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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 로마 숙명의 적 - 카르타고 Carthage, FINALE
    이.탈.리.아 역사/고대역사 storia antica 2015. 2. 17. 23:10


    마지막 접근


    기원전 206년 스키피오는 로마로 돌아와 콘술에 선출되었다.

    원로원은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를 두고 논쟁중이었다.

    스키피오는 아프리카 침공을 원했고, 원로원은 마지못해 아프리카 침공안을 승락했지만 병력 징집은 허락하지 않았다.




            




    스키피오는 민회에 직접 나가 원정 지원자를 모집하여 7000명의 입대자를 확보했고, 이들은 이미 시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두 개의 군단과 합류해 아프리카원정군을 형성했다.

    파비우스는 원정의 실패를 확신했으나, 그것은 스키피오의 비범한 과단성, 지략,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을 고려하지 않은 판단이었다.


    기원전 204년 스키피오는 튀니지의 우티카 근처에 상륙하여 누미디아의 두 왕 시팍스와 마시니사의 분쟁에 개입했다.

    두 왕이 모두 카르타고 총독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딸 소포니스바Soponisba를 사랑했는데, 세력면에서 약간 우세였던 시팍스가 소포니스바를 얻어

    경쟁자를 폐위하고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다.  마시니사는 스키피오의 진영으로 피신했다.






    The Death of Sophonisba, by Giambattista Pittoni (1730)




    전에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와 시팍스와 거짓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했었다. 오로지 두 진영의 의심을 무마하고 그들 군대의 특성과 배치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스키피오는 일단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고나자 밤에 시팍스의 군대 막사를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

    카르타고 기병대가 화재를 진압하려고 달려왔다가 시팍스의 군대와 함께 궤멸했다.


    마시니사는 시팍스를 생포하고 소포니스바와 결혼한 뒤, 누미디아로 의기양양하게 입성했다.

    그는 스키피오에게 대가로 기병을 제공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얼마 뒤 스키피오는 소포니스바가 남편을 유혹,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게 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여 마시니사에게 상아의자 및 허울좋은 영예와

    혜택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그를 설득하여 독을 섞은 포도주로 소포니스바를 제거하게 한다.




    카르타고인들도 그에게 평화협상을 제안하는 한편 뒤로는 이탈리아에 있던 한니발을 불러들였다.

    한니발은 이탈리아를 떠나기 전에 청동판에 자신의 연대기를 새겨놓고, 그것을 크로톤 근처의 헤라 라키니아 신전에 보관했다.

    한니발이 아프리카에 도착한 뒤 평화협상이 갑자기 중단되었다. 스키피오와 한니발이 나라가라Naraggara에서 조우할 때까지

    전쟁이 계속되었다. 나라가라는 자마에서 사흘을 행군해야 나오는 곳이지만 전통적으로 그 전투는 자마전투라고 불리운다.






    Roman general and statesman 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meets the Carthaginian leader Hannibal




    자마(나라가라)전투(기원전 202년)



    기병이 취약했던 한니발은 새로운 전략을 세워야했다.

    기병은 정상적인 배치에 따라 보병의 양 측면을 보호하게 하고 중앙을 파격적으로 배치했다.

    맨 앞줄에 코끼리를 세우고, 다음 줄에 경보병 부대를 세우고, 그 다음 줄에 중보병 부대를 세우고, 그 다음줄은 빈 공간으로 남겨둔 다음

    다시 중보병 부대를 세웠다. 마지막으로 후미에 이탈리아에서 데리고 온 노련한 병사들을 예비대로 세웠다.

    앞의 세 줄에 세운 보병은 초기공격을 흡수하는 방패로 사용한 다음 나중에 로마의 후미를 공격할 때 사용할 계획이었다.


    로마의 전형도 두 개의 기병을 측면에 배치하는 방식이었으나 스키피오는 히스파니아에서 익힌대로

    군단을 작은 단위 부대로 세분하고 단위 부대들 사이에 공간을 남겨 적의 코끼리들이 돌진해와도 대형이 깨지지 않도록 했다.







    따라서 한니발의 코끼리들은 로마의 대형에는 아무런 피해도 끼치지 않은 반면 양 측면에 배치되어있던 한니발의 기병에게로 우르르 몰려가 손상을 입혔다.

