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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기 로마 - 왕정시대의 국가기관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0. 5. 15. 19:59



    초기 로마가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는 것은 합리적인 추정이다.
    그 견해는 로마 광장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기념비 라피스 니게르 (흑석) 밑에서 발견된, RECEI - 왕이라는 단어의 한 형태 - 라는 단어로 뒷받침된다.





    Lapis Niger in Foro Romano





    공화정시대에 왕정의 잔재를 느낄 수 있는 용어들이 살아남아 있었고,
    대사제의 관저로 쓰인 레기아( Regia) - 곧 왕의 집은 원래 궁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로마는 성문법을 가져본 적이 없고, 대신에 오늘의 영국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특정 시점에 국제(國制, constitution) 가 무엇인가가
    결정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발전하고 변하는 관습과 선례와 규례의 복합체만 있었을 뿐이다.
    왕정시대의 국제는 복잡하지 않았다. 기본 골격은 공화정 시대에도 그대로 보존되었다.





    제 6 대 왕 Servius Tullius





    초기 로마 국가의 통일과 권력과 권위의 상징은 왕이었다. 종신직이었지만, 세습되거나 민회에서 선출되지는 않았다.
    고대 사가들의 견해는 공화정 시대 집정관 선출 제도를 감안한 것으로 보이는 데, 선왕이 죽으면
    점을 치는 것으로 신들의 뜻을 판별하는 아우스피키움(Auspicium) 의 권리가 사회지도층 인사로 구성된 자문단(원로원)에게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들 중의 한 명을 선출하여 왕권대행 interrex 으로 닷새를 봉직하게 하고, 다시 또 다른 의원을 선출하여 닷새를 봉직하게 하는 일을
    신과 원로원의원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왕이 선출될때까지 계속했다.
    왕이 선출되면 성인 남자들로 구성된 민회, 즉 쿠리아 회 comitia curiata에서 비준했다.
    민회의 기능은 단지 회의에 참석하여 점의 최종 결과에 대한 증인이 되고, 지지를 표시하며, 충성과 순종을 맹세하는 것이었다.

    에트루리아인들의 왕정시대에 왕권은 군통수권, 사법권, 제사권 등 세 가지 기증을 망라하는 거의 총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왕은 사법私法 이나 민법의 입법과는 무관했다.
    초기 로마에서 법은 왕의 명령이나 민회절차에 의해 제정되지 않고 공동체의 관행과 사회적 도덕심에서 발달한 듯하다.

    왕은 국가 수장, 총사령관, 재판장, 대사제로서 많은 의무들을 수행하기 위한 방대한 권력을 소유했다. 그는 관습에 의한 법이든 명령에 의한 법이든 지신의 릭토르을을 통해서 법을 집행했다.
    왕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종교적인 것이었다. 종교는 왕권의 기초였다. 왕은 종교의 수장이므로 그의 인격을 훼손하거나 침해해서는 안되었다.





    카틸리나를 고발하는 키케로 (따라서 공화정시대의 원로원 모습)





    원로원 초기 로마 정부의 두번째 기관으로 왕에게 조언을 하는 지도급 원로들의 집합체인 원로원 senate 이었다.
    아마도 최초의 원로원은 씨족 지도자들의 회의체였던 듯하며 훗날 그 중 한사람이 왕이 되었다.
    왕제가 생긴지 얼마 안되어 왕의 권한이 증대되면서 원로원을 순수한 자문회의로 격하시켰다. 씨족들 gentes 이 더 많은 수의 부유하고 권세있는 가문들로 분산됨에 따라 왕은 원로원 의원 수를 늘려 300명으로 구성되기에 이르렀고, 이 숫자가 기원전 1세기 술라Sulla 때까지 유지되었다.

    원로원은 입법권이 없었고, 왕이 자문할 때만 조언할 수 있었다. 아우스피키움의 권리 이외에 또하나의 유서 깊은 권위를 갖고 있었다.
    아욱토리타스 파트룸 austoritas patrum 이란 용어로 요약되는 이 권한은 원로원이 입법에 앞서 민회의 결의안을 재가하는 권한이었다.









    민회 정부의 세번째 기관은 코미티아 쿠리아타로 알려진 민회였다.
    기원은 모호하지만 알려진 민회중 가장 오래된 쿠리아 회는 통일된 로마 공동체의 통일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듯하며,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남자 시민들로 구성되었다.
    민회는 왕이 어떤 사업에 대해 재가를 받기 위해 소집할 때만 모임을 가졌다.
    경우에 따라서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종교의례를 거행하기 위해 모이기도 했다.
    시민들은 쿠리아 라고 하는 무리를 대오로 정렬했고, 쿠리아타 curiata 라는 칭호는 거기에서 유래했다.
    각 쿠리아는 일정한 지역에 사는 친족의 무리였던 것 같으며, 이들은 종교적, 군사적, 정치적 목적을 위해 하나의 단위로 조직된 듯하다.
    전래에 의하면 로마는 람네스, 티티에스, 루케레스 세 개의 부족으로 구성되었고, 각 트리부스는 열개의 쿠리아로 조직되었다고 한다.'
    쿠리아 회에서 각 쿠리아는 하나의 투표권을 가졌으며, 그 투표권은 쿠리아 구성원들의 다수결로 결정되었다.

    왕정시대에 쿠리아 회의 역할은 소극적인 것이었으나 왕은 인민의 협조와 동의를 얻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권리를 무시하지 않을 만큼은 지혜로웠다.
    인민들은 왕이 거행하는 종교의식에 참여했고, 왕위인양 때 최종 결과를 지켜보고, 왕이 명령권 imperium 을 취할 때 공개적으로 충성을 맹세했다.


    이 초기의 민회는 공화정 초기에는 쇠퇴하여 코미티아 켄투리아타 comitia centuriata 로 알려진, 무장을 할 능력을 갖춘 사람들로 구성된 또 다른 민회로 대체된다.







    내용 발췌> 로마사 -  프리츠 M. 하이켈하임, 세드릭 A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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