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지식인 다리오 포 Dario Fo
199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다리오 포의 블로그
http://www.dariofo.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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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부터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동화와 여행가들, 수공업 장인들의 이야기와 접했는데
포에 의해 수없이 인용되고 추억되던 그들은 아마도 그 지방의 소문난 이야기꾼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재미있게' 이야기화하는 재능은 다리오 포의 예술 여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2차대전중에 낙하산병으로 자원 입대했던 곳이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사회공화국'(RSI) 이었다는 사실이
1978년 잡지 Gente에 실렸고
다리오 포는 이에 관해 " 내가 한때 사회공화국 지원병이었다는 사실을 한번도 부정해본 적이 없다. 나는 당시 17살이었다 " 고 말했다.
이러한 포의 과거경력은 그 당시 상당한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밀라노의 브레라 아카데미아를 졸업한 후, 포는 1950년부터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배우와 풍자극 작가로 경력을 시작한다.
1954년 배우이며 동료인 프랑카 라메와 결혼하고,
1955년 로마로 거주지를 옮겨 시나리오 작가로 일한다.
1956년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를 드라마 작가 Franco Parenti 와 함께 집필하고 연기했는데,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작품들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1958년부터 1968년 까지 부인과 함께 다리오 포 - 프랑카 라메 회사를 설립해 텔레비젼 방송국 RAI 의 Canzonissima 에서 단막극 시리즈를 선보이지만 당국의 잦은 검열 때문에 방송국을 그만두고 극장으로 돌아온다.
1959년에서 1961년 사이에 쓴 희극들은 풍자극의 원리들을 차용하여 더욱 풍부하고 확장된 어릿광대극 이었다.
극장들의 배타성에 대해 "브루조아 극장"이라고 비판하던 포는 이후 광장이나 민중의 집, 공장 등 다양한 청중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에서 공연하기 시작한다.
1968년 민중을 위한 공연장이라는 초기의 극장 개념으로 돌아가려는 목적으로 극단 '누오바 쉐나 Nuova Scena' 를 만든다.
1969년 고대 극본을 Grammelot 으로 재작업한 1인극 Mistero buffo 가 크게 성공했는데, Grammelot 은 16세기에서 18세기 공연 양식인 Commedia dell'Arte 에서 유래된 극장언어로서 포는 파다나 Padana 지방의 다양한 방언을 사용했다.
1970년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우연한 죽음Morte accidentale di un
anarchico' 을 공연한다. 이는 1969년에 사망한 아나키스트 쥬세페 피넬리Giuseppe Pinelli 의 죽음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분명했으나 검열을 피하기 위해 20세기 초 미국에서 벌어진 유사한 사건을 차용한다.
쥬세페 피넬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밀라노 경찰국의 부국장이던 실제인물 루이지 칼라브레지(1972년 피살) 는 이 연극에서 닥터 카발치오니로 등장하는데, 포는 루이지 칼라브레지의 단죄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일원으로 주간지 L'Espresso 에 실릴 호소문에 아내와 함께 서명한다 .
1977년 4월 22일 포는 아내 프랑카 라메와 함께 텔레비전에서 다리오 포 극장 Il teatro di
Dario Fo 이라는 시리즈물을 시작했는데, TV라는 미디어를 통해서만 가능한 - 다양한 관객층의 호평을 받으며 그에게 미래의 노벨상을 안겨주게 된다.
2008년 디자이너 로메오 질리 Romeo Gigli 의 추동복 패션쇼장 첫째 줄에 앉아
커다란 노트에 그렸다는 다리오 포의 스케치들.
출처> g.policardi@amiciff.it
예술대학 졸업 후 라디오 등에서 활동할 때부터 그의 언어는 당시의 현실, 특히 정치와 종교 및 사회의 폐습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부인과 함께 TV 프로를 위한 2인 극단을 설립, 국영 TV 채널에서 익살과 풍자가 가득한 촌극으로 1960년대에 유명해지지만
정부의 잦은 검열 때문에 연극무대로 되돌아 간다.
공산당과 함께 기존의 연극 풍토에 반하는 극단을 설립, 거리의 대증 속으로 돌이와 거리와 광장 등을 전전하는 유랑 연극인으로도 활동한다.
외국에서도 유명해진 계기가 된 모노 드라마 '우스꽝스러운 비밀'은 16 ~ 18 세기 이탈리아와유럽에서 성행하던 민중가면극의 풍자성을 되살린 것으로 평가받았다.
- 부산일보 김 선주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