    처음부터 약했던 한니발의 기병은 이로써 마시니사의 기병에게 제압당하게 되었다.

    약 1만 2천의 용병으로 구성된 한니발의 전열근 로마의 공격을 처음에는 용감하게 오래 저지했으나, 카르타고인들이 생각만큼 신속하게 지원하러 오지 않자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후퇴하다고 로마 제 2열에 짓밟히고 만다.

    한니발은 전열을 안정시키기 위해 계획보다 빨리 예비대를 전열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잘 훈련된 로마 병사들은 처음에만 혼비백산하다가 곧 전열을 가다듬었다. 와중에 한니발의 예비대가 후미에서 적의 기병에게 강한 타격을 입는다.






    누미디아 기병





    스키피오가 시팍스를 상대로 벌인 교활한 술책으로 카르타고 기병이 약해진 것이 한니발의 패인이었다.

    카르타고 병사들이 대부분 전사했으나, 한니발은 가까스로 피신했다.




    평화조약


    카르타고에 평화협상을 요청하도록 조언한 사람은 한니발이었다. 조건이 매우 나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렇게 조언한 것이다.

    기원전 201년 카르타고는 아프리카 외부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고, 누미디아의 독립과 마시니사와 로마의 동맹을 승인하고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서는 전쟁을 하지 않고 심지어 아프리카에서의 전쟁도 로마의 허락이 필요하며, 함대를 열척의 가벼운 트리레미스나

    해안 경비선으로 축소하며, 1만 탈렌툼의 배상금을 50년간 갚아야했다.


    스키피오는 로마로 돌아가 원로원 정적들이 한사코 저지하려던 개선식을 거행하고, 아프리카누스라는 자랑스러운 칭호를 부여받는다.





    The Triumph of Scipio Africanus by Apollonio di Giovanni di Tommaso Tempera with gold & silver on panel




    로마가 승리를 거둔 원인


    한니발이 만일 자마 전투를 승리했더라도 카르타고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결국 패했을 것이다.

    트라시메네와 칸나이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한니발은 로마의 동맹을 깨뜨리지 못함으로써 전쟁의 승패는 일찌감치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로마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준 일등공신은 자마 전투의 승리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아니라 지연자 파비우스 막시무스 였다.

    그가 사용한 지연과 고갈 전술이 한니발의 구도를 무력화시키고 로마의 막대한 전쟁 동원력이 가동될 시간을 벌어주었던 것이다.

    그는 지연함으로써 국가를 구했다. cunctando restituit rem


    카르타고 내에 한니발 반대 파벌이 존재하긴 했지만 카르타고는 한니발과 전쟁을 일관되게, 총력을 기울여 지원했다.


    로마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공정하고 서로에게 유익한 동맹체제로부터 카르타고와는 비교할 수 없이 월등한 인적, 물적 자원을 공급받았고

    그것이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한니발의 패배를 이루어낸것이다.




    한니발의 운명


    후대 역사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나폴레옹과 마찬가지로 한니발은 행정가로서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전쟁이 끝난 뒤 카르타고의 귀족들은 부정한 방법을 통해 전쟁배상금을 하층민들에게 떠넘김으로써 자기들의 재산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이에 인민은 일반 병사를 공평하고 선하게 대했던 전쟁 영웅 한니발을 지지하고 기원전 196년에 그를 수페스shophet, sufes, 즉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한니발은 수입과 지불 능력에 기초한 조세제도를 수립하고, 세금 지출에 대해 정부가 국민에게 책임을 지도록 만들었다.

    재정 집행이 대단히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자마 전투가 끝난지 10년 밖에 되지 않은 기원전 191년에 카르타고는 전쟁배상금을 일시에 갚겠다고 제안할 수 있었다.

    로마는 그 제안을 거부했다. 상업과 공업이 활기를 되찾았고, 카르타고는 다시 지중해에서 가장 번창하는 항구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카르타고의 괄목할 만한 회복에 놀란 로마는 한니발이 또 다른 전쟁을 계획하고 있다는 그의 정적들의 비난을 근거로

    그를 전범으로 로마에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한니발은 동방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로마는 당시에 그 지역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점차 판도를 넓혀가던 로마에 그 지역을 첨가하는 과정에서 한니발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기원전 183년 그를 죽였다.








    출처> 로마사 - 세드릭 요/프리츠 하이켈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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