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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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율리우스 II세이.탈.리.아 역사/이탈리아가낳은인물 titani 2020. 11. 15. 18:46
교황 율리우스 2세(이탈리아어: Papa Giulio II)는 제216대 교황(재위: 1503년 - 1513년)으로, 본명은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Giuliano della Rovere(1443~1513)이다. 가난한 집안 출신인 교황 식스투스 4세(재위기간: 1471년 - 1484년)는 자신의 출신 가문인 델라 로베레 가문의 부흥과 번영을 위해 초기부터 친족들을 중용했다.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마자 조카 6명을 추기경으로 임명했는데, 덕분에 추기경이 된 줄리아노는 교황인 삼촌을 배경으로 교회 안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갖게 된다. 1480년 30대의 줄리아노는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교황 특사로 파견되어 4년간 프랑에 체류하였다. 식스투스 4세의 선종 이후에도 후임 교황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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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대결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11. 8. 06:07
1504년, 피렌체 정부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공동 작업을 위촉했다. 이것은 사실상 두 천재에게 경쟁을 시킨 셈이 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예술과 고독이라는 공통점이 서로를 가깝게 할 것 같은데 오히려 타인들보다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 중에서도 레오나르도가 더욱 고독하였다. 그는 이미 52세이며, 미켈란젤로보다 20세나 연상이었다. 30세에 피렌체를 떠나 있었던 그는 섬세하고 다소 소심한 성격이라 모든 일에 매우 민감했다. 회의적인 그의 지성은 어떤 일에나 쉽게 열광하는 이 지방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위대한 딜레탕트,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절대적으로 고독한 인간은 조국이나 종교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의 보호자였던 로도비코 일 모로의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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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첫 회화작품 <Doni Tondo>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10. 29. 17:27
다비드의 명성은 이탈리아를 건너 프랑스에까지 전해졌다. 피에로 소데리니는 피사Pisa에 대항하여 연맹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프랑스 루이12세에게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다비드를 보내고 싶어 했다. 청동으로 제작한 중간 정도 사이즈를 주문하였는데, 다비드를 막 끝내고 창작력에 불타 있던 29세의 미켈란젤로는 (이미 교황 피오 3세를 위한 시에나 성당 작업이 밀려있었는데도) 이 청동 다비드, 대리석 성모자 Madonna of Bruges, 두 점의 대리석 성모자 원형 부조,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를 장식하기 위해 피렌체 양모협회가 주문한 12사제 대리석 작품 등을 모두 승낙했다. 주문을 잔뜩 받아놓은 그는 잠시 쉬는 의미에서 회화작품을 하나 완성한다. 미켈란젤로의 단품으로는 유일한 회화작품인 는 아뇰로 도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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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10. 25. 19:25
약속했던 시간은 자꾸 늦어지고 있었다. 장막이 쳐진 오페라 델 두오모에서는 밤이고 낮이고 미켈란젤로의 작업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상황을 알 수 없었다. 그 자신도 아무 언급을 하지 않았다. 5미터가 넘는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는 아고스티노 디 두치오의 작업이 1464년부터 진행되다가 중단되었고, 1475년 다시 안토니오 로셀리노와 계약을 체결하였으나 작업은 진행되지 않은 채 26년간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작업을 위해서는 이전의 조각을 깎아내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했고, 미켈란젤로가 구상한 다비드를 위해서는 대리석에 여분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초기 작업에도 시간이 걸렸다. 작업을 위한 비계 위에서 돌 먼지를 뒤집어쓴 미켈란젤로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비밀스럽게 작업했다. 전기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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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피렌체에서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10. 21. 19:59
피에타 작업을 끝마친 미켈란젤로는 아버지에게 꽤 많은 돈을 보낸다. 로마에서 그는 외롭고, 행복하지 않았다. 온 가족의 무거운 짐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었다. 가족들은 항상 그에게 돈을 요구하였고, 그는 돈이 없을 때에도 자존심 때문에 거절하지 않고 보내주었다. 그의 건강은 이미 악화되었다. 조악한 식사와 과로, 냉기와 습기가 건강을 침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꽤 심각한 병에 걸리기까지 하였다. 부친은 '가난한 생활은 선하나, 궁핍은 악'이라고 편지로 꾸짖었으나 그는 자기의 건강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모든 고통을 참고 이겨 온 것은 모두 당신들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여러가지 걱정들도 모두 당신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1501년 봄, 그는 피렌체로 돌아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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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 23세의 성취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10. 14. 01:54
피에타Pietà 현재 바티칸시 성 베드로 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작품 피에타는 그 아름다움이나 완전성에 대하여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보는 순간 누구나 알 수 있고, 반드시 보아야만 하는 1,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1498년 8월 27일 체결된 계약서에는 당시 로마 교황청 주재 프랑스 대사이자 산 디오니지의 수도원장이던 잔 드 빌레르 추기경, 보증인 야코포 갈리,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의뢰는 계약서를 작성하기 훨씬 전에 확정되었던 것 같다. 그 해 4월에 이미 미켈란젤로는 카라라에서 대리석을 고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성된 작품의 높이가 174cm에 이르는 이 카라라산 하얀 대리석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손으로 조각되고 구석구석 연마되어 보석처럼 빛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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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 초기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9. 26. 14:32
1490 년, 도메니크회의 수사 사보나롤라는 산 마르코 수도원에서 묵시록에 관한 설교를 시작했다. 당시 그는 37세였고 미켈란젤로 15세, 성령으로 들끓는 것 같은 자그마한 남자가 토해내는 열변을 눈 앞에서 보면서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낀다. 온통 피에 물든 신이 이탈리아를 분노의 칼로 찌르는 것 같은 설교였다. 피렌체는 전율하였다. 청중들은 미친 사람들처럼 울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면서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 가장 이상적인 시민이었던 사람들이 수도회에 입회하겠다고 했고 피코 델라 미란돌라, 폴리치아노와 같은 학자들까지도 이성을 잃는다. 피렌체를 비유한 소돔과 고모라, 로렌조 일 마니피코를 암시하는 부유하고 두려움이 없는 자들의 죄악에 대한 설교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미켈란젤로도 두려움에서 헤어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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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도제생활미.켈.란.젤.로/생 애 vita 2020. 9. 24. 20:15
1475년 3월 6일생인 미켈란젤로는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피렌체 시민으로 당시에는 카프레제Caprese 행정관이었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유모에게 맡겨 기르게 했는데, 교외(세티냐노Settignano)에 살고 있던 유모의 남편은 석수장이었다. 끌과 망치를 가지고 노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고 자신의 글에서 밝히고 있는 미켈란젤로는 13세가 되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술가의 길을 택해 당시 거장 화가 중의 한 명이었던 도메니코 길란다이오의 도제 생활을 하게 된다. 1400년대 말의 피렌체는 길에서 베로키오, 보티첼리, 젊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로쪼 같은 예술가, 폴리지아노와 피코 델라 미란돌라와 같은 학자들을 흔하게 마주칠 수 있는 도시였다. 수많은 예술계 거장들이 피렌체 시내에 공방을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