인 아름다움 보다는 정신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풍조가 지배적이었지만 사랑을 음탕하게 간주하는 경향이 중세기와 르네상스 까지 지속된 것 또한 사실이다. 마키아벨리의 만드라골라는 그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중세와 르네상스 인들에 의해 폭넓은 공감을 얻던 사랑의 정신화 개념이 마키아벨리의 문학에서는 지나치게 이교도적이었다. 종교를 단순히 인간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는 그의 반기독교적 종교관에 입각해서 보면 이해가 간다. 

     

     

    출처> 이탈리아 문학의 이해 / 한형곤

    이미지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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